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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과30년 돌아보면 행복

기자명 법보신문

전 국립재활원 법우회장 김 영 숙 보살

<사진설명>월정사에서 단기출가를 마친 김영숙 보살은 여생을 장애인 제자들과 수행 토굴에서 조용히 살길 바랬다.

70년 각심원서
정신지체아들과 인연
대소변 받아내며
24시간 함께 생활
재활원 법우회장으로
부처님 말씀 전해
지난 6월 정년 퇴임
장애제자들과 수행 발원

 

“이 세상에서 어린 시절이란 얼마나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시절인가. 그런데도 어른들의 어긋나버린 희망과 영원한 새 시작의 짐을 지워놓는 곳은 바로 연약한 어깨 위라는 걸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절감하게 된다.”(가브리엘 루아, ‘내 생애의 아이들’)

“엄마, 가지마! 가지마, 엄마!!”
바다를 사이에 두고 정신지체아들이 절규했다. 뱃머리를 돌리던 선박 갑판 위에 한 여인의 가슴은 문드러졌다. 1983년 4월 국가 정책으로 어쩔 수 없이 목포 공생원에 맡겨야만 했던 아이들. 그네들의 눈물어린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바닷바람을 맞아야 했던 전 국립재활원 법우회장 김영숙(58·원각성) 보살. 그날 그는 각심원(현 국립재활원)에 돌아와 심하게 앓았다.

지난 30여 년 동안 국립재활원에서 정신지체아, 소아마비, 지체장애인들을 키워 온 김 보살이 아픈 기억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중앙 각심원이 1980년 초 국가 정책으로 후천적 장애인들을 위한 재활공간으로 바뀌었어요. 그래서 각심원에서 돌보던 정신지체아 200여 명을 전국의 장애인 시설에 보내야만 했지요.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생이별이었다. 친자식을 떼어놓은 것 같은 아픔, 살갗을 벗겨내는 듯한 고통에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평생을 장애인들을 위해 살아 온 그. 그 인생은 어려운 이웃들을 도운 아버지로부터 비롯됐다. 한국전쟁 때 북쪽 땅에서 공장을 운영하시던 큰 아버지는 미처 남쪽으로 피난오지 못했다. 급한 데로 직원들은 익산에 있던 아버지에게 맡기셨다. 총칼을 피해 남으로 남으로 피난 왔던 오빠들을 아버지는 친아들처럼 돌보셨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밥을 굶고 거리를 배회하는 전쟁고아들이 생겼다. 고향 익산에도 전쟁고아들이 넘쳤다. 산림계장을 지내셨던 아버지는 그들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형편껏 도우셨다. 주머니에 100환이 있으면 다 내어주실 만큼 속정도 깊었다.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무작정 고아원 원장 선생님이 돼 여린 아이들을 정으로 감싸 안고 싶었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갖고 처음 입사한 곳이 중앙 각심원이었어요. 한국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 그 중에 정신지체 장애를 가진 고아들은 거리에 방치돼 곤 했는데 그런 아이들을 키우던 곳이었죠. 24시간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야 했지만 망설일 이유가 없었어요.”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 대. 국가에서 국비로 장학금 4만 5000원을 지원하면서 사회복지사를 육성했다. 고아원 원장을 꿈꾸던 그는 당장 서울로 올라와 1975년 당시 청와대 옆 사회복지지도자훈련원에서 1년 과정을 마치고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손에 들었다. 감격스러웠다. 꿈을 위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이듬해인 1976년 각심원에 취직했다. 깨달을 각(覺)에 마음 심(心). 전쟁 통에 장애를 가진 전쟁고아들을 불자였던 이문영 초대원장이 거두어 기르던 곳이었다. 이름은 이 원장과 인연이 있던 스님이 붙인 것.

각심원에서는 숙사 1곳당 1명의 생활지도 선생님들이 10곳의 숙사를 돌아가며 정신지체아들과 생활했다. 그 역시 200여 명의 정신지체아들과 24시간을 함께 보냈다. 아이들의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으며 밥을 먹여주고, 대소변을 받아내며 목욕을 시켰다. 말썽을 부리는 아이들 탓에 속이 무던히도 상했다. 그러다 가끔 ‘엄마’라 부르며 안길 때면 가슴에 아이들을 안으며 행복을 맛봤다. 그렇게 정신지체아들 곁에서 선생님으로 때로는 ‘엄마’로 함께 울고 웃었다.

