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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 명강의] 티베트 고승 빨덴다빠 스님 〈하〉

기자명 법보신문

공〈空〉 체득해야 윤회 벗을 수 있다

가족, 친척, 친구가 행복을 주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깊이 생각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미친 사람들 속에서 혼자 제 정신을 갖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가족, 친척, 친구들을 피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들에 대해 집착할 경우 고통이 뒤따르니 집착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재산, 돈, 재물 모두 행복의 원인이 아니라 독약과 같이 나를 해치는 것들입니다. 모두 무상하니 집착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몸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금만 상처가 나도 너무나 아프듯이, 몸 역시 행복이 아니라 고통의 원인입니다.

요약해서 말하면, ‘나쁜 임금’과 ‘나쁜 법’으로 감옥에 갇히듯이 번뇌 때문에 우리는 업보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은 번뇌와 업 때문입니다. 번뇌가 없으면, 업을 짓지 않고, 고통도 받지 않습니다. 번뇌는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잘못된 마음입니다. 여러 가지 번뇌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이 바로 무명(無明)입니다. ‘무명’은 ‘공성(空性)’과 상반됩니다. 공성을 제대로 알면 무명은 사라집니다.

탐, 진, 치 등과 같은 번뇌는 종류가 아주 많습니다. 거친 번뇌에서, 미세한 번뇌, 또 아주 미세한 번뇌까지 여러 가지 번뇌들이 있는데, 아주 미세한 번뇌까지 없애려면 공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탐욕과 같은 거친 번뇌가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는 부정관(不淨觀)을 가르치셨습니다.

부정관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자기 몸에 집착하지만 『입보리행론』에서 적천보살께서 말씀하셨듯이 몸속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몸이 깨끗하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관상을 할 때에는 그 이유를 생각해야 하는데, 예를 들면 풍선 안에 대소변을 가득 부어 넣은 것과 같고, 더러운 것을 가득 담은 바가지와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관찰을 하면 자신의 몸에 대한 집착이 줄어듭니다. 또, 분노의 독은 자비관(慈悲觀)으로 치료합니다.

이와 같은 관상법으로 거친 집착에서는 벗어날 수 있지만, ‘내가 있다는 생각’인 아집(我執)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합니다. 예를 들어 몸이 아플 때 진통제로 잠시 아픔이 완화되긴 하지만, 병의 근원을 완전히 없애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집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는 공성에 대한 이해가 중요합니다.

쫑카바 대사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가르침을 베푸신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연기(緣起)와 공성이 하나라고 하신 것이 최고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연기와 공성을 하나라고 생각하면서 부처님께 귀의해야 한다.”

무명의 상대 개념은 공성
부처나 아라한이 되기 위해 도(道)를 닦는 과정은 다섯 단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자량도(資糧道), 가행도(加行道),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의 다섯입니다. 그리고 성문, 연각, 대승의 3승 각각에 이런 다섯 단계의 수행도가 있기에 합산하여 총 15가지 수행도가 있습니다.

성문, 연각, 대승의 3승 각각의 보리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진심으로 일어나고, 공성에 대해 문(聞), 사(思), 수(修) 하고자 하는 마음이 처음으로 일어나는 것이 자량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량도를 닦기 전에 먼저 출리심(出離心)을 얻어야 합니다.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출리심입니다. 출리심이 없으면 3승의 자량은 결코 얻어지지 않습니다. 부산에서 서울로 갈 때 버스나 기차나 비행기를 타고 가듯이, 성문, 연각, 대승의 자량도는 다릅니다. 대승의 자량도를 얻은 분은 일체 중생을 돕겠다는 마음에서 진심으로 성불하고자 합니다.

자량도에서 가행도로 넘어갈 때 대승은 물론이고 성문 연각 모두 무아의 견해를 닦아야 합니다. 3승 간에 견해의 차이는 없습니다. 공성에 대해 지관쌍운(止觀?運)하는 것이 가행도인데 지(止), 즉 사마타 수행까지는 모두 대승의 자량도일 뿐입니다. 비파사나[觀] 수행이 있어야 가행도가 됩니다.

공성에 대해 듣고(聞), 생각하고(思), 닦아야(修) 합니다. 문(聞)이란 스승에게 듣고서 대강 이해한 단계입니다. 문, 사, 수를 통해 눈으로 보듯이 공성을 보게 되는데 이를 견도라고 합니다. 견도(見道) 역시 성문의 견도, 연각의 견도, 대승의 견도가 다릅니다. 대승의 견도란 대승의 가르침에 토대를 두고 공성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견도까지 얻은 분들은 아집에서 자유롭습니다.

견도 이후에 수도는 아홉 단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남은 미세한 번뇌까지 없애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런 아홉 가지 수도를 다 닦으면 마지막의 무학도(無學道)를 얻게 됩니다. 무학도 역시 삼승이 각각 다릅니다. 성문의 무학도를 이루면 성문의 아라한이 되고, 연각의 무학도를 이루면 연각의 아라한이 되며, 대승의 무학도를 이루면 ‘대승의 아라한’인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사성제와 수행이 불교의 핵심인데 『중론』 제24장에서 논적은 모든 것이 공하다면 이상에서 설명한 사성제와 수행론 등등이 모두 모두 파괴된다고 공성의 가르침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이런 공격에 대해 용수보살께서는 “공성을 가르치는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해 그런 의문을 내는 것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논적은 공성을 ‘아예 없음’으로 착각하기에 그런 의문을 던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공성을 제대로 알면 삼보, 인과, 사성제 등을 다 받아들이게 됩니다.

