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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 명강의] 강릉 성원사 회주 주경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매사 긍정하는 마음 파동이 곧 극락”

도(道)라는 것은 다운 것, 답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남자는 남자답고, 여자는 여자답고, 남편은 남편답고 아내는 아내답고, 스님은 스님다운 것, 이렇게 본분사(本分事)를 여의지 않는 것이 도입니다. 그렇다면 불자다운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부처님오신날에 등을 밝힙니다. 왜 등을 밝힙니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등을 켜면 재수가 있고 사업도 잘 되고 복도 받을 거라 생각합니다. 특히 불심(佛心)이 깊다고 하는 부산과 대구의 불자님들 중 마치 부처님을 귀신처럼 생각하고 스님들을 점쟁이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경우를 적지않게 경험했습니다. 절에 와서 남편의 사업이 잘 되고 아들이 좋은 대학 들어가게 해 달라고 빕니다. 마치 무당에게 부탁하듯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그런 것을 비방할 방(謗)자를 써서 방불(謗佛)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부처님은 결코 복이나 나눠주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면 복은 무엇일까요. 또 업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그리고 불자답게 살 때 복이 어떻게 되고 업이 어떻게 될까요.

일체 모든 우주의 본질은 굳어지면 죽어가는 것입니다. 마음도 굳어지면 분열되면서 부스러기가 생깁니다. 마음이 굳어서 생긴 부스러기, 그것은 아지랑이 같고 연기같이 뿌옇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그것을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업(業)이라 말씀 하시고 경전에서는 형진(荊塵)이라 칭했습니다. 범어로는 ‘카르마’며 학자들은 ‘오로라’라고 합니다.

업은 집착할 때, 욕심낼 때, 화낼 때, 허망 된 생각을 할 때, 이렇게 마음이 딱 굳을 때 생깁니다. 촛불이 잘 타다가 바람이 불거나 흔들리면 이쪽으로 갔다 저쪽으로 갔다 하면서 그을음이 나옵니다. 여기있는 이 책상도 몇 백 년이 흐르면 쩍쩍 갈라지고 부서져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집착을 하면 안됩니다. 복을 지어야 한다는 그 생각, 집착 때문에 해탈을 못합니다. 도를 닦아야겠다는 강박증, 그 생각 때문에 성불을 못합니다.

도덕경(道德經)에서 노자는 “유약자(柔弱者)는 생야(生也)하고 견강자(堅强者)는 사야(死也)니라”라고 말했습니다.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을 의미하고, 굳고 단단한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선을 하면서 굳어집니다. ‘이뭣고’ 라는 의심 하나만을 추구하고 수행을 하다 보니, 오래 앉은 사람일수록 더 상이 높아지고 굳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재가불자는 물론 스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면 불교가 쇠퇴합니다.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이 정치를 하기 때문에 경제도 굳는 것입니다. 돈은 행복의 바로미터가 되지 않습니다. 세계적으로 심성이 가장 안 좋은 나라가 우간다이고 우리가 두 번째라고 합니다. 한국은 이혼을 가장 많이 합니다. 왜 이혼을 이렇게 많이 할까요. 마음의 문을 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의 구심점인 남편의 자리가 내팽겨지고 있습니다. 저는 성원사 신도들에게 적어도 남편의 밥상만큼은 따로 차리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이 처음에는 투정을 해도 마음 깊은 아뢰야식, 잠재 의식에서는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존중하시는구나 하고 안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라서 가정을 꾸렸을 때 남편과 아내가 서로 존중하게 됩니다. 이것이 도이고 이것이 법문입니다. 근본적으로 마음의 때를 벗는 것입니다. 불법은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화엄경 현수품에 보면, 믿음은 공덕의 어머니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부처님께 돈 내고 절하는 것입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긍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의 반대가 의심입니다. 의심을 하면 안 됩니다.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은 의심에서 비롯됩니다. 진정한 의미의 ‘이뭣고’는 ‘알 수 없는 이것이 뭘까. 정말 알 수 없구나. 내가 부족하구나.’ 이렇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갈앙회(성원사 신도회의 이름)는 간절한 마음으로 살라고 목마를 갈(渴)자, 우러를 앙(仰)자를 씁니다. 농부가 마른 땅에 비가 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갈앙심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됩니다.

도를 안다는 것은 세수하다 코만지는 것보다 더 쉽습니다. ‘나’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서 긍정해야 됩니다. 생각을 일으킬 때 마다 투명한 비닐을 뒤집어쓴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뒤집어씁니다. 여러분이 십만 겹이나 되는 생각의 비닐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아미타불이 십만 국토를 건너서 나에게 온다는 것은 곧 ‘십선법을 닦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몸으로 살생하는 것, 도둑질하는 것, 음탕한 짓 하는 것, 입으로는 거짓말, 빈소리, 악한말, 지어내서 하는 말, 또 생각으로 하는 탐, 진, 치, 이렇게 10가지를 여의는 십선을 닦아야 그 자리가 극락입니다.

