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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인목대비 [끝]

기자명 법보신문

“피지도 못한 내 아들 부처님께서 거두어 주소서”

광해군에게 8세 된 아들 영창대군 억울한 죽음
인조반정 후 명산대찰 돌며 아들의 명복 발원

영화 ‘밀양’에서 여주인공(전도연)은 아들을 죽인 유괴범에 대한 분노를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를 파괴하려고 발버둥 친다. 자신을 괴롭힌 인간을,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인 이를 용서하기란 죽기보다 더 고통스러움을 영화는 잔혹할 정도로 리얼하게 보여주었다.

타인에 대한 분노와 미움을 어떻게 버릴 것인가. 이것은 인류의 역사가 전개되는 동안 종교에게 주어진 가장 큰 숙제였다. 붓다와 예수 같은 인류의 스승들은 미움을 버리고 대신 자비와 사랑, 박애를 전하라고 설파했다. 그들은 미움을 미움으로 갚으면 그 자리에 후련함이 남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복수 내지는 스스로의 파멸이 있다는 진리를 알려주었다.

고매한 인격자들은 그 원리를 깨우침으로써 파멸의 그물에서 벗어나지만, 대부분의 분노에 찬 사람은 스스로의 마음이 다 소진된 후 그 고통스러움을 감당을 할 수 없을 때 비로소 스스로를 절대자 앞에 바치고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자유로워진다.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는 후자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원통함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평생 고통스럽게 살아갔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부처님께 귀의해 아들과 아버지의 명복을 비는 일뿐이었다.

열아홉의 나이로 선조의 두 번째 왕비가 된 인목대비 김 씨는 스물다섯 살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선조와 혼례를 치를 당시 선조의 나이는 51세, 무려 32세의 연상이었다. 그 이듬해 첫 딸 정명공주를 낳고 그 이듬해 둘째 딸을 낳았지만 그 아이는 태어난 직후에 죽어버렸다. 그리고 두해 뒤에 선조의 유일한 적통 왕자를 낳았으니 그가 바로 영창대군이다.

선조가 평생토록 고대하던 적자였지만, 그의 탄생은 조선왕실에 엄청난 비극을 불러왔다.
영창대군이 채 두 돌이 되기도 전에 선조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는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되었다.

유교적 이데올로기로 본다면 조선의 대통은 마땅히 영창대군이 이어야 했다. 적서(嫡庶)가 분명한 유교사회에서 적자와 서자의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였고, 이는 왕실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왕통의 계승이기 때문에 훨씬 더 중요했다.

선조는 살아생전 광해군의 서자 지위를 박탈하고 자신의 적통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하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인목대비 또한 자신의 아들이 무럭무럭 장성해서 왕위에 오르리라는 장밋빛 꿈을 키워나갔다. 자연히 광해군은 자신의 지위를 불안해하며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에 대한 적개심을 쌓아갔다.

선조가 오래도록 살아 영창대군이 성장할 때까지 보호를 해주었다면, 혹은 인목대비가 훨씬 더 냉정하고 정략적인 인물이었다면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영창대군이 세 살이 되었을 때 선조는 세상을 떠났고, 스물다섯 살의 순진한 과부와 그의 자식들을 지켜주기에 인목대비의 친정 집안은 너무도 미력했다.

광해군의 등극은 인목대비의 불행을 알리는 선전포고에 불과했다. 광해군에게 있어서 영창대군의 존재는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니었다. 권력의 속성상 둘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언제든지 한 명이 다른 상대를 무너뜨릴 수 있는 적에 불과했다.

『계축일기』에 따르면 광해군은 자신의 세자가 어렸을 때부터 늘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비록 이 궁궐에 대군 10명이 있더라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그러나 영창대군은 너와 조카간 아니냐. 예전에 세조께서는 단종이신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니, 나는 그런 일이 생길까 두렵구나. 내 반드시 영창대군을 없애고 너를 편안케 하리라” 하였다.

결국 광해군은 재위 5년이 되었을 때 발생한 단순 살인강도사건을 영창대군과 그의 외조부 김제남이 연루된 대역무도 사건으로 둔갑시켰다.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은 역적의 수괴라는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았으며, 친정어머니는 역적의 부인으로 유폐되었다. 영창대군은 강제로 출궁되어 도성의 여염집에 구금되었다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 사건이 바로 계축년에 일어난 계축옥사이다.

