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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혜·고봉의 회상에 들다]5. 정자사(淨慈寺)

기자명 법보신문

생사를 걸고 화두 들은 고봉의 발심도량

정자사 대웅보전 전경. 고봉 선사가 3년 안에 깨닫지 못하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각오로 불퇴전의 용맹정진을 한 곳이다.

항저우(杭州)의 아침은 언제나 안개와 함께 시작된다. 지독하리만큼 짙은 안개는 태양이 지평선 위로 올라오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걷히고, 자동차도 그때서야 겨우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2500년 전 인위적으로 만든 세계 최고의 인공 물길 경항대운하(京抗大運河) 때문이다. 경항대운하는 베이징과 항저우를 연결하는 길이 1764㎞의 세계 최장의 수로. 그러나 항저우 곳곳에 연결된 이 물길로 말미암아 시내는 1년 365일 중 300여 일이 안개에 묻힌다.

순례단이 겨우겨우 안개를 헤치며 항저우 시내에 위치한 정자사(淨慈寺)에 도착했다. 정자사는 소동파(蘇東坡)가 지상의 천국이라 노래했던 항저우의 명물 서호(西湖) 남쪽에 위치해 있다. 송대 5산 10찰의 하나인 정자사는 염불선(念佛禪)의 발상지로 오월국 왕 전흥숙이 954년 염불정토(念佛淨土)사상과 선의 일치를 주창한 법안종 제3조 영명 연수(永明延壽ㆍ904~975) 선사를 위해 건립한 도량이다. 정자사는 한국 불교와도 인연이 깊다. 일찍이 고려 광종은 영명 선사의 『종경록』과 『만선동귀집』을 읽고 감동해 당시 중국에서 유학 중인 혜거 스님을 급히 귀국하게 한 뒤 승려 36명을 선발, 영명의 문하에서 법안종풍을 잇게 했다.

 
정자사 경내에 있는 채식전문식당 모습.

그러나 순례단이 정자사를 찾은 것은 이 같은 역사적 사실 때문이 아니라, 『선요(禪要)』를 남긴 고봉 원묘(高峰原妙ㆍ1238~1295) 선사의 법향을 느껴기 위해서다. 간화선의 전통을 가장 집약적이고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선요』는 고려 말 해동으로 전해진 후 승가에서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 불교계에 그대로 이어져 현재 강원에서는 사집반 필수 교과서로 활용하고 있을 정도다. 정자사는 바로 그 고봉 선사가 3년 안에 깨닫지 못하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각오로 불퇴전의 용맹정진을 한 곳이다.

일주문에 들어서자 도량 안을 가득 메운 희뿌연 연기가 코를 찌른다. 평일임에도 제법 많은 향객들이 대웅보전 앞에 놓인 대형 향로에 기다란 향을 한 묶음씩 사루고 있다. 부처님을 향해 합장한 채 정성스레 예를 표하는 중국 불자들의 모습이 자못 진지하다.

고봉 선사의 자취를 찾아 부지런히 대웅보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봉은 남송 건희2년(1238년) 쑤저우(蘇州) 오강현에서 태어났다. 고봉은 스스로 불렀던 이름이고, 사람들은 그를 고불(古佛)이라 칭했다. 그가 태어난 당시는 송나라와 몽고 간 대립으로 크고 작은 전쟁이 연일 계속되는 불안한 시기였다. 어린 시절 고봉은 성격이 느긋하고 무게가 있으며 말과 웃음이 적고, 품행은 우아한 학과 같이 고고했다. 특히 어려서부터 가부좌하기를 좋아했던 그는 스님을 보면 한걸음에 달려가 합장으로 예를 표하곤 했을 정도로 신심이 남달랐다.

 
거지 스님으로 불리는 제공 스님. 이 지역 곳곳에는 스님의 모습이 조각돼 있다.

954년 창건된 염불선 발상지

고봉은 15세 되던 해 교종(敎宗) 사찰인 가화현(嘉禾縣) 밀인사(密印寺)로 출가해 이듬해 법주 스님을 은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밀인사에 머물며 스승으로부터 천태교학을 사사받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 한 편에선 불안감이 커져만 갔다. 공부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교학만으로는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할 수 없다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자유인의 길은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을 주창하는 달마종(達磨宗)의 가르침에 있다는데 생각이 이르렀고, 마침내 18세 되던 해 밀인사를 떠나 제방의 여러 선지식을 찾아 행각(行脚)에 나섰다.

정자사 대웅보전 내부는 다른 사찰과 많은 차이를 보였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앙에 두고 좌우 벽면으로 나한님들이 모셔져 있으며 본존불의 협시(夾侍)에 위치해야 할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은 뒤쪽 벽면에 봉안돼 있다. 또 부처님이 앉은 좌대에도 연꽃 잎사귀마다 각기 다른 수인을 한 부처님 모습이 양각돼 있어 본존불을 중심으로 여러 불보살들을 둥그렇게 배치한 양상이다. 아마도 영산회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구성인 듯싶다.

