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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근현대 불교사]

기자명 법보신문

42. 합리적 비구 승단 수립 위해 탄생된 고불총림

<사진설명> 고불총림이 결성되었던 전남 장성군 북하면 백양사의 전경.
대한불교 조계종의 연원은 1941년에 성립된 조선불교 조계종에서 찾을 수 있지만 실질적인 출발은 해방 이후 1954년 이승만의 담화로 시작된 이른바 정화불사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일제시대 불교계는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대처승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해방 직후에는 전체 승려 가운데 90%가 넘는 승려들이 대처승이었다. 잘 알려진대로 정화불사는 대처 승단으로부터 비구 승단이 정통성을 확보함으로써 외형적으로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내면을 살펴보면 폭력과 법정 소송으로 얼룩져있으며 자비를 중시하는 불교다운 면모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물리적인 해결이 아닌 불법에 의지한 평화적인 해결 방법은 없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1947년은 불교계로서는 뜻 깊은 해이다. 영남 문경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구호를 내걸고 봉암사결사가 이루어졌고, 같은 해 호남 전남 장성군 백양사에서 원칙적이고, 평화적인 해결책을 모색한 고불총림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봉암사 결사는 6·25라는 전쟁을 맞게 됨으로써 계승되지 못하였고, 고불총림은 1956년 만암 송종헌 선사가 세상을 떠나게 됨으로써 그 찬란한 정신에도 불구하고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되었다.

해방 직후 불교계는 1945년 9월 전국 승려대회의 결과로 탄생한 중앙총무원과 혁신세력 사이에 입장 차이가 너무 커서 도저히 합일점을 찾기 힘든 상황이었다. 혁신세력은 현실을 감안하지 않은 극단적인 원칙론을 제시하였다. 예를 들자면 혁신세력의 주장은 대처승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토지문제 해결에 있어 종교 단체인 사찰은 토지를 소유하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전체 승려들 가운데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대처승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불교계 재정의 근간을 이루는 사찰 소유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돌려준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사진설명> 고불총림의 결성을 주도한 조선불교 제3대 교정 만암 송종헌
고불총림은 1948년 9월에 개최된 전국 승려대회 결과로 성립된 중앙총무원과 혁신계열의 갈등이 깊어져 분열과 혼란이 가중되던 시기에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실천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고불총림 결성의 중심에는 송종헌 있었다. 그는 백양사로 출가를 하여 1929년에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1948년에는 조선불교 제3대 교정을 지낸 당시 불교계의 중심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일제시대 비구승들은 수행할 공간이 없어 선학원으로 모여들었지만 선학원의 사정이 넉넉하지 못하여 옷 한 벌과 바루 하나를 제대로 건사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1952년 선학원의 승려 이대의는 선승들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달라고 종정에게 건의하였다. 종정은 이 문제를 공감하고 유수한 사찰을 비구승들에게 제공할 것을 지시하였다. 종정의 교시를 받은 실무진들은 1952년 11월 통도사에서 개최된 중앙교무원회에 이 문제를 상정하였고, 회의 결과 이 문제는 긍정적으로 수용하기로 결말이 났다. 이듬해 4월 불국사에서 이 문제를 검토할 법규위원회가 개최되었고, 동화사·직지사·보문사·신륵사·내원사 등 18개 사찰을 비구승들의 전용 수행공간으로 제공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비구승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비구승들은 전국 1200여 개의 사찰 가운데 고작 18개를 할애하였다는 것과 삼보 사찰이 그 가운에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에 분노하였다. 이에 송종헌은 삼보 사찰부터 계율을 수호하는 비구승들이 주지로 근무하게 하자는 방안을 제시하였지만 수용되지 않았다.

송종헌은 고불총림을 결성하는 목적을 강령의 서문에 대략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국운이 불행하여 나라가 일본의 강토가 되어 삼천만 민족이 국혼을 상실할 위기에 처하였고 불교 또한 파멸을 당하였다. 다행히 해방을 맞이하여 일본이 물러가고 난 뒤에 다른 부분에서는 전통을 회복하는데 노력하고 있는 것 같지만 불교만은 지금까지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므로 석가와 조사들의 가르침을 계승하는데 앞장서겠다’는 것이다. 고불총림의 강령은 모두 11개 조항이지만 주요한 내용을 간추려 보면 크게 3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고불총림 결성의 목적을 밝힌 부분이다. 고불총림은 삼보를 수호하고, 국가와 부모, 스승과 사회에 입은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청허(晴虛)·부휴(浮休)의 정맥을 계승한다.

