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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 명강의] 공생선원 선원장 무각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안 된다는 그 마음을 내려놓으라

날씨가 이렇게 쾌청한데 공부하기 위해 오신 불자님들 장하십니다. 3년 전부터 공생선원에서는 불자님들의 수행을 지도할 교재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오랫동안 사찰을 다니며 수행하신 불자님들이라도 막상 수행에 대해 물어보면 잘 모르시기에 ‘수행에 관해 정리를 좀 해야겠다’ 싶어 시작했는데 얼마 전 『일상 속에서의 수행』이라는 제목의 소책자가 완성됐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수행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공부를 하다 보면 공부가 잘 되다가도 문득 ‘공부가 뭔지 모르겠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 ‘도대체 이 공부가 뭔가’하는 생각이 문득 들 때도 있습니다. 왜 이 공부를 하는가, 공부해서 무엇 하나, 공부 하지 않아도 살고, 심지어는 안하는 사람들이 더 잘사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이 만들어낸 장애입니다. 마음속에서 생기는 의혹은 공부를 망가뜨립니다. 공부에 대한 회의가 드는 것, 이것은 그야말로 큰일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성도를 이루시기 전 모든 유혹으로부터 항복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의혹이었습니다. ‘지금껏 그 누구도 깨달음을 이룬 사람이 없었다. 과연 깨달음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의혹이 마음속에서 일었습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전륜성왕이 돼서 온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공부의 가장 큰 장애는 ‘의혹’

이것이 바로 자신을 속이고 무너뜨리는 마구니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마구니를 잘 극복하시고 성도를 이루셨지만 중생은 이것이 마구니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이런 의혹이 마구니인줄 모르는 까닭에 극복할 생각도 안하고 스스로 의혹에 갇혀 무너져 가고 마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수행의 길잡이가 되는 책을 보거나 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극복해야 하는데, 그럴 때는 책을 보기도 싫고 스님의 말씀도 듣기 싫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밖으로부터 닥치는 경계는 넘어설 수 있지만 마음속으로부터 솟는 의혹은 모든 것을 다 무너뜨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역시 바깥에서부터 닥쳐오는 경계는 잘 넘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경계임을 알고 어려운 상황임을 막상 알면 더 잘 극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스스로 마음속에서 의혹이 생기고 그것이 마음이 만들어낸 경계임을 모른다면 결국은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되고 그것을 넘어서기가 어렵게 되고 맙니다.

스님들이 출가를 한 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속퇴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출가를 할 때는 누구나 많은 고민을 하고 굳은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출가를 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것에 걸려 넘어집니다. 바로 이런 생각 때문입니다. 누가 때리고 쫓아내면 오히려 안 나가겠지요. 목숨을 걸고라도 매달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의혹이 일면, 그리고 그 순간 바깥으로부터 경계가 닥쳐 와 안으로부터의 경계와 딱 마주치면 백발백중 물러서고야 맙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는 원력과 사명감이 필요합니다. 의혹이 일 때 물러날 생각을 냈다가도 ‘이러면 안 되지, 내가 소임을 맡았는데 이렇게 물러서면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준다’는 생각을 하면 함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됩니다. 부모가 되면 내 기분 내키는 대로 살지 못함과 같습니다. 아이들이 보고 기대하고 의지하고 있는데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원력-사명감 늘 가슴에 새겨야

사명감을 갖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아는 것과도 같습니다. 자기 분수를 안다는 뜻이지요. 자기 분수를 알면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내 맘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체 중생은 실유불성이라,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고 있는 본래 부처라고 했습니다. 다만 내가 본래 부처인줄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니, 자신을 안다는 것은 내가 바로 본래 부처인 것을 아는 것과도 같습니다. 내가 부모라는 것을 알면 부모노릇을 하듯 내가 본래 부처라는 것을 알면 부처 노릇을 하게 됩니다. 선에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자각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을 확연히 알게 되면 확연히 그렇게 살게 됩니다. 참아야 할 것도 없고 억지로 할 것도 없습니다. 확연히 그 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말하는 것 행하는 것이 부처답고 법에 맞는 것이지요.

