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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시로 읽는 불교] 38. 깨달음②-야부 도천의‘금강경송’

기자명 법보신문

‘말’버리고 ‘본성’ 노래한 깨침의 경지

천 척 긴 실을 곧게 드리우니
한 물결이 막 일더니 만 물결이 따라 이누나.
밤은 고요하고 물은 차가와 물고기 물지 않으니
배에 가득 훤히 달빛만 싣고 돌아오도다.
千尺絲綸直下垂
一波動萬波隨
夜靜水寒魚不食
滿船空載月明歸

운흥사본(雲興寺本)의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에 나오는 도천(道川) 야부(冶父) 스님의 ‘금강경송(金剛經頌)’이다. 야부(冶父)스님의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중국 남송(南宋: 1127~1279)대의 사람으로 속성은 적(狄), 이름은 삼(三)이다. 군의 집방직(執方職)에 있다가 재동(齊東)의 도겸(道謙)선사에게서 도천(道川)이라는 법호를 받았고, 정인계성(淨因繼成)에게서 법통을 받아 임제(臨濟)의 6세손이 된다.

이 시에서 마지막 구를 “배에 가득히 허공만 싣고 달 밝은 데 돌아오도다.”라 흔히 번역하는데, ‘空’이 ‘載’라는 동사의 빈어가 될 수 없다. 부사로 보아야 옳다. 직역하면 “가득한 배에 아무 것도 싣지 않고 달 밝은데 돌아오도다.”이다. 가득한 배인데 아무 것도 싣지 않았고 달 빛 속에 돌아온 것이니 그 배엔 달빛만 실릴 뿐이다. “배에 가득 훤히 달빛만 싣고 돌아오도다.”로 해석하는 것이 원래 뜻에 가깝고 시의 이미지도 제대로 살리는 것이리라.

오늘 이 시를 놓고 대가들과 다른 해석을 하련다. 이 선시에서 핵심어는 물고기와 어부이다. 배, 달빛, 낚시 등도 중요한 어휘이나 두 낱말의 의미에 따라 달라지기에 이들은 물고기와 어부의 종속어다.

물고기는 ‘중생’ 어부는 ‘깨달은 이’

이 시에서 ‘어부’의 핵심의미는 ‘상즉상입(相卽相入)과 물아일체(物我一體)’이다. 어느 가을날 낚시를 하는데 입질조차 오지 않았다. 그때 낚시찌에 빨간 고추잠자리가 앉았다. 단풍은 산 그림자를 안은 채 호수까지 내려와 물에 드리우고 수평을 이룬 연록빛 호수에 맵시 있게 색동무늬의 찌가 수직을 이루었는데 빨간 고추잠자리가 사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취하여 한참을 멍 하니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처럼 낚시에 몰두한 어부는 내가 어부인지 물고기인지 그 경계를 넘어선다. 바다와 하늘, 물과 땅, 나와 물고기의 경계를 넘어설 때 낚시는 도(道)의 경지에 이른다. 이 상태가 바로 상즉상입(相卽相入)이니 어부는 화엄 중에서도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요, 모든 차별을 하나로 아우른 원융(圓融)의 경지이다. 사람으로 치면 이 경지에 이른 선사나 부처이다. 강가에서 고요히 낚시를 하고 있는 어부는 자연과 하나가 된 인간이자 대상과 합일을 이룬 주체이다. 물고기를 얼마나 잡느냐가 아니라 이 경지에 이르느냐 이르지 않느냐가 바로 진정한 어부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이라 할 정도로 상즉상입과 물아일체는 어부의 본체이다.

사람이 상즉상입의 경지에 올라 삼라만상을 바라보면 그 순간 그는 부처이다. ‘어부’가 ‘부처’라면, ‘물고기’는 바다에 널려 있으며 포획을 기다리는 것이니 ‘중생(衆生)’의 의미를 갖는다. 물고기가 중생이라면 중생이 부처에 낚임은 부처의 힘에 의지하여 해탈을 이룸이다. 낚시는 자비행(慈悲行)이며, 배는 자비행을 이루는 방편(方便)이다. 바다는 중생이 있는 속계(俗界)이며, 달빛이 있는 바다 밖은 이를 초월한 세상이다.

그럼 물고기가 물지 않음은 무슨 의미인가? 중생은 본래 청정(淸淨)하며 그들 마음속에 이미 부처가 자리 잡고 있다. 중생이 곧 부처요, 중생의 마음은 부처의 마음으로 본래 청정하다. 그런데 청정한 하늘에 티끌이 끼어 그 하늘을 가리듯, 일체의 중생이 무명(無明)으로 인하여 미혹에 휩싸이고 망심(妄心)을 품어 진여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세계를 분별하여 보려 한다.

