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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육도윤회하는 중생일까 아닐까

기자명 법보신문
  • 지계
  • 입력 2008.03.24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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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제선, 부파불교서 “아니다” 이론 확립돼
불살생계 위한 방편…“식물은 중생”이견도

천자암 곱향나무. 이 나무는 순천 조계산에 천자암을 짓고 수도하던 보조 국사와 담당 국사가 사용한 지팡이를 나란히 꽂자, 뿌리를 내려 자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불교에서는 왜 식물을 육도윤회 하는 중생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일까. 또 왜 식물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무정물로 여기는 것일까.

이와 관련 동국대 우제선 교수는 최근 『종교교육학연구「26권(2008.2)에 발표된「식물은 중생인가:불교의 생명인식」이라는 논문을 통해 불교가 식물을 중생의 범주에서 제외한 배경과 이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목받고 있다.

우 교수는 논문에서 “불교가 처음부터 식물을 중생의 범주에서 제외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초기경전을 살펴보면 초기불교에서는 식물을 유정과 무정의 경계에 있는 존재라는 이중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우 교수에 따르면 『사분율』괴생종계에 의하면 “만약 비구가 귀신 마을을 허물면 바일제이다”라는 규정이 있는데 여기서 ‘귀신’은 사람이 아닌 것을, ‘마을’은 온갖 초목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국 ‘비구가 식물을 해하는 것은 바일제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이는 식물도 생명을 지닌 중생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을 드러낸 대목이라고 우 교수는 추론했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비구가 지켜야 할 불살생계를 설명한 대목을 살펴보면 축생 등에 대해 직접적으로 살생해서는 안된다는 규정을 마련한 반면 식물에 대해서는 별도의 계목을 제정하지 않았다. 더구나 율장에서는 오히려 풀을 베거나 나무를 자르는 것을 재가자에게 살생이 아닌 것으로 허용하고 있다. 때문에 초기불교에서는 식물이 중생인지 아닌지와 관련한 문제에 대해 모호하고 이중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우 교수는 설명했다.

그러나 우 교수는 “이 같은 초기불교의 이중적인 태도는 이후 부파불교 시대에 들어 크게 변화해 식물을 중생의 범주에서 완전히 배제하게 된다”며 “이 같은 입장변화는 업설 및 윤회설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추정했다.

우 교수에 따르면 유정이 열반의 세계에 이르는 방법은 고(苦)의 원인을 제거해 고를 소멸시키는 것인데 당시 인도사회에서 식물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됐고, 이로 인해 식물은 중생이 아니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특히 업설과 관련해서도 식물은 탐욕이나 증오와 같은 삼독(三毒)에 물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선업이나 악업을 짓는 일이 없어, 업에 따른 재생이 가능하지 않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더구나 생명을 정의하는 범위에 있어서도 체온과 의식을 가지고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한정함으로써 식물을 중생의 범주에서 철저히 배제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부파불교 시대에 들어 불교는 ‘함수초 잎 등은 만지면 오그라드는 반응을 보이는 점’, ‘동물과 마찬가지로 식물도 성장한다는 점’ 등을 이유로 식물도 중생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자이나교의 ‘식물중생설’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을 가했다는 점이다. 즉 함수초 잎 등이 만지면 반응을 보이는 경우에 대해 머리카락이나 손톱 등의 무정물도 불에 가까이 하면 오그라드는 반응을 보이고, 개미집이나 산호초도 무정물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커지는 현상이 관측된다는 점을 들며 자이나교도들의 ‘식물중생설’은 설득력이 없다고  반박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파불교시대 불교논사들이 이 처럼 식물을 중생의 범주에서 배제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우 교수는 “불교도의 실질적인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열반의 세계에 이르는 것은 계율을 잘 지키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인데, 식물이 중생의 범주에 포함될 경우 농사를 짓고 가옥을 세우는 모든 일이 살생이라는 파계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불교도들은 이런 현실적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합리화 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우 교수의 이 같은 주장에도 여전히 논란의 여지는 많다. 즉 초목이나 국토와 같은 비정(非情)한 것조차 모두 성불할 수 있다고 강조했던 것이 대승불교 근본사상이었던 것을 미뤄보면 계율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식물을 중생의 범주에서 제외시켰다는 것은 인간의 지나친 합리화는 아닌지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더구나 최근 식물에게도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거나 애정을 듬뿍 주면 성장속도가 빨라진다는 등의 연구 결과가 발표되는 상황에서 여전히 식물을 생명체가 없는 무정물로 간주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것으로 보인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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