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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불교사] 46. ‘정화운동’의 전개

기자명 법보신문

이승만, 8회에 걸친 담화로 유혈사태 조장

“대처승은 모두 친일파” 일방적 매도로 토론 통한 합리적 해결 무산
1955년 승려대회 기점 비구승 종권 장악…지리한 법정 공방 이어져

1954년 9월 27일 선학원에서 개최된 전국비구승대회. 이날 비구승 중심의 교단을 지향하는 종헌을 제정하여 선포하였다. 사진제공=민족사

‘정화운동’은 그 성패 여부를 떠나서 일제시대 정법을 수호하고 계율을 지키고자 하였던 비구승들이 해방 이후 한국 불교의 정통성 회복을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비구승들은 해방 이후 자체적으로 정법을 수호하고 정통성을 천명하기 위한 노력을 진행하고 있었다.

백양사를 중심으로 한 고불총림 결성과 봉암사를 거점으로 한 봉암사결사 등은 그 좋은 예이다. 그런데 ‘정화운동’의 발발은 역설적이게도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담화에 의해 촉발된다.

1954년 11월 4일 서울신문에 실린 ‘왜색종교관을 버리라’는 이승만의 제2차 담화문.

이승만이 1954년 5월 20일 ‘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나라’는 담화를 필두로 1955년 12월 8일까지 모두 8차례의 담화를 발표하여 불교계를 유혈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1차 담화의 요지는 이렇다. ‘일본은 불교를 한국에서 배워갔지만 한국 불교의 풍속과는 맞지 않는 결혼하고 고기 먹는 풍속을 전파하여 우리의 고상한 불도를 말살시켰다. 일본 불교를 모방한 승려들은 친일파이니 사찰에서 물러나라’는 것이다.

이승만은 대처승은 모두 친일파라고 몰아붙였지만 이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우리는 일제시대 불교계의 대표적인 항일승려를 들라면 한용운을 지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는 승려들도 결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실제로 결혼을 하여 딸을 두기도 하였다. 대통령으로서 보다 적절하고, 신중한 논거를 제시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

이 담화가 발표되자 비구승 측은 1954년 6월 24일과 25일 불교정화추진발기회와 교단정화운동추진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8월 24일과 25일에는 전국 비구승대표자대회를 개최하여 정화추진위원 및 대책위원을 선정하였다. 이어서 비구측은 9월 27일부터 29일까지 선학원에서 비구승대회를 열고 기존의 기구와 종헌을 부정하고 새롭게 조계종헌을 제정하고 결의사항을 채택하였다. 결의 사항의 주요 내용은 ‘대처승은 승적에서 제거할 것’, ‘대처승은 호법중으로 할 것’, ‘교권은 비구승에게 환원할 것’ 등이었다. 비구승들의 이러한 결의에 대해 대처승들은 종래의 입장에서 많이 양보하여 삼보 사찰인 통도사·해인사·송광사를 비구승에게 수도장으로 제공하며, 불교 발전을 위해 분종할 것을 천명하였지만 호법중이 될 수는 없다고 하였다.

대처측의 이러한 양보에 만족하지 않고 비구승 대표로 이청담·하동산·윤월하 등은 1954년 10월 11일 경무대를 방문하여 이승만에게 불교정화를 위한 강력한 담화를 다시 내려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러한 요청을 받은 이승만은 11월 4일자로 ‘왜색종교관 버리라’는 요지의 담화를 발표한다. 이승만의 제2차 담화에 힘입어 비구측은 대처측과의 물리적인 충돌을 감행하였다.

이 담화가 발표된 지 15일만에 이승만은 또 다시 담화를 발표하였다. 거듭되는 대통령의 담화 발표에 힘입어 비구승들은 대처승들로부터 사찰을 회수하기 위하여 유혈사태를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이승만 정권은 정화운동 초기 불교계에서 발생한 사태에 대해 적극적으로 중재를 하거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수수방관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불교의 전통을 회복하고자 하는 승려들은 모두 궐기하라는 부분에서는 유혈사태를 조장하는 느낌을 주고 있다. 이승만은 유혈사태가 확산되는 것을 보면서 국무회의 석상에서 “불교를 믿으려면 똑똑히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실수를 범한다. 국가 원수의 이러한 말은 불교계를 무지몽매한 집단으로 폄훼하는 적절치 못한 발언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거듭되는 이승만의 담화에 힘입은 비구승들은 1954년 12월 10일부터 13일까지 400여명이 조계사에서 전국 비구·비구니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들은 대회를 마치고 눈이 내리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종로와 을지로를 지나 광화문을 거쳐 경무대로 향하는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경무대로 가서 대통령을 면담할 예정이었으니 경찰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5명의 대표가 비서실로 들어가서 대처승의 비행을 호소하고, 비서관으로부터 조속한 시일 내에 해결책을 강구하겠다는 답변을 듣고 해산하였다.

