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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측, 태고종 창립으로 16년 분규 마침내 종지부

기자명 법보신문

[새로쓰는 근현대 불교사]48. 어색한 화해의 시도, 끝내 분종으로 결별

1967년 2월 6일 중국 음식점 아서원에서 가진 비구·대처측과 정부 관계자들의 화동회합 장면. 사진제공=민족사

비구-대처측 화동위원회 구성해 화해와 협력 시도
1965년 6월 대처측 승소…해빙무드에 결정적 찬물
1967년 대처측 전국 사찰주지 대회 통해 분종 결의
정부 개입된 불완전 정화…“상처뿐인 영광” 평가

‘정화운동’은 힘으로 절을 뺏고, 뺏기는 물리적인 충돌기를 지나 정통성 시비를 가리는 법정 공방기를 거치면서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달았다. 승려들도 세속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따가움을 느꼈고, 승단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비구·대처측 모두가 화해를 위한 대화의 장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1956년부터 있어왔으나 법정 공방이 진행되면서 불신의 벽이 두터워져 성사되지 못하였다.

대화의 장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강압책에 의해 1962년 통합종단이 성립되어 불교재건위원회가 구성되고 나서 비로소 마련되었다. 그러나 곧 이어 구성된 종회의 의석 배분이 비구와 대처측의 비율이 32:18로 정해지자 대처측은 격분하여 통합종단 성립 이전으로 회귀를 선언하고 서대문에 별도의 총무원을 설치하였다. 당시 대처측은 서대문측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양측 모두가 대화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었다.

이러한 공감대는1965년 3월 16일 문교부 회의실에서 윤천주 문교부 장관과 관계관들이 모인 가운데 비구측 손경산·이행원·박서각·이석호, 대처측 신종원·한호응·최태종·이용조 등 8명이 화동단결의 원칙을 세우고 대한불교조계종화동위원회를 탄생시킴으로써 현실화되었다. 화동위원회의 구성원들은 “우리 자신이 지난날의 모든 것을 참회하고 이 뼈저린 체험을 살려 뜻 깊은 역사를 창조하여야 한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어서 4개항의 약정서에 합의하였다.

약정서의 내용은 종조를 도의국사로 하고 태고 보우국사의 제종 포섭을 거쳐 만암 종헌 대종사를 중흥조로 한다는 것과 대승정신에 입각하여 종회와 중앙기관을 개편한다는 것이었다. 이 작업을 위해서 손경산·신종원·이행원·이석호·이용조 5인을 추진위원으로 선임하였다. 화동위원회는 1965년 3월 25일에 개최된 임시 중앙종회에서 종헌과 종법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화동활동을 한다는 것을 전제로 추인을 받았다.

그러나 뿌리 깊은 불신을 불식시키고 화해를 위해 마련된 화동위원회는 불교재산관리법이 시행되면서 위기 상황을 맞게 된다. 이 법은 불교단체의 재산 및 시설의 관리운영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을 규정한 것이다. 주요 내용은 불교단체의 종류 및 문화공보부 등록, 주지 또는 대표자 등록, 단체의 대표권 및 재산관리권 등을 규제하고 있다.

대처승 종단인 태고종이 설립되었음을 전하는 1959년 5월 9일자 중앙일보 보도기사.
문제는 불교단체가 이 법을 위반하거나 분규로 인해 이 법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인정될 때는 문화공보부장관이 재산관리인을 임명 또는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이 포함된 데 있었다. 대처승 측은 이 법의 시행으로 큰 압박을 받았고, 불교재건비상종회의 결의로 성립된 사항이 무효라는 소송을 제기하여 1965년 6월 11일 서울 민사지법으로부터 승소 판결을 받음으로써 사태는 급격하게 냉각된다. 이 소송은 명칭이 ‘종헌 및 종정 추대 무효 확인 소송’인 만큼 1962년에 성립된 통합종단의 종헌을 부정하고, 그 종헌에 따라 추대된 종정은 종단을 대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비구측에서는 고등법원에 항소를 제기하였고, 모처럼 마련된 화해 무드는 깨져 버렸다.

깨져 버린 분위기는 1966년 3월 제12회 조계종 중앙종회에서 화동추진위원인 손경산이 총무원장에 당선되고, 박서각이 재무부장으로 자리하면서 또 다시 활기를 되찾는다. 양측의 입장은 그 해 8월 임시 중앙종회에서 화동추진위원이자 총무부장이었던 이행원의 보고에서 알 수 있다. 그는 이전에 대처승이었지만 지금은 비구승 측으로 들어온 승려를 통하여 대처측과 교섭을 시도하였다.