1986년 국가 정책으로 정신지체아들과 생이별 후 각심원은 후천적 장애인들을 위한 재활원으로 역할이 바뀌었다. 자식 같은 아이들과 헤어진 그는 마음을 다잡고 양재 교육을 받은 뒤 양복을 재단하고 재봉하는 양재 담당교사로 장애인들을 제자로 맞았다.

그 무렵 그는 재활교육을 마친 장애인들을 마냥 취직만 시킬 수는 없었다.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싶었다. 전법에 대한 그의 발원이 간절했던지 1986년 국립재활원에 법우회가 생겼다. 그는 초대회장을 맡아 퇴임 직전까지 신명나게 일했다. 기도를 어찌나 열심히 했던지 꿈 천지엔 부처님이 가득했다. 양재를 가르치던 교실에서 재봉틀을 한 쪽으로 치우고 제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불교를 가르쳤다. 얄팍한 불교 지식이었지만 “옛날옛날 부처님은……”으로 시작한 이야기로 참된 사람이 되는 길을 제시했다. 정식 법당이 생기기 전까지 10년 가까이 이웃종교 종교실을 부러워하며 법회를 열었다. 힘에 부쳤지만 남다른 불연이 그를 지탱해주었다.

어머니는 절에 살다시피 할 정도로 불심이 깊었다. 초등학교 시절 “금붕어가 노는 강물이 좋으냐, 산 속 바위틈에서 떨어지는 약수가 좋으냐”고 어머니가 물으셨다. 약수가 좋다고 답하니 어머니는 “출가할 인연은 아닌가 보다”며 안타까워하셨다. 업이 많다고 출가를 권하던 어머니. 그 권유를 운명처럼, 지난 30여 년 간 장애인을 보살피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믿었다.

그래서 한 우물만 파고 살았다. 장애인들 곁에서 숙명처럼 재활교육을 하고 부처님 말씀을 전하며 기도 외엔 아무것도 해보지 못했다. 1995년 그렇게 염원하던 법당이 입적하신 정진 스님의 도움으로 1층에 마련되자 그의 기도는 더 신명났다. 장애인 제자들을 위해 출근길마다 법당에서 예불과 기도를 올리고 점심시간마저 기도로 보냈다. 또 6시 퇴근 후엔 2시간은 지장기도를 했으며 하안거, 동안거에 맞춰 2번 씩 100일기도를 입재하고 회향했다. 휴가나 여행은 그의 인생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결혼도 장애인들과 해버린 셈이었다.

2007년 6월 그는 국립재활원에서 정년퇴임했다. 젊은 시절을 다 바친 그 곳을 나오며 돌아보기를 수차례. 걸어온 길에 대한 집착을 놓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속에 늘 간직했던 수행자의 삶에 대한 욕심도 그를 놓지 않았다. 퇴임 후 곧바로 월정사를 찾아 수심(修心)이란 법명을 받고 한달 간 단기 출가를 했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 승복, 발우공양, 새벽예불, 참선, 목탁 소리, 염불 소리 등등 그는 절 생활에 푹 젖어 들었다. 회향 무렵 스님이 되고파 출가 신청서까지 냈다. 전생의 업장이 그리도 두터웠던 것일까. 적지 않은 나이가 걸림돌이 됐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스님이 되고자 했던 염원이 무너져 내린 순간이었다.

“나를 엄마처럼 믿고 따르는 장애인 제자들이 노후를 함께 보낼 토굴을 마련하자고 하네요. 조용한 수행처를 만들어 제자들과 수행에만 전념하고 싶어요.”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찻잔이 조금씩 비워가고 있었다. 지나간 삶의 추억들도 함께 비워낸 것일까. 그는 찻잔에 수행자의 향기를 한 방울 한 방울 소담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최호승 기자 sshoutoo@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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