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원 스님의 기억으로 남은 스님]
[성원 스님의 기억으로 남은 스님]
  • 법보신문
  • 승인 2008.04.28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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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나라에 사는 오산 스님

험난한 인도 배낭여행 미소-여유로 함께한 도반
철저한 지계-성찰…거처 없어도 은사 극진 시봉

“부처님 나라 오산입니다.”
언제나 스님께 전화를 걸면 이렇게 받는다. 처음에는 전화를 걸었던 자신이 좀 어색하게 느껴져 “그 ‘부처님 나라’ 소리는 좀 빼면 좋겠다”고 말도 하지만 황소고집이라는 걸 잘 알기에 그냥 두기로 했다. 그런데 사람의 느낌은 참 묘하다. 처음에는 그토록 어색하던 것이 이제는 친근히 들리니 말이다.

부처님 나라에 사는 오산 스님을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 첫 만남은 기억에도 없다. 마치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나도 모르게 내게 스며들어와 이제는 나의 가장 소중한 도반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언제나 여유 만만한 모습은 아마 여러 전생의 수행으로 길러졌을 것만 같다.

인도는 배낭여행하기에 참으로 흥미롭기도 하지만 힘들기도 한 나라다. 많은 사람들이 애기하기를 3명이 함께 출국하면 3명이 따로 귀국하고, 5명이 팀을 짜서 떠나면 5명이 각각 귀국한다고 한다. 그만큼 여행 중에는 갈림길이 많아서 선택해야 할 일들이 많다. 그러다보니 어지간히 친한 사이라도 귀국까지 함께 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오산 스님과 동안거 한 철 동안 인도 배낭여행을 함께 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손잡고 귀국했다.

처음 인도에 도착했을 때 우리가 한국에서 가져간 먹을거리라고는 껌 1통 뿐이었다. 철저히 현지에서 조달하며 해결하자는 생각이었는데 역경도 많았다. 음식에 대해서는 ‘배가 고프면 뭐라도 먹겠지’하고 출발 했는데 정말 배가 고프다보니 파리 떼 우글대는 길거리 자판음식도 서로 다투듯이 맛나게 먹기도 했다.

오직 불교와 관련 있는 곳이라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마다 않고 찾아다녔다. 엄청나게 힘든 여정이었다. 인도 현지인을 방불케 하는 장면도 한둘이 아니었다. 붓다가야에서 영축산으로 갈 때였다. 조그만 차에 5,60명은 족히 타야만 했다. 매달리고 지붕에 타고 정말 생사를 건 탑승이었다. 나도 모르게 정신없이 비집고 들어가서 보니 오산 스님은 유유자적 다른 현지인을 먼저 밀어 넣어 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못 탈지도 모른다고 고함을 쳐도 막무가내였다. 죽림정사에 도착했을 때 ‘왜 그렇게 고집피우냐’고 해도 그저 나를 보고 빙긋 웃을 뿐이었다. 생각해보니 발버둥친 나나 여유를 부린 오산 스님이나 목적지에 도착하기는 마찬가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오산 스님은 지금까지 내가 봐온 스님들 중에 정말 율사라고 이름 할 만한 도반이다. 해인사 율원을 마치고, 무언가 아쉬워 또 송광사 율원을 졸업했다. 스스로 철저히 계율을 배웠고, 지키면서도 결코 계를 지키는 문제로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지 않으니 말이다. 항상 자신의 거취와 행동거지를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위의를 갖추고 행동할 뿐만 아니라, 말도 항상 위엄 있게 한다. 늘 해맑은 미소로 신도들을 대하고, 항상 누군가를 위해 도움이 되고자 생각을 가다듬는다. 정말 한국 스님의 표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자기 성찰에 철저하고 욕심 없는 스님은 마땅한 거처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은사이신 무진장 큰스님께서도 평생 조계사 작은 방에서 줄지도 넘치지도 않는 삶을 사셨듯이 스님도 항상 소욕으로 만족함을 아는 삶을 사는 모습은 사부님을 따르고 배운 것 같다.

요즘 소식을 들으니 은사스님 곁에서 지극히 병간호를 한다고 한다. 예전에 부처님도 병든 비구를 직접 간호 했듯이, 오산 스님의 간호를 받는 스님은 참으로 편안하실 것이라 생각된다. 참으로 승려다운 스님이 그리울 때면 혼자 ‘부처님 나라 오산스님’을 생각하곤 한다. 언제나 배우고 싶고 따르고 싶은 도반은 고독한 출가의 길에서 크나큰 위안이 된다.

제주 약천사 부주지 성원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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