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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정 기자의 칙칙폭폭 인도순례]7. 위대한 탄생

기자명 법보신문

침묵하는 나무가 2500년 전 진리를 말하다

마야 부인이 싯다르타를 출산하고 나서 목욕했다는 연못. 그 뒤로 사라수(무우수)가 근엄하게 서 있다.

사람은 길을 만들고 길은 사람을 가르친다. 어제의 길을 따라 새날을 여는 여정은 말없이 여행자를 가르친다. 그런데 오늘은 특히 더 많은 가르침을 주려나 보다. 무려 왕복 12시간 동안 꼼짝없이 버스 안에 갇혀 인도 국경을 넘어 네팔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쁘게 움직였던 일정 중 유일하게 여유로운 여정이라는 생각에 살짝 미소 지어본다. 룸비니로 출발. 인솔자가 처음으로 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잡아 순례자들에게 경고했다.
“이번 일정 중 가장 고된 길이 될 것 같습니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러나 그 의문은 머지않아 풀렸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가 뒤뚱거린다. 비포장 자갈밭 길에 들어선 버스가 승객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속력을 줄여 쭈뼛거린다. 제각기 튀어나와있는 돌들을 타이어가 밟고 지나자 돌덩이들이 아프다며 버스에 앉아있는 이들을 응징한다. 사람들이 당황하기 시작한다.

앞에 앉은 사람부터 맨 뒤에 앉은 이까지 순서대로 엉덩방아를 찧어대는 광경은 마치 팝콘 튀기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사람은 팝콘이 되고 버스는 전자레인지가 된 것 마냥 ‘따닥따닥’ 쉴 새 없이 튀겨진다. 머리가 버스 천장에 닿을 것 같다. 게다가 엇박자로 창문은 덜컹덜컹 깨질 것처럼 비명을 내며 귀를 따갑게 한다. 이 모습으로 우리는 12시간을 가고 와야 한다. ‘정신이 쏙 나간다’는 말은 이럴 때 써야 할 것 같다. 놀란 토끼 눈으로 서로를 보며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팝콘이 되어야 하냐며 울상 짓는다. 잠을 청하기는커녕 분명 이러다 창문이 깨지거나 타이어가 터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노오란 겨자 꽃들이 환하게 ‘안녕’하며 온몸을 흔들어 인사한다.

한참을 돌멩이들과 씨름하다 문득 창밖을 바라보니 눈이 시원해진다. 광활한 대지 위로 드문드문 흙벽 집과 시멘트집이 펼쳐지고 척박한 토양에는 노오란 겨자 꽃들이 환하게 ‘안녕’하며 온몸을 흔들어 인사한다.

버스에 오른 지 2시간 만에 반가운 질문이 터졌다. “혹시 급하신 분 계세요?” 인솔자의 말에 여기저기에서 슬며시 팔이 올라온다.

화장실 하나 없이 끝없이 펼쳐지는 대평원에서 볼일을 보기란 불화를 그릴 때 마지막 점안하는 작업만큼이나 조심스럽다. 오래 참고 또 참은 사람들. 버스에서 내린 남과 여는 말하지 않아도 버스를 중심으로 남자는 오른쪽 여자는 왼쪽이다. 그나마 남자들은 꼭 나무 앞에 서지 않아도 허공을 향해 휘갈기면 그만이지만 여자들의 사정은 좀 다르다. 일단 숲을 찾아 나선다. 바닥 곳곳에 펼쳐진 생쥐 무덤만한 소똥은 마치 전쟁터에 깔린 지뢰처럼 걸음걸음을 조심스럽게 한다. 숲이라는 안식처를 찾은 이후에도 좌우 시선을 살피며 내리고 올리고 또다시 엄청난 지뢰를 피해 버스에 오르기까지 만만치 않은 일이다. 까만 밤이라면 눈 한번 꽉 감아버리면 그만이지만 환한 대낮에는 난감하기 짝이 없다.

익숙해진다는 것, 적응한다는 게 이런 것일까. 그나마 지뢰밭이 아닌 버스 안에서 팝콘 되는 편이 훨씬 낫다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은 어느새 얌전한 팝콘이 된다.

