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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령의 여운깊은 책 읽기]늙은 홀어머니를 위하여

기자명 법보신문

늙은 홀어머니를 위하여

『구운몽』

김만중 지음 / 을유문화사

책읽기 모임 도반들과 4월 한 달 동안 구운몽을 읽었습니다. 이 책을 선정한 이유는 불교의 세계를 담고 있으면서도 재미있고 고전의 향취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웬걸요. 책의 주인공인 양소유는 문무를 겸비하였고 신수까지 훤합니다. 또한 차례로 등장하는 여덟 명의 미녀들은 너나없이 버드나무 같은 몸매에다 앵두 같은 입술, 꽃향기 넘치는 목소리에 역시 재능을 완비하였습니다. 이 여인들이 하나같이 양소유만을 그리워하니 어느 사내가 감히 맞장을 뜨겠습니까? 게다가 장원급제까지 한 뒤에 사방의 오랑캐를 물리치는 혁혁한 공을 세우고 결국 천자의 사위되는 영광을 얻는데 천자의 대궐에서 세 여인과 동시에 혼례를 올리니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이보다 더한 광영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책읽기 모임 도반들에게서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거지요. 나 역시도 너무 현실감 없는 이야기에 싫증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천하의 바람둥이 양서방 이야기를 읽어 가는데 옆에서 이따금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언제나 내 옆자리를 지켜주시는 80세 넘으신 노보살님의 웃음소리였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라는 표정을 짓는데 반해 이 분은 연신 깔깔대며 ‘양서방, 정말 너무 하지?’라며 즐거워하시는 겁니다. 겨우내 심한 감기를 앓으신 때문인지 작년에 비해 책 읽는 음성이 많이 약해지신 그 분은 두 시간 동안 구운몽을 읽고 나면 두 볼에 발그레 홍조가 돕니다.

이 소설은 조선시대 서포 김만중이 홀로 남은 어머니를 위해 유배지에서 썼다지요. 일찍이 남편을 떠나보내고 두 아들의 교육과 출세를 위해서만 살아온 그의 어머니, 하지만 그토록 바라던 권세의 정점에 서기 무섭게 아들은 유배지로 내던져졌고 고향집에 홀로 남아 외롭고 지난한 말년을 보내셨을 그의 어머니. 유배지에 갇힌 자식은 그런 어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서포는 잠 못 이루는 어머니의 침소를 찾아 재미있는 이야기책을 읽어드리고픈 심정으로 이 글을 썼을 것입니다. 허구의 이야기나마 신명나게 풀어내서 어머니로 하여금 여덟 미녀와 더불어 청춘의 한 때를 구가하게 하고, 죄인의 몸이 되어버린 아들을 거침없이 승승장구하는 양소유라 착각하시며 잠시나마 한바탕 유쾌하게 웃으시게 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극진한 위로였을지도 모릅니다.

어머니가 추구해온 세속의 목표를 소설에서나마 다 이루어지게 해드리고, 혹시라도 소설을 읽고 난 뒤에 현실의 삶을 서러워할까봐 만년에는 불도에 귀의하여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초연한 양소유의 삶을 보여주면서 아들의 처지에 더 이상 서러워마십사고 늙은 홀어머니의 서글픔을 어루만져주는 서포의 마음이 잔잔하게 전해왔습니다.

“아유, 재미있다.”라며 살짝 달뜬 표정으로 구운몽을 덮는 노보살님의 모습을 보자니 그의 효심이 300년을 이어오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이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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