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흠 교수의 시로 읽는 불교] 39. 깨달음3-김광림의 ‘산’
[이도흠 교수의 시로 읽는 불교] 39. 깨달음3-김광림의 ‘산’
  • 법보신문
  • 승인 2008.01.07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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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의 교직으로
서설 내린 암자 묘사
眞俗不二 경지 표현

 

한여름에 들린
가야산
독경 소리

오늘은
철 늦은 서설이 내려
비로소 벙그는
매화 봉오리.

눈 맞는
해인사
열 두 암자를
오늘은

두루 한 겨울
면벽한 노승의 눈매에
미소가 돌아.

 
<사진설명>산사를 하얗게 덮은 눈은 모든 차별과 구분을 너머 적막의 빈틈마저 남김없이 채운다. 사진은 해인사 홈페이지에 소개돼 있는 눈 덮인 해인사 풍경.


김광림 시인의 ‘산’이다. 고도로 절제된 생략이 주는 함축미와 선적인 이미지가 비단을 짜듯 공간과 시간을 아울러 교직(交織)하는 아름다움이 빼어난 시, 개화(開花)의 은유와 노승의 깨달음이 절묘하게 서로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를 이루면서 여러 숨은 의미를 드러내는 텍스트다.

고도로 절제된 선적 이미지

눈은 겨울의 축복이다. 개띠여서인지 필자는 눈을 좋아한다. 눈이 내리면 공원이든 산이든 인공이 덜 스민 곳을 찾아 강아지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그러다 능선이나 높은 곳에 서서 보면 자연스레 침묵에 젖는다. 소복소복 내려 온갖 경계를 허물어 한 세상을 만들고 미세한 소리마저 모두 빨아들이는 그 적막 속에서 사색은 하늘을 향한다. 일심(一心)과 이문(二門)의 관계에 대해서 오랜 동안 고민하고 또 고민해도 모르다가 퍼뜩 지혜가 떠오른 때도 그리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칼날 같은 바람이 볼을 저미던 아주 추운 겨울날 오후였다. 그날 관악의 코숭이에서 『대승기신론』의 글자 몇 자를 화두로 볼이 곧 찢어질 듯한 고통을 참아내다가 문득 깨달은 그 순간의 환희! 글을 쓰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오늘 시적 화자는 한 겨울 날 가야산에 있다. 가야산에 눈이 내린다. 서설이다. 해인사와 이 골 저 골 열두 암자에 눈이 내린다. 눈은 내려서 흙과 돌의 자취를 지우더니 골짜기와 능선, 절과 산의 구분마저 무너트린다. 눈이 모든 소리를 빨아들여 적막한 그 빈틈(虛)을 다른 소리가 채운다. 순간 귀에 들리는 것은 지난 여름날 스님의 경 읽는 소리. 의상(義湘)의 말대로 구세(九世)가 하나이니, 과거가 현재에 겹친다. 소리꾼이 득음의 경지에 이르면, 마침내 소리가 폭포를 뚫고 들어가 물 아래 사람들에게 들린다 했는가. 소나기 같은 매미소리를 넘어 스님의 독경 소리가 한 낱말 한 낱말 화살이 되어 귀에 꽂힌다. 지음(知音)이라는 말처럼 경을 읽는 자와 듣는 자가 모두 제대로 정진한 까닭이다.

그리 정진하기를 여러 해, 한겨울에 다시 해인사를 찾으니 눈이 온다. 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사이로 철늦은 매화 꽃봉오리가 막 피어나려 벌어진다. 엄동설한에 추위를 이기고 피는 꽃 매화, 하얀 은세계 속에 붉은 빛을 더하여 그 당참이 더욱 아름답다. 꽃이 핀다 하지만 꽃은 눈과 싹, 아니 씨 속에 이미 있었다.

그렇듯 불성(佛性)과 깨달음 또한 본래 우리 안에 있다. 금을 녹여 금부처를 만들듯 진제(眞諦)를 녹여 속제(俗諦)를 만들며, 다시 금부처를 녹여 금덩이로 환원시키듯 속제를 녹여 진제로 만든다. 진제와 속제,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 부처와 중생이 본디 하나다.

저 맑고 푸른 하늘처럼 중생의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다. 하지만 티끌이 끼면 하늘이 흐리게 보이듯, 일심(一心)의 체(體)가 원래 본각(本覺)이지만 무명(無明)에 따라 움직여 생멸을 일으키기 때문에 여래의 본성이 숨어 있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이를 여래장(如來藏)이라 한다. 이 여래장은 각(覺)과 불각(不覺)을 모두 지니고 있는데, 후자에서 망심과 무명에 의해 일어나는 상인 업상(業相), 업상에 따른 주관적인 상인 전상(轉相), 업상에 따른 객관적인 상인 현상(現相)을 없애버리면 바로 그곳이 바로 나지도 사라지지도 않으며 자성이 청정한 깨달음의 세계이다. 땅 속에 묻힌 금덩이가 본각이라면, 흙을 파내고 꺼낸 금덩이는 시각이다. 양자는 모두 동일한 금덩이로 같다. 그러니, 원효의 지적대로 “지혜란 곧 본(本)과 시(始)의 두 가지 깨달음이요, 불각이 바로 본각과 같은 것이다.” 시각과 본각이 다르지 않아 이런 도리로 말미암아 구경각이라 이름하니 이는 바로 깨달음의 본체를 밝힌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씨가 꽃을 피우는 것은 아니다. 수분과 양분, 온도와 습도와 햇빛과 바람과 기압이 맞아야 한다. 구름은 비를 내려 적절한 물을 주고, 땅은 양분과 좋은 박테리아를 함뿍 뿜어선 내주며, 햇빛은 따스하게 감싸주고 바람은 불어 배출한 가스를 흩어주고 짐승은 꽃이 필 때까지 걸음을 조심해야 한다. 한 송이의 꽃의 개화에 온 우주가 관여한다는 말이 그리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삼라만상이 꽃을 피울 조건을 만들어 주어도 그 식물이 꽃을 피우려는 마음을 일심으로 갖지 않으면 꽃은 피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내가 숨을 쉬는 순간 바깥이 안이 된다. 숨을 쉬면 우주의 기가 내 안으로 들어와 온 몸에서 손가락 끝에까지 기를 퍼트린다. 온 우주가 나를 거듭나게 하는 조건을 만들고 나도 깨닫고자 부지런히 관행(觀行)과 지행(止行)을 쌍으로 부려 정진하면 어느 순간 깨달음의 꽃이 핀다.

