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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 장편소설] 65.

기자명 법보신문

 

다음 생에서도 수행자로
태어나 대오(大悟)를 이룸이 옳지 않겠느냐.
그리하여 석가모니부처님처럼
이 세상의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대장부의
길이 아니겠느냐.

 

제 14장 인연
일타는 입적하기 몇 년 전, 은해사를 청정한 율도량으로 정화하라는 총무원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주지 발령을 받은 이후부터 제자들에게 자주 ‘세상과의 인연(世緣)’이 다해가고 있음을 담담하게 얘기하곤 했다. 종합검진을 해온 국내의 의사가 일타에게 이번 기회에 간질환을 근치(根治)하자고 설득해도 일타는 자신의 죽음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연할 뿐이었다. 일타의 게송을 듣게 된 의사는 과연 고승이구나 하고 감탄했다.

病不能殺人
藥不能活人
병이 사람을 능히 죽이는 것도 아니요
약이 능히 사람을 살리는 것도 아니다.

일타는 건강을 걱정하며 간병하는 상좌와 신도들에게도 말했다.
“명(命)은 태어날 때 자기가 가지고 나오는 법이지. 때문에 명을 두고 죽는 사람은 없는 게야. 평생 골골거려도 90살까지 사는 사람이 있고, 아주 건강해도 일찍 죽는 사람도 있어. 내 나이 60을 넘겼으니 지금 죽어도 요절했다는 소리는 안 들을 것이야. 병든 몸이지만 조심하고 잘 수행하여 7~8년을 더 살고 70에 죽으면 되는 거지. 꼭 80이나 90까지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 나는 지금의 병을 완치할 생각도 없고 걱정하지도 않지. 그냥 사는 대로 살면 되는 거지.”

또한 참선 수행자로서 병환 중에도 결코 화두를 놓은 적이 없었다.
“일념무생법인(一念無生法忍 : 불생불멸의 진여에 안주한 경지)을 얻었다면 생사를 걱정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나는 무생법인을 얻지 못했네. 어려서 동진출가하여 70이 다 되도록 중노릇을 하였는데, 왜 나는 석가모니부처님처럼 되지 못했을까. 한창 젊었을 때는 꼭 석가모니부처님처럼 되겠다고 용맹정진하였는데, 그 뒤 시적부적 이렁저렁 하다 보니 세월이 이렇게 가버렸어. 그러니 남은 시간이나마 일념무생을 위해 노력하다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뿐이지.”

일타는 수행자로서 진솔했다. 태백산 도솔암에서 체험한 오도와 승려가 된 햇수를 이력 삼아 결코 대종사(大宗師)로 행세하지 않았다. 도솔암에서 이룬 견성의 경지를 징검다리 삼아 불생불멸의 진여를 향해 나아갈 뿐이었다. 어느 큰절에서 방장으로 추대하겠다고 제의했을 때 거절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일타는 큰절의 방장보다는 선방 좌복 위에서 화두를 잡은 운수납자로 남고 싶었던 것이다.

일타가 신도나 상좌들에게 자신의 ‘다음 생’을 얘기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날도 일타는 자신의 모든 저술을 돕고 자문해 온 유발상좌 혜림(慧林)에게 말했다.
“다음 생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번성한 미국에서 태어나 거룩한 상호를 갖추고, 학업을 마치면 한국으로 와서 출가하리라. 그래서 청년의 나이에 부처님과 같은 대도(大道)를 이루어 일체 중생을 제도하고, 이 땅의 한국불교를 세계에 펼칠 것이다.”

지족암에서 15년 동안 자신을 시봉해 온 상좌 혜관(慧觀)에게도 말했다.
“나는 이제부터 미국으로 자주 갈란다. 다음 생에는 미국 사람으로 태어나서 학문을 익히다가 스무 살이 되면 해인사로 올 것이다. 혜관아, 너는 그때까지 지족암에서 정진하다가, 큰절에 스무 살짜리 코쟁이가 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얼른 내려와 자세히 보고, 아는 체하면 귀를 붙잡고 올라와 머리를 깎아라.”

혜관은 석가모니부처님이 도솔천에서 호명보살로 있을 때, 인간세상으로 내려가려고 결심하고 자신이 태어날 나라(카필라성)와 부모(정반왕과 마야부인), 부모의 계급(무사계급) 등을 점지했던 부처님 『팔상록(八相錄)』의 도솔래의상(挑率來儀相)을 떠올렸다.
“스님께서 입적하신 뒤 20년 만에 돌아오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원력을 잘 세우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지.”
“20년 후에는 제가 스님의 머리를 깎아주는 은사가 되는 것입니까.”
“그것이 너와 나의 인연이다. 금생에는 네가 나를 시봉했으니 다음 생에서는 내가 너를 시봉해야 공평하지 않겠느냐. 중생은 업 따라 흘러 다니지만 우리 수행자는 원력에 따라 나고 태어나는 것이야.”

혜관은 황공해 어쩔 줄 몰랐다. 스승이 다음 생에서는 자신을 시봉하겠다고 하니 눈물이 났다. 잠시 후 혜관은 의문이 또 들어 물었다.
“스님께서는 왜 다음 생에서도 수행자가 되시려고 합니까.”
“화두를 잡고 깨침이 대자유 대해탈을 얻는 길임을 태백산 도솔암에서 경험했다. 그러니 다음 생에서도 수행자로 태어나 대오(大悟)를 이룸이 옳지 않겠느냐. 그리하여 석가모니부처님처럼 이 세상의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대장부의 길이 아니겠느냐.”

