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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43.죽음-월명사의 ‘제망매가’

기자명 법보신문

누이 죽음 기리며 정토서 재회 다짐 생사불이로 승화

죽고 사는 길은
예 있으매 머뭇거리고
나는 갑니다
말도 못 이르고 가나닛고

어느 가을날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온져

아, 아! 미타찰에서 만나리니
내 도 닦아 기다리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죽음이란 무엇이고, 또 삶이란 무엇인가. 부처를 따르는 이들에게 죽음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필자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월명사(月明師)의 ‘제망매가’보다 쉬운 언어로 그리도 깊이 있게 죽음을 노래한 시는 없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742∼765) 때다. 월명사는 누이가 죽자 49재를 치르며 이 노래를 부른다. 첫 7일에서 일곱째 7일 동안에 죽은 자의 영혼이 이승과 저승의 중간 영역인 중유(中有)에서 극락으로 갈지 지옥으로 갈지 정하지 못하고 떠돌며 심판을 기다린다. 그래서 남은 이들은 경을 읽고 공양을 하면서 죽은 이의 선업(善業)을 고하여 명복을 빌며 좋은 곳에 태어나도록 기원한다. 이 의식이 바로 49재다.

49재를 올리는 시점이니 누이의 영혼은 중유를 떠돌고 있다. 이 중유에서 떠도는 것을 두고, 영혼이 혼동하는 정도가 크므로 불교에서는 다시 삶과 죽음을 반복한다고 표현한다. ‘죽고 사는 길’은 임종 순간에 살고 죽는 길이 아니라 누이가 중유에서 태어나고 죽는 길이며 ‘예’는 월명사가 49재를 올리는 시공간을 말한다.

서방 정토행은 완전한 이별 의미

<사진설명> 언제 닥칠지 모른다는 죽음의 불명확성, 그리고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죽음의 보편성은 삶의 의미를 더욱 견고히 해주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사진은 선암 스님 사진집 『출가』 중에서.

‘머뭇거리고’는 49재의 관습대로 하면 누이가 중유에서 떠돌며 아직 연처(緣處)를 구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자가 할 일은 그의 복을 빌고 선을 고하여 연처로 가도록 하는 것이다. 이승과 저승의 중간에서 머뭇거림은 아직 이승에 대한 미련이 많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 누이가 그러는 것이 아니라 월명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누이의 사별을 안타까워하는 월명의 마음이 담겨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갑자기 바람이 불어 지전을 서쪽으로 날렸다고 한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당나라에서 장례를 지낼 때 종이돈을 날리는 풍습이 있었다(『구당서(舊唐書)』, 「열전(列傳)」 제80 ‘왕여전(王璵傳)’). 경덕왕이 전례 없이 급속하게 중국화를 단행하면서 많은 중국의 의례가 들어왔다. 신라인에게 서쪽은 서방정토를 뜻한다. 누이의 혼을 담은 종이돈이 서방정토가 있는 서쪽으로 날아갔다. 이것은 누이가 중유에서의 방황을 멈추고 서방정토로 왕생했음을 의미한다.

한 신앙인으로서 누이가 서방정토로 왕생한다는 일은 분명 사바세계의 고통을 끝내고 열반했음을 뜻한다. 그러나 한 평범한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누이의 왕생은 이승과 완전히 결별함을 의미한다. 아무리 신앙심이 깊은 월명사라 하더라도 저승에서의 극락왕생이 이승에서의 만남만 못하였으리. 그렇다고 월명사가 누이를 다시 살아나게 할 만한 힘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이별은 이미 둘 사이에 내려진 당위이다. “나는 갑니다 말도/못 이르고 가나닛고”에는 예상도,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한 순간에 갑자기 닥친 누이의 죽음을 맞는 당혹감과 이제 어찌할 수 없는 막막함, 사별에서 오는 한의 슬픔이 담겨 있다.

완전한 결별을 맞은 고통으로부터 월명사는 이에 내재한 죽음의 의미를 깨닫는다. 월명사는 누이의 죽음이라는 개별적 현상을 통하여 인간의 삶과 죽음에 내재한 보편원리를 깨닫는다. 죽음이라는 단절이 있기에 인간은 유한성을 절감한다. 죽음은 또 언제 올 줄 모르는 것이기에 인간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시한부를 선고 받은 환자가 처음엔 당황하고 이를 부정하다가 죽음을 받아들이면, 1분 1초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의미로 꼭꼭 채우는 삶을 사는 것에서 보듯, 인간은 이 불안과 유한성의 깨달음 속에서 삶의 의미와 자기 존재의 의의를 발견하고 ‘세계 속의 존재’로서 실존하려 한다.

결별의 고통서 죽음 의미 간파

이런 깨달음은 화엄이나 실존주의가 다 같이 인식했었던 인간과 삶의 본질에 대한 자각이다.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닫고 가없는 불사(不死)의 도(道)를 추구하는 것이 화엄의 생사관이다.
월명사 또한 누이의 죽음을 통해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세계의 모습을 본다. 자기 앞에 있는 사물은 모두, 어머니 없이 자식이 존재하지 못하듯 다른 사물과 연기하지 않고 홀로 존재하는 것도(無自性), 어제 본 꽃과 오늘 본 꽃이 같지 않듯 항상 같을 수만(無常)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공한 것이다(一切皆空). 그 속에서의 자기 존재도 자성(自性)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며, 때문에 자신의 존재 또한 공(空)한 것이다.