구경각은 깨달음의 본체

의혹과 사집(邪執)이 있으면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의혹이란 법을 의심하는 것과 교문(敎門)을 의심하는 것이요, 사집에는 인집(人執)과 법집(法執)이 있다. 법을 의심하면 발심(發心)에 장애가 되고, 교문을 의심하면 수행(修行)에 장애가 된다.

법이 하나인가 여럿인가 의심하기 쉽다. 만일 하나라면 다른 법이 없는 것이니 모든 중생 또한 없으므로 보살이 서원을 널리 펼 대상 또한 없다. 법이 하나가 아니라면 일체가 아니므로 너와 내가 다르니 동체대비(同體大悲)를 일으킬 길이 없다.

교문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래가 세운 교문이 많은데 어느 문부터 들어가야 할 것인가? 여럿을 함께 하려고 한다면 한 문에도 제대로 들어설 수 없고, 한 두 문에 의거하려고 한다면 어느 것을 버리고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 이러한 의심이 생기면 수행에 제대로 들어설 수가 없다. 여러 문이 많지만 처음 수행에 들어갈 때는 두 문을 벗어나지 않으니 깨달음의 단계에서는 지행을 닦고 깨닫지 못한 단계에서는 관행을 일으키면 된다.

인집(人執)은 총상을 주재하는 실아(實我)가 있다고 헤아리는 것이다. 법집은 일체 법이 각기 체성(體性)이 있다고 헤아려 객관인 현상을 실재인 것처럼 알고 고집하는 것이다. 객관적 실재를 믿는 견해는 어리석은 근기에 의한 것이다.

해인사에 눈이 내려 사위가 적막한 적멸의 순간, 노스님께서 수십 년을 면벽 수도하며 모든 의혹과 사집을 버리고 정진하시더니 해탈을 이루었다. 오랜 정진 끝에 마침내 진여 실체를 깨달은 노승은 가만히 웃음을 짓는다. 드디어 온 우주가 열리고 우주의 비밀이 눈으로, 코로, 입으로, 귀로, 살로 들어와 뇌에 자리했다가는 몸이 되는 그 찰나, 온 몸의 100조개 세포들 또한 희열에 떤다. 그 떨림은 활화산처럼 폭발하더니 온 세포들에 파문을 그린다. 그 파문은 안으로, 안으로 메아리치며 온 몸의 구멍을 통해 모든 망상과 번뇌를 밖으로 밀어낸다. 그 중 몇 파문은 얼굴로 자리해선 빙긋 미소를 만든다. 씨 속안에 있던 꽃스러움이 꽃으로 터지는 그것과 똑같이 노승 안에 자리한 불성이 온 우주와 교감 속에서 부처를 이룬다.

그럼 그 다음엔 무엇이 올까? 이 시를 한 연 더 보탠다면, 무엇을 노래하였을까. 매화 꽃이 피었던 자리엔 매화씨가 든든한 씨방을 이루고 다시 겨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깨달아 부처가 되 노승은 마을로 내려와 아주 평범하나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어린이들과 놀고 있었을 게다.

연꽃은 저 높고 아름다운 산록에서 피어나지 않는다. 왜 저 아름다운 연꽃이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향기로운 바람이 스치고 지나는 높은 언덕에 피지 않고 냄새 나는 수렁의 진흙 속에서 피어날까? 왜 가장 더러운 진흙 속에서 줄기를 뻗어 청정한 하늘 위로 가장 아름다운 꽃 송아리를 틔울까? 저 아름다운 연꽃이 높은 언덕에 피지 않는 것과 같이 반야의 바다를 완전히 갖추었어도 열반의 성에 머무르지 않으며,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 무량한 겁 동안 온갖 번뇌를 버리지 않고 세간을 구제한 뒤에 열반을 얻는다.

우주와의 교감서 부처 이뤄

티벳의 승려는 수천 리 길을 맨발로 5체투지를 하며 걷고 영하 삼사십도의 찬바람이 살을 에는 수천 미터 설산에서 맨몸으로 잠을 잔다. 이렇듯 범인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고행을 하며 중생을 구원하다 그는 결국 깨달음에 이르고 부처가 된다. 그러나 이로 깨달음이, 부처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이 있는 한 그는 깨달은 것도, 부처도 아니다. 그러기에 그는 부처가 되었어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다시 인간의 몸으로 환생한다.

이렇듯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다. 우리 미천한 인간들이 속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끊임없이 수행 정진하여 완성된 인격(眞)에 이를 수 있고, 또 이에 이른 사람은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들을 이끌어야 비로소 깨달음이 완성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속불이(眞俗不二)이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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