교섭 내용인 즉 대처측은 전국 본사와 종회의원을 반수로 할애해 준다면 소송을 취하하겠다는 것이었고, 이행원은 종회의원 반을 할당하는 것은 수용하기 어렵지만 종회에 건의는 해 보겠다고 하였다. 그는 소송비용만 없다면 종단의 3대 사업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 법정 소송이 양측에 얼마나 큰 부담이었는지 알 수 있다. 중앙종회에서는 종회의원 23석을 대처측에 할애하는 안을 놓고 갑론을박하다가 표결에 부쳐 찬성 18표, 반대 16표로 가결되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시행되지 못하다가 1967년 2월 6일 아서원이라는 중국집에서 비구·대처승 40여명과 정부의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협정식을 가지고 서명·날인하면서 조금 다른 형태로 진행된다. 협정의 내용은 첫째, 1962년에 제정된 통합종단의 종헌과 종법을 준수하며, 통합종단을 유일한 합법 종단으로 재확인한다. 둘째, 중앙 종회의 의석수는 비구 29 : 대처 21로 한다. 셋째, 전국 23개 본산은 비구측이 15개, 대처측이 8개씩 갖는다. 화동협정서에는 대처승을 종단에 등용하고, 본사의 주지로 발령하는 등 유화적인 내용을 담았다. 이러한 대가로 비구승 측은 전라도 지역의 미등록 사찰 120개의 등록을 완료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대처측은 화동위원회 전면에 나서서 일을 추진하는 승려들을 노력을 인정하지 않았고, 화동위원회 대표 신종원의 대표성마저 부인하고 이 결정을 수용하지 않았다. 대처승 측은 1967년 3월 3일 전국 사찰 주지 및 포교사 대회를 열고 비구승과 대처승의 분립을 선언하고 분종만이 분쟁을 수습하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대처승들은 대통령에게 보내는 건의문에서 전국 2천 63개 사찰 가운데 1천 7백이 대처승의 것이며, 신도들도 비구승의 배에 가까운 25만이라고 하였다. 당시 비구승 측의 신도 수는 15만이라고 한다. 대처측의 이러한 입장을 감지한 비구측 종회도 화동협정을 인준하지 않음으로써 어렵게 이루어진 대화의 장은 어색하게 막을 내렸다.

화동보다는 비구 승단 내의 ‘정화’를 주장하였던 이청담은 1969년 8월 12일자로 조계종 탈종을 선언한다. 그가 언론에 밝힌 탈종 사유는 이러하다. “과거 대처승과 싸울 때는 명분이나 섰지만 정화 이후 비구 승단은 권모술수와 문중파벌, 종권싸움으로 수행 풍토가 무너져 무법천지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화운동’에서 이청담은 그야말로 핵심 인물임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는 정화운동의 주역이면서 총무원장, 통합종단 제2대 종정을 지낸 승려로 종단에서 비중이 큰 승려였다. 그런 그가 승단의 현실이 안타깝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성사시켰던 그 종단에 환멸을 느껴 탈퇴를 선언한 것이다. 이 선언은 ‘정화운동’의 핵심 인물이 이 운동을 실패로 규정하였기 때문에 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사건이 있은 지 일 년 뒤에 다시 총무원장으로 복귀하지만 그의 탈종 선언은 ‘정화운동’의 현주소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결국 대처승 측은 1970년 5월 태고종이라는 종단을 창립하고 비구 승단인 조계종과 결별을 선언함으로써 길고도 험난했던 16년간의 이른바 ‘정화운동’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정화운동’의 원인은 나라가 망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일본이 자행한 동화정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동화정책은 한국인을 일본인화 하려는 정책으로 불교계에는 승려가 결혼하고, 고기를 먹는 대처식육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불교의 독자성을 상실하게 만들었고, 일제 말기에는 90%가 넘는 승려가 대처승이었다.

계율을 지키면서 수행에 힘쓰고, 중생을 제도 하려는 비구승들은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하였고, 해방이 되고 나서도 교단의 주도권은 여전히 대처승에게 있었다. 비구승들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수행 풍토를 확립하는 방안으로 교단의 정화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은 독실한 감리교 신자로서 불교를 잘 이해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미 불교계에서 진행되고 있던 정화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바뀐 방향은 자비와 관용을 중시하고, 기다림을 미덕으로 여기는 불교적인 것이 아닌 폭력과 법정 시비로 얼룩진 반불교적인 것이었다. 한국 현대 불교사에서 ‘정화운동’은 그야말로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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