부처님께서 중생에게 베푸신 가장 큰 은혜가 바로 ‘네가 본래 부처’라는 말씀을 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이 중생에게 베푸신 은혜 중에 가장 큰 은혜이며 내 한 목숨 살려 주신 것보다 더 큰 은혜입니다. 한 목숨이라는 것은 끝없이 반복되는 생 가운데 한 목숨이니 티끌만도 못하지만, 내가 부처임을 가르쳐 주신 것은 세세생생 나를 건져주신 은혜이니 그야말로 최고의 자비인 것입니다. 일체 중생이 불성을 갖고 있다는 선언을 우리가 듣지 못했다면 수행이라는 것이 당초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셨으니까 생각이라도 하고 실천 해볼 수 있는 의지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옛 스님들은 “부처님의 은혜는 내가 만 번을 죽어도 갚을 수 없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수행하고 자신이 부처임을 아는 삶입니까?”라고 질문을 하십니다. 여러분은 상대방을 부처님 보는 마음으로 대하십시오. 누구를 만나든 부처님을 대하듯 베풀고 공경하며 하심을 실천하는 것이 수행하는 마음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던 합장하고 공경하며 긍정적인 마음으로 대하십시오. “네” 라고 대답해놓고 그렇게 대답한 자신을 내면 깊이 관해보십시오. 그러면 공부가 저절로 돌아가게 됩니다. 여러분의 일거수일투족이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열심히 하겠다고 애쓰면 탐심이 됩니다.

‘용맹정진’이라 고 선언하면 그 순간 벌써 탐심이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기니 용맹정진하겠다고 결심하겠지만 부족하다는 그 생각이 이미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바로 탐심이 생깁니다. 내가 부족하지 않다고 자각하는 순간 탐심은 사라지게 됩니다. 내가 이미 구족해 있음을 자각하면 탐심은 저절로 쓰러집니다. 탐심을 버리려고 애쓰는 것은 어둠이 왔는데 어둠을 물리치려고 손짓하는 것과 같습니다. 스스로 밝은 빛을 드러내면 어둠은 저절로 사라지듯 내가 부족하지 않음을 스스로 아는 순간 탐심은 저절로 없어지기 마련입니다. 공부가 왜 안 되는가 고민하고 짜증나는 경우가 많지요. 하소연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럴 때면 “왜 공부가 안되는가 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그것을 내려놓는 순간 그 마음은 사라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공부 잘한다고 자랑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어리석음입니다. 공부는 꾸준히 하되 함이 없이 하는 것입니다.

절에 많이 다니시는 보살님들도 ‘불교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면 답을 잘 못하는 것은 불법에는 가는 길이 너무 많아서입니다. 길이 너무 많으니 길속에 들어가 길을 잃어버린 형국이지요. 불교는 진리 그 자체입니다. 혹 불교라는 이름을 갖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법다우면 불교입니다.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기업가이자 자선사업가인 워런버핏은 살기를 보살 같이 살지요. 그 사람은 불교라는 이름을 생각조차 하지 않겠지만 그 사람이 법에 맞게 산다면 그 사람은 이미 불교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맞아 떨어진다면 그것은 이미 불교입니다.

꾸준히 하되 함없이 하는게 공부

그런데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름을 갖고 싸웁니다.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싸우고, 이슬람이라는 이름으로 싸우고. 그것이 바로 이름에 집착하는 것이지요. 진리는 이름 이전입니다. 이름은 방편이지 이름이 그 자체는 아니지요. 나에게도 이름이 있지만 그 이름이 나는 아니지요. 불교는 바로 이 참 나를 찾도록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기분 나쁠 때 기분 나쁜 것을 맛보고, 기본 좋을 때 기분 좋은 것을 맛보고, 가난할 때 가난을 맛보고, 부자일 때 부자인 것을 맛보는 그 놈은 누구입니까. 그 일만 가지 맛을 보고 가는 그 놈이 있지요. 그런데 중생심은 기분 나쁜 것이 나이고, 기분 좋은 것이 나이고, 가난한 것이 나이고, 부자인 것이 나인 줄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이 가지가지를 맛보는 놈이 바로 여러분의 본래 면목입니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 ‘깨달았다’ 하는 것입니다. 공부하시는 여러분은 이러한 가르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꾸준히 하되 함이 없이 공부하여 모두 같이 성불하시기 바랍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이 법문은 4월 6일 서울 쌍문동 공생선원에서 열린 초하루 법회서 선원장 무각 스님이 대중에게 설한 법문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무각 스님


오대산 월정사 문중으로 출가해 혜거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 등지에서 5년간 주지 소임을 맡아 포교에 진력했다. 2000년부터 조계사에서 참선반 지도법사로 활동하며 서울 도심에 참선 바람을 일으켰다. 2002년 9월 공생선원을 개원해 재가 불자들의 선수행을 지도하고 있다. 현재 공생선원 선원장, 불광사 선원장을 겸해 재가불자들의 수행을 지도하며 숨 막히는 도심에 한 줄기 청량한 참선의 향훈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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