공성에 대해 바르게 이해할 경우 큰 이익이 있지만, 옳지 못하게 이해하면 잘못 잡은 뱀이나, 잘못된 주술의 비유에서 보듯이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중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공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어리석은 자는 자신을 해친다. 잘못 잡은 뱀이나 잘못된 주술과 같이.”(M.K. 24-11) 밀교의 주술 중에 칼을 이용하여 신통력을 얻는 방법이 있습니다.

공성 오해하면 오히려 독
칼이 움직일 때 제대로 잡으면 신통을 얻을 수 있지만 잘못 잡으면 자신을 해칩니다. 독사나 신통력의 칼을 조심스럽게 잡아야 하듯이, 우리는 공성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자신을 해칩니다. 그런데 쫑카바 대사의 경우 이 게송을 독특하게 해석하셨습니다. 뱀과 주술을 이어지게 번역을 하여 ‘뱀을 잡을 때 외우는 주술로 해석하셨습니다.

이상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선정(禪定)을 통해 공을 닦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정을 통해 공을 닦지 못하면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쫑카바 대사의 기도문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이 공에 대해 사유할 때, 여러 가지 불전들을 참조하여 닦게 하소서.”라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공에 대해 들음으로써 대강 이해해야 하고, 다음에는 네 가지 논리에 바탕을 두고서 공에 대해 사유해야 하고, 최종적으로 고요한 곳에 앉아서 공에 대해 닦아야 합니다.

인도에서도 자립논증적 중관파나 유식학파등의 스승들은 용수보살께서 가르치신 공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분들은 타파해야 할 것의 궁극을 알지 못했기에 자기 나름대로의 논리를 만들어 공성을 규명하고자 했습니다.

자립논증파의 경우 오온(五蘊) 가운데 ‘식온(識蘊)’을 나라고 보았던 반면, 귀류논증파에서는 그런 ‘식온’ 역시 나의 일부분일 뿐 진정한 나는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자립논증적 중관파나 유식학파 등 하위의 학파에서 ‘식온’을 ‘자아’라고 생각한 이유는 풀이나 나무에는 식온이 없기에 무정물이듯이 ‘식온’의 유무에 따라 유정물과 무정물이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이 죽을 때 식온이 떠나가면 시체가 되고, 아직 식온이 붙어 있으면 살아있는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자립논증적 중관파 이하의 학파에서 ‘식온’을 자아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귀류논증적 중관파에서는 궁극적으로 볼 때 ‘식온’은 나의 일부분일 뿐이라고 비판합니다. 오온 전체를 나라고 보아야지 일부를 나라고 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귀류논증파에서는 ‘나의 마음’이라고 할 때 ‘나’와 ‘마음(識?)’을 따로 구분하고 있기 때문에 식온이 ‘나’일 수는 없다고 논증합니다. 불전에서는 마차의 어느 한 부분이 마차일 수 없다는 비유를 사용하여 이에 대해 설명하기도 합니다.

공성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연기(緣起)를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나, 너, 그’와 같은 말들은 서로 연기관계에 있습니다. 나가 너가 되고 너가 그가 되며 그가 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3층은 2층에 대해서는 위층이지만, 4층에 대해서는 아래층이 됩니다. 동일한 음식이 배고플 때는 맛있게 느껴지지만, 배부를 때에는 맛없게 느껴집니다. 여러 색깔들이 모여서 무지개가 생기듯이 지, 수, 화, 풍, 공, 식이 모여 ‘나’가 생깁니다. 물에 달그림자가 비치는 경우에도 여러 인연이 모여야 합니다. 이상과 같이 연기에 대해 숙고해 봄으로써 공성에 대해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연기를 바탕으로 공을 이해해야 합니다.

공성 알려면 연기 이해해야
연기법에도 거친 것이 있고 미세한 것이 있습니다. 거친 연기법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우리 마음속의 집착이나 분노 등을 줄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화를 내는 것은 상대방을 완전히 나쁜 사람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의 모든 행동을 나쁘게 보기에 크게 화가 나는 것입니다. 만일 연기적 조망으로 그를 보게 되면 어떤 면에서는 그에게 장점이 있다는 점을 알게 되어서 화가 줄어들 수 있습니다.

탐심과 같은 집착이 생기는 것도 그 이유는 상대방을 완전히 예쁘게 보기 때문입니다. 예쁨에 자성이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탐욕 역시 연기적으로 방식으로 허무하게 조망함으로써 줄일 수 있습니다.

제 경험을 하나 예로 들겠습니다. 1984년 인도네시아에 다녀올 때 싱가포르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기다리다가 가게에 있는 깜찍한 소형 칼라 TV를 보고서 사고 싶은 탐욕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친구의 부친께서 “너무 작아서 보이는 게 없다.”고 말씀하는 것을 듣고서 그 TV의 허물을 알게 되어 큰 탐심이 금방 사라졌습니다.

지금까지의 강의를 간추리면 “연기법의 바탕 위에서 공성을 알아야 하고, 공성의 바탕 위에서 연기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연기와 공성이라는 두 가지 조망의 도움으로 우리는 중도를 알게 됩니다.

정리=김성철 동국대 교수 madhyama@chol.com

 

※이 법문은 불교사회문화연구원이 4월 30일 동국대 경주캠퍼스 영산관에서 개최한 특별법회의 법문 내용을 요약 게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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