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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스님의 돈황본 육조단경 대강좌] 37.

기자명 법보신문

목적 잊은 채 앉아 있는 것만이 공부라 집착 말라

<사진설명>중앙신도회 부설 불교인재개발원 중국 선종사찰순례단이 조계 남화선사 조전에 봉안된 육조 혜능 스님의 진신상 앞에서 예를 올리고 있다.

 

참선 역시 방편일 뿐 목적은 깨달음이라
법상을 여의면 일상생활이 道

 

24. 돈수(頓修)

이것이 곧 계·정·혜라고 이름하니 제가 이와 같이 지어서 설하거니와 스님의 생각은 알지 못하니 화상의 보는 바는 어떠합니까.
신수 스님은 그렇게 계·정·혜를 보는데 혜능 스님이 보는 견해는 어떠냐고 묻는 것입니다.

혜능스님이 답해 말하되, 이것을 설하는 것은 가히 생각이나 뜻으로 헤아릴 수 없으나 혜능이 보는 바는 또 다르다.
계·정·혜라든가 신수 스님이 쓰는 법은 정말 불가사의해서 말로는 할 수 없으나 혜능이 보는 것은 너의 스님이 보는 계·정·혜와는 다르다고 하시는 것이지요.

지성이 묻되, 어째서 다릅니까

혜능 스님이 답해 가로되, 견해에 빠르고 느린 것이 있느니라.

이에 지성이 화상이 보는 바 계·정·혜를 설하기를 청하였다.

대사가 말하되, 너는 내가 설하는 것을 듣고 나의 견처를 보아라.
내가 계·정·혜를 설해 줄 테니까 비교해 보라는 뜻입니다.

마음 자리에 그름이 없는 것을 자성 계라 하고, 마음자리에 어지러움이 없는 것을 자성 정이라고 하고, 마음자리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자성의 혜이니라.

혜능 대사가 말하되 너의 계·정·혜는 작은 근기의 모든 사람에게 권한 것이고, 나의 계·정·혜는 상근인에게 권한 것이니 깨달아 얻으면 또한 계·정·혜도 세우지 아니한다.
이렇게 해서 앞의 것과 비교해보라는 말인데요. 이 자성자리를 깨닫게 되면 계·정·혜를 따로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행위하고, 말하고, 일상 생활하는데에 계·정·혜가 그대로 있는 것이지 일부러 계·정·혜라고 이름 지을 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계·정·혜를 따로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지성이 청하건대, 대사께서 설한 세우지 않는다는 것은 어떠합니까.

대사가 말하되, 자성은 그름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어서 염염이 반야로서 관조해서 항상 법상을 여의나니, 무엇을 세우겠는가.
우리가 잘못된 것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고 어리석은 것도 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되느냐는 것이지요. 본래는 없는데 착각에 의해서 지금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착각만 깨면 없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착각을 깨려면 존재의 원리, 마음을 바로 보라는 것이지요. 반야심경에 ‘오온개공’을 알면 일체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했습니다. ‘색수상행식’, 이것은 크게 육체와 마음입니다. 간혹 육체는 가짜이고 진짜는 마음이라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오해입니다. 모두가 공해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왜 공이냐 하면, 우리의 정신도 그렇고 육체도 그렇고 연기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단일로 독립된 것이 아니고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공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그러면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 아니냐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있다 없다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공이라는 것입니다. 연기현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정견을 말하는데 있어서 연기를 이해해야 불교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없어져서 공이 아니라 이대로 공이라는 것입니다. 연기로 존재하고 있고 복합돼 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나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름이 없고 어지러움이 없고 어리석음이 없다는 것이 마음속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양변을 여의고 나면 반야로서 관조하게 됩니다. 모든 사물과 사건을 보게 되고 나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폭력이 아니라 연민을 갖고 평화적으로 일을 해결하게 됩니다. 앞에서 법상을 여읜다고 했는데 법상은 방편이라고 봐도 좋습니다. 우리가 깨닫겠다면서 참선을 하고 앉아 있는데 참선 역시 방편이고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목적은 상실하고 앉아 있는 것만이 공부이고 진리라고 집착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법상입니다.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을 알면 항상 법상을 여의고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분은 일상생활이 다 도(道)이고 또 그렇게 됩니다.
불교를 공부하면 수단과 목표가 확실하게 보입니다. 이것만돼도 세상이 어지럽지 않을 것입니다. 돈을 버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이고, 돈을 버는 것은 수단입니다. 또 정치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보수나 진보는 수단이고 국가가 잘되고 국민을 편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뒤범벅이 되어서 보수와 진보가 목표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들이 보면 정말 아기들이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정말 유치하게 보입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수단과 목적을 가려서 살게 되면 인간적으로도 성숙하고 발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돈을 버는 기회도 더 많이 생기고 그것으로 인해서 나를 해치고 남을 해치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해치고 남도 해치게 됩니다.
이런 공부는 학문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육조 스님이 학문을 한 것이 아니잖아요. 이것은 학교에서도 배울 수 없는 것이고, 이 공부가 굉장한 것입니다. 마음 자리가 연기로 존재하기 때문에 공입니다. ‘선은 손가락이 아니고 바로 달이다’라고 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법상은 손가락이고 방편입니다. 법상도 없는데 무엇이 있어서 세우겠습니까. 계·정·혜도 세울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법상만 여의면 계·정·혜도 법상이고, 방편의 소리일 뿐입니다.