달빛은 차별없이 만물을 비춰

“일체의 중생이 망심이 있음으로 해서 생각할 때마다 분별하여 다 진여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공(空)이라 말하지만, 만약 망심을 떠나면 실로 공이라 할 것도 없다.”(馬鳴, 『大乘起信論』)

만일 마음에 허망함이 없으면 곧 다른 경계가 없어지고 중생 또한 본래의 청정함으로 돌아
가 깨달음에 이른다. 그러니, 중생은 부처의 구원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어부가 달빛만 싣고 돌아옴은 당연한 일이다. 빈 배는 모든 것이 원래 공(空)함을 나타낸다. 바다와 배, 어부와 물고기, 진(眞)과 속(俗)의 경계,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공(空)하다. 그렇게 깨닫고 보니 달 빛 아래 차별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이 삼라만상이 빛난다. 그러니 빈 배는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올 수밖에 없다.

‘어부’의 의미가 부처가 아니라 ‘신선이나 선비’라면, ‘빵’ 하나가 ‘양식, 먹을거리’를 의미하듯 ‘물고기’는 부분과 전체관계를 바탕으로 ‘자연의 환유’라는 의미를 형성한다. 자연의 한 대상인 물고기를 낚음은 어부가 자연과 합일을 이루는 경지이다. 그러나 물고기가 물지 않는다. 물고기가 물고 물지 않음은 중요하지 않다. 물고기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경지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 빈 배이다. 달빛이 바다를 비추니 바다와 하늘, 배와 물고기가 하나가 된다. 달빛을 가득 실어 물아일체의 경지를 이루었으니 빈 배는 하나로 돌아간다. 조선조의 ‘어부가’는 대개 이 점에 주목하였다.

‘어부’가 ‘선사(禪師)’라면, ‘물고기’는 ‘도(道), 혹은 부처의 마음’이다. 물고기의 실체는 인간의 포획의 대상이란 것이다. 인간이 잡고자 하는 것은 ‘궁극적 진리, 도(道), 진여실체, 욕망, 명예, 권력, 향락, 행복’ 등이다. 물고기는 이런 의미를 갖는다. 이 가운데 선사가 잡고자 하는 것은 궁극적인 깨달음이다. 선사는 도에 이르려 하고, 낚시는 도에 이르는 방편이므로 언어기호를 의미한다.

『장자(莊子)』 「외물(外物)」 편에서 “물고기를 잡은 뒤에는 통발을 버려야 한다. 우리 인간의 말이라는 것은 뜻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그 뜻을 잡으면 말은 버려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서 보듯 물고기와 통발은 도(道)와 언어기호의 비유이다. 선사는 언어기호를 통하여 도에 이르려 한다. 그러나 물고기는 물지 않는다. 도는 언어 저 너머에 있다. 말로 할 수 있다면, 물고기처럼 눈에 보이고 낚시에 낚이는 것이라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사람의 본성은 스스로 반야의 지혜를 타고나므로 스스로 그 지혜를 부리어 늘 관조(觀照)하기에 글자를 빌리지 않아도 된다. 미혹한 자는 말로 하지만 지혜로운 자는 마음으로 행한다.”(惠能, 『六祖壇經』)

물아일체니 어느 고기 낚으랴

천 척 낚싯줄을 드리웠음에도 물고기가 물지 않음은 당연한 것이다. 선사는 배라는 방편을 이용하여 부처님의 마음에 이르려 하지만 언어는 방편일 뿐이다. 야부의 ‘금강경송’이 『금강경』의 “법의 상(相)이라고 말 한 바는 여래께서 말씀하신 즉 법의 상이 아니며 법의 상이라고 이름하는 것뿐이다.”라는 대목을 주석하기 위한 방편으로 쓰인 것임은 이 점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금강경송’을 지은 야부의 입장에서는 이 뜻으로 야부송을 지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빈 배는 그런 행위나 인식이 모두 공(空)함을 의미한다. 그 바다와 빈 배에 달빛이 두루 어느 곳도 가리지 않고 비춘다. 그리 분별심을 떠날 때, 달빛 아래 바다와 하늘, 물고기와 나의 구분이 사라질 때, 낚시를 거두고 달빛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문득 자기 마음속의 물고기를 찾을 때 진정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하는 것을 구체적 행동이 아니라 추상적 행동으로 제한하면, ‘어부’는 ‘자신의 의지대로 세계를 해석하는 자, 곧 철학자’이다. 그가 물고기라는 대상세계를 알고자 하여 낚시를 던진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경지이다. 물고기는 물지 않는다. 대상세계는 알 수가 없다. 대상은 허상인 것이다.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닌 것이다. 이것을 깨닫고 낚시를 거두니 달빛이 빈 배에 가득하다. 달빛이 비추어 배와 달이 서로 상즉상입(相卽相入)한다. 배가 달빛이고 달빛이 곧 배인 경지가 된다. 배와 달빛은 서로가 서로를 헤살놓지 않고 동시에 비추고 동시에 서로에 침투하여 서로를 이룬다. 인식하고 추구하려는 대상은 공이지만 세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것이다. 모든 진리는 하나로 돌아가는 것(萬法歸一), 달빛을 가득 실은 배는 결국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른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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