일타의 나이 68세가 되자, 또 하나의 이적이 나타났다. 소식을 들은 상좌들 모두가 놀랐다. 신도들은 더욱 소스라쳤다. 사리란 보통 고승의 법구(法軀)를 다비한 후에 나오는 오색영롱한 구슬을 말하는데, 일타의 경우는 연비한 오른손에서 사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한 달에 1과(顆)에서 3과씩 출현했다. 이른바 생사리(生舍利)였다.

절집뿐만 아니라 저잣거리에서도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해방 이후에는 고승의 몸에서 난다는 생사리의 출현이 전무했던 것이다. 실제로 해방 전 용성은 자신의 치아 사이에서 나온 생사리를 문밖으로 던져버렸는데, 한밤중에 방광하여 훗날 제자들이 용성의 부도에 봉안했으며, 고은사 수월은 일자무식이었지만 육신이 청정하여 『법화경』에 손을 대면 경의 뜻이 그대로 마음으로 전해졌다고 하며 그때 스님의 눈에서는 반짝거리는 생사리가 나왔다고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신도들이 지족암으로 일타를 찾아가 생사리의 이적을 물었다.

“큰스님, 생사리의 출현을 두고 사람들이 긴가민가하고 있습니다. 사실입니까.”
“앞으로 내가 죽을 때까지 몇 과가 더 나올지 몰라. 한 달에 한두 개, 많을 때는 세 과가 나오거든.”
“큰스님께서 말씀하시니 비로소 의혹이 해소됩니다.”
“200년 전 우리 해인사에 활해스님이라는 큰스님이 계셨어. 경상도에 지독한 가뭄이 들어 경상감사가 활해스님을 찾아와 기우제를 지내달라고 사정하자, 스님이 용왕상(龍王像)의 머리를 주장자로 툭툭 건드리며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말하여 큰비를 내리게 한 일이 있지. 도력이 아주 큰 스님이셨는데 그 스님에게서도 생사리가 나왔다는 구전이 있어.”

그러나 일타는 생사리의 존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신도들이 이적이라 하여 화젯거리로 만들려고 하였으나 일타는 소소한 일로 치부했다. 자신의 생사리를 아무 데나 방치했고, 심어지는 갖고 싶어 하는 신도에게 생사리를 건네주기도 했다. 부산의 어느 여자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유발상좌 혜천에게도 생사리를 주겠다고 하여 지족암을 찾아간 그를 놀라게 했다.
“혜천, 너도 내 생사리가 필요하면 주겠다.”

1993년 가을.
해인사 초입의 홍류동 계곡에도 가을이 찾아와 물들고 있었다. 붉고 노란 낙엽들이 홍류동 계곡으로 우수수 떨어져 계곡물마저 단풍이 들어가고 있었다. 가야산의 나무들이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나목으로 되돌아가는 가을이었다.

일타도 가야산의 나목처럼 생의 군더더기를 정리했다. 수행자로서 거추장스러운 직책과 소임을 미련 없이 벗었다. 은해사 주지 소임을 통일 운동하는 상좌 법타에게 넘기었고, 자격을 갖춘 예비 승려들에게 구족계를 주는 조계종 단일계단 전계대화상의 직위도 사임했다.
그런 다음, 자신이 태어날 나라로 점지한 미국으로 떠났다. 상좌 혜관에게 지족암을 맡기고 불편한 몸이었지만 보스턴 시로 찾아갔다. 보스턴 시에 자리 잡은 문수사에서 상좌 도범이 일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타는 미국인들 얼굴 생김새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장신에다가 석가모니부처님처럼 또렷한 이목구비가 마음에 들었다. 수행이 뒷받침만 된다면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는 외모가 분명했다.

“스님, 이곳은 불교의 세가 아주 약합니다. 온갖 물자가 풍부하여 살기는 좋을지 모르나 불교신도가 적어 아직은 수행하기가 불편한 곳입니다.”
그래도 일타의 원력은 확고했다.
“미국에서 태어나더라도 수행은 다시 한국에 와서 하면 되는 것이고, 나는 부처를 이루어 미국으로 돌아가 달마가 중국으로 들어와 불국토를 만들었던 것처럼 나는 미국의 중생들을 제도할 것이다.”

그러니 일타의 미국행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다. 더구나 미국 동부에 있는 보스턴 시 주변에는 미국의 수재들이 모여 학문을 연마하는 하바드대학교나 예일대학교 등등 소위 일류대학교가 산재해 있었다. 서부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동부 사람들은 어딘지 모르게 지성적이고 귀족적인 풍모를 띄고 있었다. 명상센터도 많았고 젊은 대학생들이 그곳에 모여 명상하며 마음의 평화를 찾고 있었다. 한국불교보다 티베트불교와 대만불교가 한 발 먼저 들어와 포교하고 있었지만 일타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시절인연이 되면 한국의 선불교가 그들에게 삶의 대안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스턴 시내를 안내하던 문수사 신도가 말했다.

“큰스님께서 미국에서 미국사람으로 태어나실 거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입적할 때 평소의 원력을 놓치지 않고 깨어 있기만 하면 가능해요. 일념이 만년이지요. 일념으로 깨어 있기만 하면 원하는 대로 환생할 수 있어요.”
문수사 신도가 의아해 하자 일타가 말했다.
“향가 ‘보현십원가’를 지은 균여대사께서도 스님이 원력을 세운 대로 다른 나라에서 환생하셨지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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