여덟 살 된 영창대군은 영문도 모른 채 강화도로 끌려가 가시로 울타리를 친 집에 감금되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실록에는 “강화부사였던 정항이 음식을 넣어주지도 않고, 방 안에 가두고 불을 때서 뜨거워 눕지도 못하게 되자 영창대군이 창살을 부여잡고 밤낮으로 울부짖다가 기력이 다하여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인목대비는 서궁에 유폐되었고, 폐서인이 되어 한낮 후궁 신분으로 전락했다. 이때 광해군이 그녀를 폐서인으로 강등한 명분은 역적 혐의였다. 비록 어머니라 하더라도 왕에게 불충하면 더 이상 어머니가 아니라는 논리였다. 서궁 주위로 담장이 높이 쌓이고 파수대가 설치되었다. 인목대비는 여기에 갇혀 생필품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 채 10년간 죽음 같은 세월을 보내야했다.

광해군의 잔인한 행위는 결국 민심의 이반을 가져왔다. “천명(天命)에 의해 덕(德)이 있는 자가 천자(天子)가 되고 천명(天命)에 반하는 자는 천하를 잃는다”는 맹자 사상으로 무장된 반정세력들은 광해군을 쫓아내고 인조를 국왕으로 세웠다. 반정의 주체들이 내세운 명분은 폐모살제(廢母殺弟). 그들은 어머니를 폐위시키고 동생을 죽인 광해군을 폐륜아로 규정했다.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 인목대비가 인조를 만나 던진 첫마디는 “광해군 부자의 살점을 씹겠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광해군의 죄악을 38가지로 조목조목 나열하고 속히 사형에 처할 것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광해군의 세자는 사사되었고 세자빈은 바다에 몸을 던졌다. 광해군의 왕비도 목을 매 자살하고 광해군을 따르던 궁녀 수십 명은 사형되었다. 광해군은 제주도에서 18년간 유배되었다가 삶을 마감했다. 아직도 가슴에 분이 풀리지 않고, 고통이 사그라들지 않았던 인목대비는 인조에게 광해군까지 죽일 것을 거듭 요구했지만, 인조는 끝내 이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광해군에 대한 복수를 해봤자, 그녀에게 돌아올 것이 무엇이겠는가.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오지도, 죽은 아버지가 무덤에서 걸어 나오지도 않을 일. 이미 마흔이 된 그녀에게 남은 것은 분노와 고통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뿐이었다.
이후 인목대비는 전국 명산대찰을 돌아다니며 부처님께 아들과 아버지의 명복을 빌었다. 안성의 칠장사를 김제남과 영창대군의 원찰로 삼았으며, 금강산의 여러 사찰에 아들과 아버지의 위패를 모셔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조선시대 유학자 신익성이 금강산 유점사를 들러 기록한 『유금강내외산제기(遊金剛內外山諸記)』에는 “해장전에는 여러 불승 및 인목대비의 글씨, 정명공주가 손으로 옮겨 적은 불경이 매우 많았다”는 내용이 남아있다. 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서울대 규장각 등 왕실관련 도서관에도 인목대비가 직접 쓴 사경과 경전들이 여러 점 남아있다. 그 중 장서각에 소장된 『장수멸죄동자 다라니경(長壽滅罪童子陀羅尼經)』 추기는 영창대군을 기리기 위해 인목대비가 직접 사경한 책으로 유명하다.

이 같은 사료들은 인목대비가 말년에 불교에 귀의했고, 불법을 통해 스스로의 고통을 치유해나갔음을 알려준다. 물론 대부분의 왕실여인들이 불교신자였다는 점에서 그녀가 불교에 귀의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발원과 그녀의 사경은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기도였고, 상처 입은 영혼의 통곡이었다. 더 이상 상처 입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이가 부처님과 나눌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그녀가 아들과 아버지의 명복을 빌면서 영혼의 위로를 받았는지, 광해군을 용서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녀가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부처님께 빌고, 또 빌었다는 것뿐이다.

『잡보장경』에는 “마치 성한 불길에 사나운 바람이 불어 그 불꽃 숲에 붙어 모두 태우는 것처럼 성냄은 불꽃과 같아 남과 자기 태우나니 그것은 극히 악한 해침이니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성냄과 탐욕을 버리나니 사랑과 평등 닦으면 성냄은 차차 없어지리라”는 구절도 잇따라 등장한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불교를 통해, 사랑과 평등을 닦으면서 그녀의 분노 또한 차차 잦아들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고통과 구원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고통이 클수록 해탈에 대한 의지 또한 강해진다는 사실은 붓다와 그의 수많은 제자들이 입증해준 진실이다. 기독교에서도 마음이 가난한 자,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가장 고통스럽기에 가장 낮아질 수 있는, 그럼으로써 가장 먼저 구원받을 수 있다는 모순적 이치는 종교가 인간의 욕망과 공존하는 근거이며, 조선왕실 내에서 그토록 깊은 불교신앙이 유지될 수 있었던 본질적인 이유였다.

탁효정 기자 takhj@beopbo.com
일러스트레이터 장설 corea061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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