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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 명강의] 성불사 주지 학명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모든 노인을 내 부모 섬기듯 하라”

십여 년 전만 해도 ‘서민의 발’하면 단연 버스였습니다. 어찌나 사람이 많이 탔던지 콩나물시루 같았습니다. 하지만 요즈음은 잘 연결된 지하철이 있어 버스 이용하기가 다소 수월해진 느낌입니다. 지금도 길이 막히면 꼼짝없이 거리의 미아가 되곤 하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버스 한번 타는 것이 마치 한바탕 전쟁을 치루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언젠가 우연히 버스를 타게 됐습니다. 퇴근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만 버스 안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서서 가는 승객들이 십여 명 정도여서 격세지감을 느끼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이 되어 버스를 내려야만 했습니다. 점차 사라져가는 우리들의 경로사상 때문이었습니다.

노인에 자리양보하는 건 옛 말

버스가 한창 복잡한 도심을 벗어날 무렵이었습니다. 머리가 하얗게 센 할아버지가 할머니와 함께 차에 올랐습니다. 주위에는 20대로 보이는 젊은 남녀들이 죽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선뜻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젊은이들이 앉은 자리 위에는 경로석 이라는 노란 스티커가 엄연히 붙어 있는데도 모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도 자리를 내 놓기가 싫어 짐짓 잠이 든 채 하는 젊은이들이 간혹 있긴 했습니다만 이런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들은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힘들어 쩔쩔매는 노인들을 빤히 쳐다보기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보다 못한 제가 나섰지요. 한 젊은이에게 자리 양보하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마지못해 일어섰지만 계속해서 투덜대는 것이었습니다. 겨우 자리에 앉아 한숨 돌린 노인들이 저와 그 젊은이에게 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했지만 젊은이의 불평은 그러고도 한참이나 계속 됐습니다. 저는 버스를 서둘러 내리면서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불과 30여년 전만해도 어른에 대한 공경은 상식이었습니다. 부모님은 물론이요, 동네 어른들에게 깍듯이 예를 차리는 것은 물론이고 혹 거리에서 만나는 노인이라도 고개 숙여 인사를 드리는 것은 일상의 다반사였지요. 또 집안과 마을의 일들은 항상 나이 드신 어른들께 먼저 말씀드리고서야 그 뜻을 받들어 처리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젊은이들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노인들을 공경하기는커녕 늙음을 비웃고 심한 경우에는 귀찮아하는 풍조마저 만연하고 있습니다. 자식이 있는데도 봉양을 받지 못하고 혼자서 살아가는 노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망한 노인들이 뒤늦게 발견되는 일은 미국과 유럽 등 서구에서만 일어나는 사건이라고만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런 못된 풍조가 이제는 슬프게도 바로 우리들 자신의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날로 심각해지는 노인 문제, 잊혀가는 경로사상, 세상이 변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만은 없습니다.

늙음이란 지금 머리가 하얗게 센 어른들의 일만이 아닙니다. 불과 몇 십 년 후, 아니 몇 년 뒤에는 내 자신에게 닥칠 일입니다. 세상이 갈수록 핵가족으로 분화되고 개인 중심으로 생활방식이 달라졌다 해도 사람이 반드시 지키며 살아가야 할 근본 도리는 예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은 가깝게는 부모님이 계셨고 멀리는 얼굴조차 알 수 없는 조상님들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는 미국에도 부모를 잘 모시려는 젊은이들이 아주 많다고 합니다. 결혼을 하고 나면 부모와 헤어져 살지만 갓 끓인 스프가 식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 집을 마련하고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부모님을 찾아뵙는다고 합니다. 결코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독립하면 그뿐이라는 식으로 인륜을 저버리고 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나쁜 면, 문제가 있는 면만 보고 선진국인 저들도 그런데 우리라고 별수 있느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 변해도 기본윤리는 불변

부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남자가 내 아버지요, 세상의 모든 여자가 내 어머니”라 하셨습니다. 함께 숨 쉬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나와 알게 모르게 인연을 맺고 있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은 또 “부모님을 어깨에 이고 높고 높은 수미산을 몇 백번을 오르내린다 해도 부모님의 은혜는 결코 다 갚을 수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법입니다. 오늘의 이 어지러운 세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부터 노인들을 공경하는 모범을 보여야하겠습니다.

