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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 쳇바퀴 돌다

기자명 법보신문

거창한 설계보다 현재 충실이 값진 삶

땔감 나르고 물 긷는 일상이 선의 실천

지난번에는 1년이라는 시간의 경계에 무슨 구분이 있겠느냐는 회의를 펴 본 적이 있지만, 어찌되었든 새해라는 시간 단위가 지나고 보면, 지난 한 해의 되돌아봄이나 돌아온 한 해에 대한 새로운 마음가짐을 설계해 보는 것이 사람살이의 일상일 듯싶다. 그럴 경우 대개 지난 해에 이루지 못한 일에 대한 반성과 그에 대한 재설계를 시도하는 것이 대부분이 아닐까.

지난해의 같은 시간에도 크든 작든 어떤 계획을 세워 추진하려 했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일에 대한 되살핌이 있어, 새 해의 새 설계로 잡았었음이 분명하지만 이루어진 결과는 또 그 전 해의 섣달그믐에 결산 된 것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새해라는 큰 시간 단위를 앞에 놓고서 아무 설계도 없이 다가오는 시간을 맞이하기는 너무도 허전하게 느끼는 것이 역시 사람살이의 정상적 일상사가 아닐까. 그래서 옛날부터 ‘한 해의 계획은 설날에 있고 네 계절의 계획은 봄에 있고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있다.’ 했던 것이다.

나에게도 지난해의 계획이 나름대로 있었지만 이루어진 것은 별로 없는 듯하다. 해를 넘기지 않겠다면서 원고청탁을 수락했지만 마무리하지 못하고 미룬 것이 있는가 하면, 늙은이의 건강은 잦은 움직임이라도 거르지 않아야 한다 하면서 아침의 산보를 거르지 않으리라 하지만 이래저래 핑계로 거르는 경우가 많으니 실천 없는 계획은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도 아침 공기를 마시며 호수 가를 거닐어야 할 시간인데, 미루고 미루다가 마감 기한에 쫓겨 할 수 없이 책상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그래서 먹은 마음 사흘도 못 간다 하여 ‘작심삼일(作心三日)’이란 말이 있다. 정초에 세운 한 해의 계획이 아니라, 하루의 시간 단위로 계산되는 며칠의 계획도 실현이 어려워 사흘을 못 버티는 것이 우리네 삶의 연속이다. 왜 그럴까. 보통사람들의 삶이란 것이 그저 하루하루의 연속이지 무슨 특별한 변화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네의 삶을 ‘개미 쳇바퀴 돌다’라 한 것이리라. 그러니 미래라는 시간을 내다보며 거창한 설계를 하기보다는 당면한 현재의 시간에 충실하게 하는 것이 보다 더 값진 삶이 아닐까. 여기에서 땔감을 나르고 물을 긷는 일상의 일이 선(禪)의 실천이 아닐 수 없다는 가르침이 새삼 실감 있게 와 닿는다.

그러면서 반면 미래의 설계를 다시 할 것이 아니라, 지난해의 못다 한 일이 무엇인가 되돌아봄이 보다 더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창문의 열린 틈을 통하여 방 안으로 들어온 파리 한 마리가 들어와 보고는 네 벽으로 갇힌 좁은 공간임을 알고 다시 밖으로 나가려고 출구를 찾는데 햇빛으로 환한 창호지를 수 없이 두들겨 보지만 나갈 수가 없다. 방금 전에 들어온 창문의 열린 틈으로 나가면 되련만, 방금 전에 들어온 길을 모르고 환한 창호지만을 뚫으려 하고 있다.

우리 범인의 삶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미래의 거울이 바로 지나 온 과거의 뒷면에 있는데 그를 모르고 거창한 미래에다 기대하고 있다. 올해는 새 계획을 세울 것이 아니라, 지난해에 이행하지 못한 일을 찾아서 마무리하는 것으로 설계를 삼아보자. 다시 더 창을 뚫는 파리의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말기 위해서라도.

위의 ‘창 뚫는 파리[鑽紙蠅]’는 송나라 때의 백운수단(白雲守端1025-1071)선사의 게송으로 전하는 비유이다. 다음에 이 게송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맺는다.
“빛을 사랑하여 창호지만 뚫으려 하나 / 뚫을 수가 없으니 얼마나 어려우냐 / 홀연히 들어오던 길을 마주 하니 / 비로소 평생에 어두운 시선에 속았음을 아네.(爲愛尋光紙上鑽 不能透處幾多難 忽然撞着來時路 始覺平生被眼瞞)”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sosuk0508@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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