인도와 네팔 사이의 국경을 표시하는 대학교 교문만한 대문.
국경지대에서 오렌지를 파는 아이. 외국인을 보고 환히 웃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인도와 네팔의 국경이 만나는 곳에 다다랐다. 그런데 웬걸.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경 지대에 달랑 대학교 교문만한 대문이 전부다. 우리에게 익숙한 휴전선 때문이었을까. 뭔가 엄청난 걸 기대했던 국경은 이렇게 허무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 교문 사이로 버스와 트럭은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상인들은 물건을 팔고,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사람들이 유유히 오고 간다. 인도인과 네팔인은 다른 나라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닮아있다. 그렇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서열은 존재한다. 카스트 제도는 폐지됐지만 인도인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서로 의식하듯 인도인은 네팔인을 자신들의 하인쯤으로 취급한다.

인도인보다 조금 더 키가 작고 마르고 까만 얼굴의 네팔인.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드는 그들의 나라로 잠시 발걸음을 떼어본다.

드디어 고대하던, 무려 6시간 동안 달려 도착한 룸비니. 그런데 사실 조금 실망스럽다. 말 그대로 횅하다. 마야 부인이 싯다르타를 출산하고 나서 목욕을 했다고 전해지는 넓은 연못이 보인다. 5세기경만 해도 이곳을 지났던 법현 스님은 ‘지금도 사람들이 이 물을 항상 퍼마신다’고 했지만 이 물 역시 색은 검기만 하다. 바로 앞 마야 사원에 들어서니 싯다르타의 탄생을 형상화한 4세기 조각과 붓다의 발 모양이 찍혀있는 돌이 보이지만 형체를 알아보기란 보통의 시력으로는 불가능해 보인다.

아쇼카 왕이 세운 석주.

싯다르타의 탄생을 형상화한 4세기 조각.
아쇼카 왕 즉위 20년이 되던 해 이곳을 참배하고 나서 인근에 사는 이들의 세금을 감면해 준다는 기록을 새긴 석주.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이 석주에서 일곱 걸음 떨어진 곳이 붓다가 태어난 곳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곳 사라수(무우수)에 오색 만국기 같은 ‘타초르’ 수백 개가 걸려있다. 그 나무 아래에도 어김없이 힌두의 신이 모셔져 있다. 마치 그곳의 주인인냥 한 노인이 명상하듯 앉아 있다. 아쉽게도 그는 불자들에게 힌두인들의 상징인 이마에 붉은 점을 찍어주는 ‘띠까 의식’을 버젓이 거행하고 있다.

‘하늘 위 하늘 아래 나만이 가장 존귀하도다. 일체의 모든 괴로움 내 중생들을 위해 기필코 그치게 하리라.(天上天下 有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고 외친 싯다르타 태자가 태어난 곳. 하늘 아래 모든 생명은 존귀하다는, 우주천지와 세상의 근본이 바로 우리들 마음의 근본에 직결되어 있다는 뜻을 전한, 깨달음으로 가는 세계가 열린 곳이 바로 이곳이란 말인가.

붓다는 태어난 곳도 나무 아래고 깨달은 곳도 나무 아래다. 초전법륜을 굴린 곳도, 마지막 입적한 곳에도 나무가 있었다. 나무는 붓다의 탄생부터 입멸까지 지켜본 유일한 목격자임과 동시에 깊은 침묵으로 그 가르침을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나무처럼 자비로운 벗이 또 있을까. 살아서는 시원한 그늘을 주고 죽어서는 제 몸을 태워 온기를 주고, 몸을 깎아서는 서까래나 대들보가 되는 것도 마다 않는다. 지금 그 나무아래 내가 있다.

밤새 땔감으로 쓸 나무를 줍고 쓰레기 더미에서 쓸만한 물건을 한 아름 모아 집으로 향하는 아이들.

각박해져만 가는 세상. 현대인의 비극도 어쩌면 나무를 멀리한 것부터가 아닐까. 각질보다 딱딱한 콘크리트는 사람들이 일어설 뿌리를 차단하고 한없이 높게 뻗어 올라간 고층빌딩은 사람들의 광합성 작용을 막아 숨을 헐떡이게 한다.

어느덧 해는 저 멀리 숨어버리고 어둠이 주위를 감싼다. 그 어둠 속에서 아이 둘이 재잘재잘 떠들며 내 앞으로 걸어온다. 밤새 땔감으로 쓸 나무를 주은 아이 1과 쓰레기 더미에서 쓸만한 물건을 한 아름 모아 집으로 향하는 아이 2.

오늘 하루도 온전히 살아낸 이들. 나를 보는 아이와 아이를 보는 나. 까만 눈동자가 무심결에 마주친다. 그리고 서로 미소 지으며 스쳐 지나간다. 가볍고 날아갈 것만 같아야 하는 아이들의 발걸음이 팔십 먹은 노인의 걸음보다 무거워 보이는 건 왜일까.

안소정 기자 as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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