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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만다라]22. 즐거운 곳에 머물려면

기자명 법보신문

어질고 착한이들 모여 사는 곳이 곧 극락

마을이나 숲이나
골짜기나 평지나
깨달음을 얻은 이가 사는 곳이라면
어디이거나 그곳은 즐겁다
 - 『법구경』

『아미타경』에는 극락세계가 잘 묘사되어 있다. 일곱 겹으로 둘러 처져 있는 난간이나 장식 그물망, 가로수 등은 다 여러 가지 보배로 장식되어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다. 또한 칠보로 이루어진 연못에는 여덟 가지 공덕으로 이루어진 물이 넘쳐흐르고 연못과 길 주위는 금은보배로 꾸며져 있다.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연못의 한 가운데는 오색의 커다란 연꽃이 피어서 미묘한 향내음을 항상 방출하고 있다. 공중에서는 천상의 음악이 울려 퍼지고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며 앵무와 공작이 노래하는데, 그 노랫소리는 다 진리를 내용으로 담고 있는 공덕장엄이 가득한 곳이라고 설명한다.

극락세계에는 모든 고통이 자취를 감추고 오직 즐거움만이 가득하기 때문에 극락(極樂)이라는 명칭을 얻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극락에서는 자연의 새소리 바람소리가 그대로 진리를 설하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거룩한 부처님 세계의 음식으로 공양을 하며 환희와 풍요의 극치를 이루는 세계로 경전에 묘사되어 있다.

경전의 말씀대로라면 미국 서부 카멜 해안선 바닷가에 그림처럼 서 있는 호텔방에서 하룻밤 바다를 바라보면서 쉬어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던 것처럼, 극락이라는 아름다운 그곳에 가서 하룻밤 동안이라도 머물다가 오고 싶은 충동을 또한 느끼게 한다. 카멜의 호텔은 돈과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갈 수 있겠지만 극락은 다르다.

 누구나 가보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극락에 가고 싶은 사람들은 이 아름답고 즐거운 극락에 태어나기 위해 참다운 선행공덕(善行功德)을 쌓아야 한다. 또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염송하고 열 가지 착한 일(十善)을 몸소 실천하여 극락에 왕생한 이야기가 실제 경전 속에 기록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선한 공덕 없이 갈수 없는 곳

위의 게송은 ‘깨달음을 얻은 이가 사는 곳은 어디를 막론하고 그곳은 즐거운 곳’이라고 설하고 있다.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세계가 서쪽으로 대단히 먼 거리인 십만억불국토(十萬億佛國土)를 지나서 있다고 한다면, 위의 게송에서 말하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이 사는 즐거운 곳은 방향과 거리도 없이 어느 곳에서나 즐겁다고 한데에 깊은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극락세계 역시 외형적으로는 방향과 거리가 설정이 되고 여러 가지 아름다운 보배로 꾸며진 곳이라고 말하지만, 극락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건은 ‘매우 어질고 착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사는 곳’이라는 데에 위의 게송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고 본다.

『아미타경』중 ‘제상선인 구회일처(諸上善人 俱會一處)’가 바로 그 대목이다. 극락이란 결국 가장 어진 사람들이 어질고 착한 일을 한 결과로 모여서 즐겁게 사는 곳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부처님께서는 나이가 어리고 많고를 떠나서 진정으로 수행하는 참다운 제자를 사랑하고 아끼셨다. 사리뿟다의 막내 동생인 레와따 사미가 어린 나이에 발심 출가하여 거친 숲 속에서 수행에 전념하였고 곧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전한다. 사리뿟다는 여름 안거가 끝나기 전에 동생을 만나러 숲 속에 가는 것을 허락받았고 부처님도 동행하셨다. 그곳을 다녀오신 뒤에 부처님께서는 바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숲이나 들, 골짜기나 평지에 어디에 있던지 동요됨이 없는 마음으로 항상 즐겁다는 말씀을 이 게송으로 술회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며 마치 남을 위해서 사는 것처럼 짜증을 내고 남에게 불쾌감을 던진다. 모든 중생이 생명을 희생한 그 공덕으로 우리들 하루의 삶이 유지된다고 생각하면 오만을 부리기는커녕, 고개를 들기조차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 그 많은 소가 목숨을 잃고, 그 많은 닭과 오리가 희생이 되고서 우리들의 식탁은 채워지는 것이다.

또한 그 많은 들풀과 야채들이 뿌리가 송두리째 뽑히고 가을의 수확에 곡식이 낱알로 알몸을 드러내고 나서야 우리의 먹을거리는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 소와 함께 아파하고 닭과 오리처럼 두려움에 떨고 벌거숭이가 된 곡식의 고통과 부끄러움을 함께 마음으로 느끼신 분이 역사상 유일하게 우리의 스승 부처님이시다. 그래서 불교는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이 동시에 성불(成佛)할 때에 인간의 성불도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자만에 빠진 인간만의 성불은 특별한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유·무정 고통 함께 나눠야

성철선사가 생존해 계실 때 선사를 찾아뵈면 누구에게나 써주시던 글귀 중에 다음의 글귀가 기억에 남는다.

훼욕은 진법문이요 침해는 대불사니(毁辱眞法門 侵害大佛事)
묵묵상 환희하야 일체에 심감사하라(默默常歡喜 一切深感謝)

그 뜻을 음미해 보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참기 어려운 훼손과 모욕을 덮어 쓸 때도 있고, 견디기 어려운 해코지를 당할 때도 있다. 이 모든 일조차도 참다운 법문으로 듣고 큰 불사로 여겨서 묵묵히 항상 환희하여 일체 모든 것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모두가 진리에 눈떠서 원망을 쉬고 환희를 일구어가는 삶이 되기를 기도한다. 그곳이 바로 극락이 되고 환희로운 장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본각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그림=이호신 화백, 수화자문=원심회 김장경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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