회색 승복을 입은 중국 스님들이 대웅보전 내부를 정리하고 있다. 고봉 선사도 정자사에서 청색 승복을 벗고 회색 승복으로 갈아입었을 것이다. 중국 불교는 승복의 색깔로 종파를 구분 짓는데 교종(敎宗)은 청색을, 율종(律宗)은 괴색을, 선종(禪宗)은 회색을 입는다. 고봉이 정자사로 들어와 교종에서 선종으로 출가 행로를 바꾼 것은 그의 나이 20세 때의 일이다. 당시 이곳에는 단교 묘륜(斷橋妙倫) 화상이 주석하고 있었는데, 그는 당대 유명한 선장(禪匠) 무준 사범(無準師範) 선사의 법제자였다.

본존불 뒤편에 모셔진 입상이 눈길을 끈다. 중국 사찰은 일반적으로 이 자리에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작달막한 키에 얼굴에는 자글자글한 주름, 모자를 쓰고 부채를 든 모습이 불교보다는 오히려 도교에 가까운 외형이다. 대웅보전 내부를 정리 중인 중국 스님에게 물어보니 제공 스님, 일명 ‘거지 스님’이라고 소개한다.

제공 스님은 명나라 때 실존 인물로 낡은 모자에 찢어진 부채를 들고 마을에 나타나 음식을 얻어먹고 다녀 거지 스님으로 불렸다. 스님은 신통력이 뛰어나 악한 자를 혼내주고, 어려운 자를 도와주는 등 마을에 일어난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출가자 신분으로 술과 고기를 즐기고 율법을 지키지 않아 마을 사람들은 스님을 신뢰하지 않았다.

고봉이 처음으로 화두를 받은 곳

그러던 어느 날 산사태가 일어날 것을 예견한 제공 스님은 마을 사람들에게 피신하라고 일러줬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냥 두면 마을 사람들이 다 죽게 될 판이었다. 마침 마을에 결혼식이 열려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자, 제공 스님은 느닷없이 신부를 안고 마을 밖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스님을 잡기 위해 달려 나갔고, 잠시 후 산사태가 발생해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제공 스님을 존경하며 극진히 대접했다. 때문에 이 지역 곳곳에는 제공 스님의 모습이 조각돼 있다는 것.

대웅보전을 나서자 곧바로 삼성전(三聖殿)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타났다. 삼성전 내부에는 아미타부처님과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허망하게도 정자사에서 볼 수 있는 건 이것이 전부였다. 적지 않은 입장료를 지불하고 들어왔건만 나머지 전각들은 모두 보수공사 중이어서 현재는 볼 수가 없다는 설명이다.

 
일본 조동종을 이끈 도오겐 선사의 스승 여정 선사의 탑묘.

공사를 위해 높게 쳐놓은 가림 막 너머 어딘가에 고봉이 불퇴전의 각오로 삼매에 든 자리가 있다. 단교 화상으로부터 ‘태어날 때에는 어디에서 왔으며 죽어서는 어디로 가느냐(生從何來 死從何去)’라는 화두를 받고 3년 안에 깨치지 못하면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겠다고 발심한 바로 그 자리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왔다가 멀어지는 느낌이다.

간화선의 핵심을 집약적으로 보여준 고봉 선사의 법향을 기대했던 순례단은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요』를 통해 일체 존재가 본래 부처라는 본질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제시함으로써 대립과 갈등을 초월해 일류 공동의 선인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며 너와 내가 어우러져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정신과 방향을 제시해 준 고봉. 선사가 반야(般若)를 향해 3년의 사한(死限)을 정하고 가행정진한 장소를 찾아 발심을 다지고자 했던 순례단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사찰의 행자가 순례단을 향해 달려왔다. 정자사 위쪽에 여정(如淨ㆍ1162-1227) 선사의 묘탑이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큰 실망을 안고 발길을 돌려야만 했던 순례단의 모습이 행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모양이다. 여정 선사는 일본 최대 종파인 조동종을 이끈 도오겐(道元) 선사의 스승으로, 도오겐은 이곳 정자사에서 여정의 법을 이어받았다. 보수 불사가 한창인 공사장을 지나 여정 선사의 묘탑 앞에 섰다. 일본 불교계가 극진히 관리한다는 설명을 대변이라도 하듯 주변에는 만개한 벚꽃 나무가 묘탑 주변을 장식하고 있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분홍빛 꽃잎들이 꽃비가 되어 춤을 추며 어깨 위에 내려앉는다. 마치 순례단의 아쉬움을 위로하려는 듯.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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