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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불교사] 6·25한국전쟁과 불교계

기자명 법보신문

뺏고 빼앗는 싸움 속 사찰·성보 잿더미로 변해

조계종총무원 발간 『한국전쟁과 불교문화재』에 실린 6.25한국전쟁 당시 파괴된 봉선사 해탈문.

전쟁은 수많은 무고한 인명의 살상이 따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할 만큼 무수한 전쟁이 있어왔다. 우리 민족이 가장 최근에 경험한 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이다. 불교계는 이 전쟁으로 수많은 사찰과 문화재를 소실 당하였으며, 많은 승려들이 피살되거나 납북되는 비운을 겪었다. 당시 사찰은 대부분 산 속에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빨치산들이 자주 출몰하여 사찰을 습격하였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동한 군과 경찰은 정도에 지나치는 사전조치를 취하였다. 그 과정에서 빨치산과 남한의 군경에 의해서 사찰은 불타기도 하였으며, 많은 인명이 살상되기도 하였다. 더구나 작전지역에 포함되어 빨치산의 근거지를 없앤다는 명분으로 산림을 벌채하는 소개령을 내림에 따라 승려들은 절을 버리고 떠난 경우도 많았다.

북, 남침과 함께 태고사 접수

남조선불교도연맹에서 서울시 임시인민위원회에 제출한 정당사회단체 등록 신고서.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시작한 북한군은 6월 28일 서대문 형무소를 점령하고 장상봉·김용담·곽서순 등 좌익계열 승려들을 석방하였다. 1948년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에 참가하러 평양으로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고 북한에 남아 있었던 불교청년당의 김해진과 좌익계열의 승려들은 지금의 조계사인 태고사를 접수한다. 이들은 남조선불교도연맹이란 단체를 조직하였으며 위원장은 김용담이었다. 남조선불교도연맹은 강령과 규약을 정하고 7월 4일자로 남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 등록을 마친다.

강령은 대중불교를 실현한다는 것과 민족통일을 완수한다는 것 그리고 균등사회를 건설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들이 내건 당면 주장은 교도제 실시와 사찰정화, 사설 포교당 숙청, 일제 잔재청산, 친일파와 교단 반역자 타도 등 10개 조항이다. 아울러 9명의 최고위원이 임명되었는데 그들은 김용담·곽서순·장상봉·김만기·김해진·백운정·이등운·조명기·조복순 등이다.

남조선불교도연맹은 북에서 내려온 불교도들과 함께 신도들을 대상으로 사상과 교양 및 전쟁지원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독보회(讀報會)를 조직하여 매일 밤 태고사에서 공산주의 사상과 불교도들의 역할에 대한 토론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와 북한을 찬양하는 노래를 가르치는 등 선전활동을 하였다. 전쟁지원 활동으로는 인근 민가에서 재봉틀을 구해와서 종무소에서 전선으로 보낼 군복을 만들었다.

태고사는 신행활동을 하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채 군수품을 생산하는 군수공장으로 전락된 셈이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됨에 따라 전세는 역전되어 북한군이 쫓기는 처지가 되자 태고사 옆에 있던 중동중학교는 야전병원으로 사용되었다. 시가전이 진행됨에 따라 부상자가 속출하여 병실이 모자라게 되자 태고사 대웅전과 요사, 종무소 등에도 부상자들이 넘쳐나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고 한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으로 퇴각하지 못한 북한군은 지리산에 은거하여 빨치산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인근의 사찰과 승려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

한편 중앙총무원은 1951년 1월에 부산 대각사로 피난을 간다. 중앙총무원은 뒤에 경남 교무원에 거처를 마련하게 된다. 3월 22일에는 제2대 교정이었던 방한암이 상원사에서 입적하게 된다.

중앙교무원회는 송만암을 제3대 교정으로 추대하고 총무원장으로 당시 제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던 이종욱을 선출하고, 총무부장에 최원종, 교무부장에 박춘해, 재무부장에 장용서, 사회부장에 이동희를 선임한다. 종립대학인 동국대학은 전란중에 대구 덕산동으로 옮겼다가 부산으로 내려가서 전시하 교육특별조치요강에 따라 전시연합대학 체제로 운영되었다.

