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처-식육 질타…청정승가 전통 회복 앞장”
<사진설명> 대은 스님의 계맥을 전수 받은 용성 스님은 일제시대 한국불교 승단의 막행막식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계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용성스님, 대은 율사 계맥 전수
그러나 조선시대 이후 근대에 이르러 계율은 ‘무애행’, ‘구속’, ‘고정관념’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한국불교에서 지계 의식은 급격히 무너졌다. 특히 일제시대 왜색불교의 영향으로 출가수행자의 파계불감증이 만연되면서 사실상 한국불교의 계율 전통은 그 명맥을 잇지 못하고 단절돼 갔다. 그럼에도 일제시대 용성 스님은 한국불교의 계율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스님들의 결혼을 반대하며 출가자의 지계를 강조했을 뿐 아니라 ‘용성조사 세간 5계’를 만들어 재가자들에게도 지계정신을 곧추 세웠다. 이런 까닭에 용성 스님은 근대한국불교 계율의 중흥자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그 동안 우리 학계에서 용성 스님에 대한 연구는 선(禪) 사상에만 집중됐을 뿐 계율 사상에 대한 조명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용성 스님의 계율 사상을 집중 조명한 논문이 발표돼 관심을 받고 있다.
동국대 교수 보광 스님은 최근 발간된 『 대각사상』10권 (2007.12)에서 「백용성 스님과 한국불교의 계율문제」라는 논문을 통해 일제시대 사라져 가던 한국불교 계맥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했던 용성 스님의 활약상과 계맥 전수 과정, 승단의 지계의식 고취를 위한 활동 등에 대해 집중 조명했다.
특히 보광 스님은 논문에서 “용성 스님은 일제시대 왜색불교의 영향으로 한국불교계가 계율이 문란하고 많은 승려들이 대처와 파계 생활을 했음에도 끝까지 청정한 지계생활을 계속해, 비구승의 자존심을 지킨 분”이라고 강조했다.
보광 스님의 논문에 따르면 용성 스님은 1884년 21세가 되던 해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조선후기 대은 율사의 계맥의 전통을 잇고 있었던 선곡 율사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 당시 한국불교의 계맥이 사실상 단절돼 가고 있던 시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용성 스님이 대은 율사의 계맥을 이었다는 것은 한국불교 전통 율맥의 복원을 의미했다. 때문에 현대 한국불교에서 전승되고 있는 계맥은 용성 스님으로부터 이어졌다는 것이 보광 스님의 설명이다.
이후 용성 스님은 자신이 이은 계맥을 올곧이 전수하기 위해 환경, 동산, 고암, 고봉 스님 등 수많은 후학들에게 계맥을 전수하는가 하면 스스로 전계화상으로 나서 한국불교 계맥의 중흥을 위해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용성 스님은 일제시대 추락한 출가수행자들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한 활동도 전개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총독부에 “승려들의 파계생활을 금지시킬 것”을 요구한 건백서(建白書)사건이었다.
1926년 용성 스님은 2차례에 걸쳐 “최근 한국불교의 승려들이 부인을 거느리고, 고기와 술을 즐기면서도 출가자로서 부끄러움을 모르고 있다”며 “총독부 당국이 나서 이를 엄격히 금지시켜야 한다”고 조선총독부에 진정을 제출하면서 당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는 비록 조선총독부에 진정한 것이지만 왜색불교로 전락하고 있는 것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움과 동시에 지계를 통해 한국불교계 스스로 청정 승가의 전통을 회복해야 함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재가자 위해 ‘범망경’ 번역
뿐만 아니라 용성 스님은 『범망경』을 한글로 번역해 재가불자들이 계율의 중요성을 인식하도록 이끌었다.
보광 스님은 “용성 스님은 스스로 계율을 목숨처럼 여기면서 한국불교 계맥의 중흥을 위해 헌신했던 분”이라며 “이후 스님의 계율 사상은 1960년대 한국불교계가 정화운동을 펼칠 수 있는 사상적 토대가 됐다”고 강조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