정부는 비구·대처 양측의 입장을 조율하기 위해서 1955년 2월 4일 문교부 장관실에서 비구측의 이효봉·이청담·박인곡·윤월하·손경산 등과 대처측의 권상로·임석진·송병영·김상호·이화응 등이 만나 사찰정화수습대책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승려자격 8대 원칙이 합의하였다. 8개 조항은 ① 독신자 ② 삭발염의자 ③ 불구가 아닌 자 ④ 백치가 아닌 자 ⑤ 3인 이상의 단체 생활을 하는 자 ⑥ 살(殺)·도(盜)·음(淫)·망(妄)의 4대 범계(犯戒)를 하지 않는 자 ⑦ 술과 담배·고기를 먹지 않는 자 ⑧ 20세 이상인 자 등이었다. 내무부는 조사 결과 이상의 자격 조건에 해당하는 승려의 숫자는 1,189명이라고 발표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대처승들은 승려의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서 2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살아온 부인과 이혼을 하는가 하면 모 거찰에서는 160여명의 승려가 집단 이혼을 하여 언론에 보도되는 웃지 못할 사태가 발생하였다.

비구측은 8대 원칙에 합당한 승려들로 전국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그 결의사항에 따른다면 ‘정화운동’이 순조롭게 마무리 될 것으로 전망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55년 7월 11일 문교부가 중심이 되어 비구·대처 각각 5명으로 사찰정화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7월 15일에 태고사(현 조계사) 법당에서 개최된 제3차 회의에서 5:3으로 전국 승려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표결의 결과는 대처측의 3명이 표결 직전에 자리를 떠남으로 인하여 기권 처리가 된 것으로 후일 대처측에서는 표결의 원천 무효를 주장하였다. 아무튼 개표 결과에 따라 비구측은 8월 1일부터 승려대회를 개최하였다. 당국은 대회 첫날은 진행을 저지하였으나 이튿날부터는 진행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 결과 승려대회에서는 중요한 현안 문제들을 결정하였지만 이 대회는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승려대회가 끝난 다음날 이승만은 ‘왜색승려는 물러가라’는 제7차 담화를 발표하여 비구승들의 승려대회에 힘을 실어 주었다. 사찰정화대책위원회는 모두 5차례의 회의를 가졌는데 중요한 것은 8월 11일 오후 3시 체신청 별관에서 개최된 제5차 회의이다. 이 회의는 후일 법정에서 승려대회의 합법성을 가늠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회의에서 의장인 이청담은 대처측이 지난번에 개최된 전국 승려대회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정화’를 마무리하기 위해 전국 승려대회를 다시 개최할 것을 의제로 상정하여 7:1로 가결시켰다. 이 결정이 내려지는 현장에 당시 문교부장관이었던 이선근이 입회하여 정부 당국의 입장을 확인해 주었다. 이 회의의 결과에 따라 8월 12일부터 13일에 걸쳐 개최된 승려대회에서는 종헌 제정, 종회의원 선출, 신임 주지 임명, 신집행부 선출 등을 단행하여 정화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불교계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국회에서는 대통령의 헌법 위반 사실을 문제 삼고 나섰다. 국회 본회의에서는 1955년 6월 15일 오전 이선근 문교부장관과 김형근 내무부 장관을 출석시키고 대정부 질문에 나섰다.

문종두 의원은 “지난 5월 9일자로 발표한 양장관 공동성명의 시달사항에는 주지의 인허권을 문교부장관이 가진다고 하였고 관제인 불교정화대책위원회를 구성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종교 및 신교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 제 12조를 유린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영희 의원은 “불교내의 분쟁에 대해서 행정당국이 불법적이고 편파적으로 간섭하고 있다고 보는데 어떠한가”라고 질문하였다. 한희석 의원은 “장관은 대통령 유시만 있으면 아무 비판도 없이 그대로 따라가는 기계적인 존재인가. 이는 위헌 처사에 대한 비난을 대통령에게 돌리려는 것이 아니냐”라고 날카롭게 질문하였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이선근 문교부장관의 답변 요지는 “대통령의 유시는 한국불교의 전통을 살려서 사찰이 그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정화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언론은 비구승 측에 호의적이면서도 국회에서 대통령의 위헌 처사가 문제가 되자 행정부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1955년 8월 승려대회를 기점으로 비구·대처승의 갈등은 종권을 비롯한 전국 각 사찰의 운영권이 비구 측으로 넘어가는 유리한 국면으로 전환된다. 이로써 ‘정화운동’은 일단락을 맺게 되고 이후에는 지루한 법정 공방으로 이어진다. ‘정화운동’은 이렇게 해서 험한 고비를 넘기지만 체계적인 교학과 계율 등을 수학하여 품격을 갖춘 비구승들의 수적 열세로 말미암아 거리의 깡패 집단을 동원하여 피를 흘리면서 진행되었다. 그 후 조계종단은 ‘정화운동’의 선봉에 섰던 승려들을 ‘정화’시키는 데 골몰하지만 그 고심은 아직까지 끝나지 않은 것 같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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