사찰, 정치선전의 장 변질

전시연합대학 체제란 각 대학들이 연합하여 수업을 진행하는 것으로 영도 해동중학교에서 개강을 하였다. 당시 학장은 김동화였으며 이후 동국대학은 신창동 경남교무원에서 단독으로 개교한다. 1953년 2월에 동국대학교로 승격하여 총장으로 권상로가 취임한다. 승려들 가운데 일제시대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를 지냈던 허영호를 비롯하여 박윤진·장도환·유성갑·박봉석·정준모·백석기·양외득·최말도·천하룡 등이 납북되었으며 그 밖에 많은 승려들과 불교도들이 피살되었다.

1951년 5월 교계 신문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피랍자와 피살자 수만 59명에 이른다. 사찰과 문화재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국보급 문화재로는 국보 제25호였던 청평사 극락전과 월정사 칠불보전, 송광사의 청운당을 비롯하여 많은 보물과 문화재들이 소실되었다.

전쟁 중에 불교계의 문화재가 보존될 수 있었던 실화 두 가지를 소개한다. 상원사의 방한암 스님의 일화는 듣는 사람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당시 국군은 상원사를 작전상 소각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막상 국군이 불을 지르려고 상원사로 올라가니 방한암은 피난을 가지 않고 절에 주석하고 있었다. 방한암은 군인들에게 일주일만 기한을 주고 나서 불을 지르던지 말던지 하라고 하였다. 일주일 뒤에 국군 장교가 상원사로 올라가 보니 방한암은 그간에 단식을 하고 좌탈입망하였다. 이 모습을 본 국군은 차마 상원사를 불태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방한암의 수행력이 상원사를 화마로부터 보존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해인사의 장경각이 보존될 수 있었던 미담이다. 공군 제1전투비행단 부단장 겸 제10전투비행편대장 김영환 대령은 해인사를 폭파하라는 상부의 명을 거부하고 폭격을 하지 않았다. 김영환 대령을 편대장으로 한 4대의 전폭기는 각각 500파운드 폭탄 2발과 5인치 로켓탄 6발을 장착하고 출격하였다. 편대장 김영환 대령의 1번기는 폭탄 대신 750파운드짜리 네이팜탄을 적재하고 있었다. 네이팜탄은 약 1,500℃로 주변을 순식간에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폭탄이다. 이것이 투하될 경우 해인사는 잿더미로 변할 것이 뻔했다. 폭탄의 효능을 잘 알고 있는 김 대령은 문화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편대기들에게 폭격 중지를 명령했다. 김 대령은 죽기를 각오하고 전시체제에서 명령 불복종을 감행하면서 해인사를 지켜냈다. 그 날 밤 김 대령은 곤혹스러운 경험을 하였겠지만 그 덕분에 팔만대장경은 오늘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세계적인 자랑거리가 될 수 있었다.

방한암 스님 목숨걸고 상원사 지켜

아직까지 불교계의 한국전쟁 피해는 정확한 집계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일제가 물러간 지 5년 만에 발발한 전쟁이라서 정리된 자료가 불충분하다는 점이다. 해방 직후 불교계는 좌우익 대립의 소용돌이 속에서 심한 홍역을 치루었다. 좌익계열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교단의 경제적인 기반인 사찰의 토지 소유마저 부정하였고. 우익은 일제시대 교단의 핵심 책임자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자리를 지키는 상황이었다. 더 더욱 큰 문제는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변질되어 버린 한국 불교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려는 비구승들의 노력은 90%가 넘는 대처승들에 의해서 묵살되었다.

불교계의 한국전쟁 피해 상황은 2003년부터 대한불교조계종 문화부에서 『한국전쟁과 불교문화재』라는 일련의 조사보고서를 발간함으로써 집계되기 시작하였다. 현재까지 강원도, 제주도, 광주광역시·전라남도, 전라북도, 서울경기도편 등 5권이 발행되었다.

이 보고서는 각 도별로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사찰의 연혁과 피해과정 그리고 생존자들의 현장 목격 증언 등이 수록되어있다. 이 보고서에서 느끼는 아쉬운 점은 각 도별 개괄 설명이 없다는 점과 통계 처리가 안 되어 있다는 점이다. 당시의 기록과 사진은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는 실정이지만 현재로서 당시 교단의 피해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생존자들의 증언을 채록하는 것뿐이다.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서 기억마저 희미해져 버린 시점이지만 한국전쟁 증언 자료집을 발간하는 작업은 중요하다. 여러 사람의 증언을 채취하고 당시의 정황과 주변 기록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실제 모습은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종단 차원에서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살려 내려는 이 작업은 큰 의미가 있으며 조속한 시일 내에 완간되기를 기대한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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