자성을 몰록 닦아라.
잘못된 것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는 것을 알면 점진적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몰록 다 닦아버리는 것입니다. 착각만 깨면 바로 그 자리가 자기의 성품을 보는 자리입니다. 사실 닦는 다는 것도 맞지 않고, 착각을 깨는 것입니다. 착각 깨는 것을 우리는 닦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세운다고 하면 점점이 있으니, 이런 까닭으로 세우지 아니함이라.
만약 세울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점점이 닦아 간다는 말과 같겠지요.

지성이 예배하고 조계산을 여의지 아니해서 곧 문인이 되어 대사의 좌우를 여의지 아니하였다.
지성 스님이 여기서 깨닫고 나서 신수 스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육조 스님의 제자가 되어서 조계산을 떠나지 않았고 또한 육조 스님의 좌우를 떠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25. 불행(佛行)

어떤 한 스님이 있어서 법달이라고 하니, 항상 법화경을 외워 7년이 되었으나 마음이 미해서 바른 법의 당처를 알지 못했다.
법달 스님은 일곱 살에 출가해서 법화경을 3천 번이나 읽었다고 합니다. 전에 탄허 스님이 강의할 때 보면 무슨 책을 보던 300번을 꼭 읽었다고 하셨는데, 이 법달 스님은 법화경만 3천 번을 읽었고, 그러면서 굉장히 아만이 많았습니다.

와서 물어 가로되, 경에 의심이 있으니 대사는 지혜가 넓고 큼이라 원컨대 의심을 해결해 주소서.

대사가 말하되, 법달아 법은 본래 통달해 있거늘 너의 마음이 통달하지 못함이요. 경에는 의심이 없거늘 너의 마음이 스스로 의심하고 스스로 삿되어서 바른 법을 구함이로다.
바른 법을 구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삿되다고 했습니다. 정법을 구하는 것이 어떻게 삿되다는 말인가 하면, 앞에서 법상을 여읜다고 했는데요, 선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바른 법을 구한다는 자체가 삿된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구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삿되다는 것입니다. 교와 선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는데, 그동안 강의를 들은 분들은 다 알 것입니다. 이것이 선에 대한 정견입니다.

나의 마음이 바른 정(定)이 되는 것이 곧 지경(持經)이다.
여기서 정은 ‘나-너’를 여읜 사람,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그렇게 되는 사람이라야 진짜 경을 가진 것입니다.

내가 일생 이래로 문자를 알지 못하니, 네가 법화경을 가지고 와서 한편을 읽어라. 내가 곧 알 것이다.
육조 스님은 글은 몰라도 암기력이 대단했던 분이라서 중요한 대목은 다 외우고 계셨던 분입니다.

법달이 경을 가져와 대사를 마주하여 한편을 읽되, 육조 스님이 듣기를 다하고 곧 부처님의 뜻을 알았다.
깨달은 분들은 이렇게 하나를 들어도 다 알게 됩니다. 다 들을 것도 없이 한편을 듣고 나서 다 알게 된 것입니다.

육조 스님이 법달을 위해 법화경을 설명할 새 육조 스님이 말하되, 법달아 법화경은 많은 말이 없느니라. 일곱 권이 다 비유 인연이니라. 여래가 널리 삼승을 설한 것은 자못 세상 사람이 근기가 둔하기 때문이니, 경문에 분명히 나머지 승이 없음이요. 오직 일불승이 있느니라.
중생이 욕망에 빠져 벗어날 줄 모르니까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 말했고, 삼승을 설한 것은 방편이지 진리의 자리에는 삼승이 없다는 말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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