둘째, 고불총림의 실행원칙을 밝히고 있는 부분이다. 불법은 사부대중이 원칙이지만 거기에 대처승을 포함시켜 오부중으로 한다. 계율을 지킨 승려는 정법중(正法衆)으로 하고, 계율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승려는 호법중(護法衆)으로 한다. 정법중은 선백(禪伯)·강사·지전(持殿)·감원(監院) 등 교계 내부의 일을 관장하고, 호법중은 포교사·교직원·서무·재무·회계·서사(書史)·지객(知客)·산감(山監) 등 외무에 종사하게 한다.

셋째는 정법중과 호법중이 지켜야 할 원칙과 세부 실행 사항이다. 정법중과 호법중은 각기 영역이 다르지만 다 같은 불교도이므로 서로 믿고, 신뢰하여야 한다. 사찰의 재산은 사유물이 아니므로 당국의 인가를 얻어 재단법인의 재산으로 등록한다. 지금은 정법중과 호법중이 섞이어 있지만 한국 불교가 회생하는 중요한 시기이므로 이 취지에 동참하는 사찰은 사찰의 이름 앞에 고불총림이라는 용어를 붙이도록 한다. 고불총림은 오직 계율을 스승으로 알고 수행함으로 특별한 규칙을 정하지 않는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불총림은 비구·대처승의 갈등을 대립과 반목이 아닌 순리에 따라서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고불총림에 참여하는 승려들이 지켜야 할 청규 22조가 있는데 그 가운데 주요한 것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으며 일련번호는 청규의 순서가 아니고 편의상 붙인 것이며 내용은 요약한 것이다.

1. 진리를 연구하며 자신과 타인을 이롭게하는 것을 더 없는 즐거움으로 누린다.
2. 종맥은 임제종맥을 계승하였으므로 태고 보우조사의 법맥을 계승한다.
3. 도제양성은 중등 법계 이상을 이수한 승려에게 승인한다.
4. 고불총림의 승려는 청정 걸식을 할 수 있으나 가급적 노동에 종사하여 자력생활을 하도록 한다.
5. 승려의 유산은 전재산의 2할을 본 총림의 재산으로 하고 나머지는 제사를 위한 것과 제자들에게 나누어 준다.
6. 고불총림에 들어와서 3년 이상 본 총림의 청규와 의무를 실행하지 않는 자는 어떤 승려든지 원적이 자연 해소된 것으로 간주한다.
7. 본 총림에 들어와서 3년 이상 머무른 자는 본 총림으로 전적(轉籍)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혹 먼저 전적하고자 할 때는 신분과 이유를 충분히 심사한 후에 가능하다.
8. 본 총림의 계급은 학문의 고하와 덕행의 우열을 따르며 이미 정해진 법계를 철저하게 실행한다.
9. 본 총림의 상벌은 권선징악의 일반적인 법칙을 따른다. 일년에 한 번 7월 15일에 대중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공사간에 교문(敎門)의 광영(光榮)을 발한 자는 포상하고, 실추시킨 자는 문책한다.
10. 이상의 청규를 성실히 실행할 성품이 있는 자에 한하여 입적을 허락하고 만일 이 청규를 3년이상 실천하지 않으면 일체의 공직을 불허한다.

위에 요약된 청규에서 보이듯이 고불총림의 결성 목적은 당시 혼탁한 교계의 관행을 바로잡고 비구승과 대처승의 역할을 구별하여 비구승 중심의 교단을 확립하려는데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불총림에 참여한 대중들은 전남 지역의 22개 사찰과 포교당의 주지 및 비구승을 모두 합하여 178명이다. 송만암은 비구·대처승의 갈등을 마무리 짓기 위하여 대처승은 상좌를 두지 못하게 하고, 가족들은 사찰 밖에 거주하게 하는 방안은 제시하였다. 이것은 대처승의 자연 소멸을 기다리자는 것으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그는 1954년 정화불사가 시작되어 비구·대처승 사이에 갈등이 깊어져 가던 시기에 이재열·이종익 등이 보조법통설을 주장하고 나오자 이러한 처사를 환부역조(換父易祖)라고 표현하면서 인정하지 않는 성명을 발표하고 종정직을 버리고 백양사로 돌아간다. 고불총림은 정화불사가 시작되던 초기에 송만암의 결단으로 비구·대처승의 갈등과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방안으로 결성되었다.

그러나 비구 승단의 지도자들과 청년 승려들은 수 십년의 세월을 기다리지 못하고 이승만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도움을 준다고 약속한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하고 차마 해서는 안될 방법으로 정화불사를 시작하였다. 그 결과 교단은 비구 승단인 조계종과 대처 승단인 태고종으로 갈라지게 되었고 그 상처는 지금까지 많은 후유증을 남기고 있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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