월명사는 자신이 깨달은 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내지 않는다. 월명사는 비유를 이용하여 자신이 누이의 죽음으로 깨달은 것을 전하려 한다. 월명사는 나뭇잎의 은유로 숨은 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나뭇잎은 한 가지에 나고 가을에 떨어지는 짓(用)을 한다. 이것과 유사성의 은유관계를 이루는 것은 한 가지인 부모에게서 나고 기약 없이 사라지는 가족이다.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一卽多 多卽一)라는 화엄의 명제처럼 세계는 한 조각 나뭇잎 속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삶의 모습과 나뭇잎을 은유화할 수 있는 유사성의 원리는 둘 다 탄생하고 한 가지에서 생을 영위하지만 곧 소멸한다는 본체를 지닌 점이다. 즉, 색이 있으나 자성이 없으니, 존재하다고 본 모든 사물들이 결국 공한 것이다.

가지는 잎을 낳게 하는 것이니 잎이 형제라면 가지는 자연히 부모가 되며 이 가지가 모인 나무는 사회가 된다. 가을엔 모든 잎들이 떨어져 사위어버리니, 이는 임종의 시간이며 바람은 이를 실제로 실행시키는 시련이나 병고(病苦) 등이다. 이들 은유화한 사물은 다시 ‘처럼’이라는 조사에 의해 직유로 이어진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이 갖고 있는 속성은 한 가지에 나고도 가는 곳을 모른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대로 인간의 삶과 유사성을 갖기에 직유로 이어질 수 있었다. 직유를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세계의 실체는 한 몸에서 나왔으면서도 운명을 달리한다는 점이다. 이 진술 속에는 한 형제임에도 각기 다른 시간에 죽음을 맞이하여야 하는 운명에 대한 야속함과 자신보다 어리면서 먼저 임종한 누이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함, 가는 곳을 전혀 모르는 죽음에 대한 인간의 무지에서 비롯된 두려움과 불안, 나뭇잎처럼 푸르던 잎이 어느 날 갑자기 지고 마는 인간존재의 무상감 등이 내포되어 있다. 세상 만물이 자기 스스로의 본성이 없고 무상하다고 인식되는 순간, 인간은 괴로울 수밖에 없다. 무상이 곧 고(苦)이고 이를 통해 비로소 자신을 볼 수 있음은 이 때문이다.

수행 통해 대립하는 세계 화해

월명사는 이런 고통을 벗어나 해탈할 수 있는 세계를 마련한다. 그것은 미타찰이다. 미타찰이란 아미타불이 있는 계(界), 곧 서방정토이다. 중유에 머물렀던 누이는 재를 올림에 따라 서방정토로 왕생하는 것이고, 승려인 월명사 자신 또한 도를 닦으며 정진하면 서방정토로 왕생할 수 있다. 그러니 월명사는 누이와의 이별을 미타찰에서의 만남으로 극복하고 현실에서 빚어지는 사별의 아픔을 만남에 대한 기대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죽음과 무상에서 오는 슬픔과 고통이 오히려 존재와 삶의 충만함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깨달음은 ‘아, 아!’라는 탄성으로 표출되었고, 미타찰에서 만날 것이라는 차분한 각성은 ‘도 닦아 기다리이다’란 실천을 낳는 것이다.

이러니 마지막 구는 자연스레 모든 대립과 갈등을 조화시킨다. 이는 미타찰로의 왕생을 통해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 이별과 만남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고 원융을 이룬 열반적정의 세계이다. 곧 이 노래는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의 대립을 미타찰에서의 왕생에 의한 만남의 기대로 극복하여 세계와의 대립을 화해하고 사별에서 오는 고통을 승화시키고 있다.

이를 불일불이(不一不二)의 논법으로 읽으면, 다른 뜻이 숨겨져 있다. 만남과 이별, 삶과 죽음 등 모든 대립은 투쟁과 모순 관계가 아니라 매개항을 다리로 하여 서로 화쟁(和諍)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만남은 이별이다. 님이 나에게 오는 순간 그 님은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절대의 님과 어느 정도 괴리가 있으니, 만남은 헤어짐이다. 헤어지는 순간 님을 절대화하여 절절하게 그리워하니 이별은 만남이다. 만남이 있기에 이별이 존재한다. 그러나 언제인가 이별할 것을 알기에 사람들은 마지막처럼 상대방을 아껴주며 사랑을 불태운다. 처절하게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이별은 없으며, 이별을 전제하지 않는 사랑은 모든 것을 던지지 않는다.

이승이 있어 저승이 있고 저승이 있어서 이승이 있다. 삶이 있어 삶의 끝인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사람들은 유한성을 인식하고 하루, 하루를 의미로 채우려 한다. 죽음이 없다면 이승은 아수라장으로 변하였을 것이며, 삶이 없다면 저승은 아무 의미도 빛도 없이 싸늘한 어둠세계였을 것이다. 삶은 신진대사를 하여 죽음으로 가는 길이고, 죽음에 가까이 갈수록 삶은 의미로 번득인다. 낙엽이 떨어졌다고 하여 그 나무가 죽었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인간의 육체가 소진하였다고 사멸하였다고 할 수 없는 것이며 이별이라고는 더욱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낙엽이 떨어진 자리에 봄이 오면 싹이 돋고 꽃이 피듯 삼라만상은 순환한다. 모습만 달리 할 뿐, 없다고 하는 순간 존재한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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