그러면 부처는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하겠습니다. 부처는 무엇일까요. 바로 여기 있는 이 마이크가 부처입니다. 냄새나는 몸뚱아리가 부처입니다. 부처님의 경전에서는 두두물물(頭頭物物)이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모든 물질이 부처님의 종자로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무소부재(無所不在)하고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고 또 안 되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마이크도 하나님이고 이것도, 저것도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목사님은 이것을 모르고 어딘가에 하나님이 있는 줄로만 압니다.

물질을 쪼개면 입자가 됩니다. 그것을 쪼개고 쪼개면 파동 치는 에너지만 남습니다. 그 때 묻지 않는 순수한 에너지가 마음의 부스러기입니다. 마음의 쪼가리가 바로 생명체입니다. 그것이 계속적으로 생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 생명체를 예수는 하나님이라고 하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부처의 근본종자인 불성(佛性)이라 하고, 공자님은 그것을 태극(太極), 증산도는 태을(太乙)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자비스러운 마음, 순수한 에너지, 그 파동 치는 모든 것이 부처로 되어 있습니다. 상대방이 잘하는 것은 칭찬을 하고, 못하는 것은 측은한 마음으로 지혜롭게 해결되기를 기원해 보십시오. 그러면 몸에서는 고진동으로 에너지가 파동을 칩니다. 빛이 납니다. 그것을 자비광명이라고 하는데, 그 밝고 맑은 기운의 광채가 곧 마음의 극락입니다.

염불도 마찬가지입니다. 염불은 생각 염(念)자 부처 불(佛)자입니다. 여러분은 관세음보살, 아미타불을 끊임없이 소리로 부르는 것인 줄 알지만 염불이란 부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도 부처, 남편도 부처, 아내도 부처, 그래서 일체제불의 총 대명사가 아미타불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화신불이고, 법신불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때 묻지 않는 파동 치는 에너지입니다. 말하자면 해탈입니다. 그것을 열반이라고 하고 니르바나라고 하고 성불이라고 합니다. 파동 치는 그것이 곧 성불입니다.

염불이라는 것은 모든 부드럽고 연한 마음을 근본으로 하는 것입니다. 부드러운 마음은 부처 같은 마음입니다. 소리를 내지 않아도 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생각할 때 몸에서 광채가 납니다. 여러분의 극락은 이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염불선(念佛禪)이라고 합니다. 염불선의 근원은 제 2의 석가라고 말하는 용수보살의 보리심론이고, 달마 대사의 관심론이며, 삼조 승찬 대사의 신심명이고, 또 남방 아티샤 스님의 보리도차제론이고, 보리도등론이고, 또 금타 화상의 보리방편문입니다.

화를 내고 욕심을 낼 때 암이 되고 담이 됩니다. 파, 마늘을 많이 먹으면 암이 예방되고 치료된다는 얘기는 헛소리입니다. 파, 마늘 많이 먹으면 혈액이 잘 돈다고 합니다. 그것은 마늘을 즐겨 먹으면 여러분들이 화내고 욕심낼 때 생긴 업에 달라 들기 때문입니다. 능엄경에 나와 있습니다. 달라 들어서 피에 섞이니까 정화되기 위해 피가 빨리 도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소 요구량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뀌어야 됩니다. 생각이 바뀌어야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어야 삶이 바뀝니다. 오늘, 이 순간부터 바꿔야 합니다. 한 생각 바꾸는데 빠르고 느린 오늘이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이 법문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해서 하나라도 실천에 옮긴다고 한다면 지금 이 법회는 더 없이 아름다운 자리로 남을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지난 5월 7일 부산불교신도회관 법계정사에서 열린 봉축특별초청법회에서 강릉 성원사 회주 주경 스님이 ‘바른 불교, 바른 생활’을 주제로 법문한 내용을 요약 게재한 것이다.

주경 스님은

주경 스님은 태안사 청화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고 태안사 정중선원에서의 안거를 시작으로 30여 년간 참선 수행했다. 스님은 강릉 포교당 성원사에 재가불자를 위한 시민선방과 불교교양대학을 개설해 운영 중이며 인도와 중국 라오스, 태국 등에서 사미 스님을 선발해 한국불교의 수행법과 문화를 직접 지도하며 국제포교사로 양성하는 등 불법 홍포에 진력하고 있다. 현재 강릉 성원사 회주를 맡고 있는 스님은 갈앙선원 선원장, 정중선원 선원장, 청화사상연구회 회장, 무주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법무부 교화위원 등을 맡고 있다. 또 지난 3월에는 서울 강남 대치동에 정중선원을 개원, 서울 강남의 중심지에서 불자들에게 염불선을 지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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