부모님을 편안히 해드리고 나아가 자식들에게 본을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바르게 사는 진정한 지혜가 될 것입니다.
불교의 효 사상에 이어 내친김에 불교의 ‘사홍서원(四弘誓願)’에 대해서도 간략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사홍서원’의 내용입니다. 법회를 보든지 모임을 갖든지 불자들은 항상 이 사홍서원을 외웁니다. 사홍서원을 하는 불자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절로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마치 부처님의 자비하심이 곧 세상가득 퍼질 것만 같은 그런 희망에 사로잡히지요. 그러나 모두 이들이 돌아간 텅 빈 법당에 홀로 있다 보면 문뜩 의문이 듭니다. 법당에서 사홍서원을 함께 외던 이들이 그 깊은 뜻을 얼마나 가슴에 새기고 있을까.  또 그것을 얼마나 실천하며 살고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의문의 답은 극히 부정적이겠지요.

물론 우리 2천만 불자가 모두 앵무새처럼 사홍서원을 외우는데에만 급급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 중에는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사홍서원을 통해 자신의 삶을 완성해가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들이 얼마나 될까 의문이 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자라면 모름지기 스스로 원(願)을 세워야 합니다.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발원(發願) 또는 서원(誓願)이라 합니다. 강한 용기와 의지로 원을 세우고, 원을 세운 다음에는 그것을 실행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원을 세웠다면 실천하라

때로는 묵묵히, 때로는 끈질기게 자신을 가다듬고 정진해야 합니다. 바르게 원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는 것. 이것을 원행(願行)이라고 합니다. 원과 행, 이 두 가지는 수레의 두 바퀴와도 같습니다. 원만 있어도 안 되고 행만 있어도 안 됩니다. 수레가 잘 굴러가기 위해서는 두 개의 바퀴가 다 있어야 합니다. 원과 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원과 행이 하나가 되었을 때 우리는 바른 수행의 길을 걸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세워야하는 원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해답을 불보살님들이 세우셨던 수많은 원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미타 부처님의 48원, 약사여래의 12원, 보현보살의 10대원, 승만 부인의 10대원, 『천수경』에 나오는 여래 10대 발원문 등이 그것입니다. 이들 수많은 원들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나보다는 뭇 중생들의 행복을 바라고 그들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겠다는 자비심이 가득합니다.  어느 것 하나도 나 한 사람 잘 되자고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불보살의 커다란 원을 그대로 따라 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미혹한 중생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비록 힘에 부치고 어려운 길이라 하더라도 불보살의 원을 따르려 노력하는 것이 불자의 본분입니다. 불자들이 늘 외우는 사홍서원은 바로 우리들이, 불자들이 세워야할 원의 기본이 되어야 하겠지요.

목표가 없는 인생은 드넓은 바다 위를 표류하는 난파선과 같습니다. 갈 곳을 몰라 우왕좌왕 하지 말고 오로지 성불을 목표로 끊임없이 노력하는 불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하 반야바라밀.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이 법문은 지난 3월 8일 경기 하남 남한산 성불사 주지 학명 스님이 초하루 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학명 스님


1960년 출가한 스님은 1976년 대한불교조계종 남한산 성불사를 창건했으며 벽담장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매년 신도들에게 금강경 강의를 두 차례씩 열며 ‘항상 나누는 삶을 살라’고 강조하고 있다. 1991년부터 정기적으로 서예전시회를 열고 있다. 저서로는 『선사들의 숨은 이야기』,『우리말 천수경』,『삼세인과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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