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명법문 명강의] 서울대 국제대학원 박세일 교수〈하〉

기자명 법보신문

모든 일 불공드리듯 하면 절로 불국토

‘대한민국의 선진화’는 ‘불교의 선진화’와 반드시 같이 간다고 생각한다. 불교의 선진화 없이 대한민국의 선진화가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21세기 대한민국이 선진화에 성공하려면 국민들 모두가 21세기 선진국민다운 ‘정신적 자본(품격)’ ‘마음의 자본(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선진화가 요구하는 이 21세기적 ‘정신적 자본’ ‘마음의 자본’은 우리 불교가 그 어느 종교나 사상보다도 가장 많이 창출하고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21세기는 불교의 진리성이 가장 잘 발현되는 시대이다. 21세기 이 시대 이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어느 때 발전하고 어느 때 퇴보하는가? 등을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 그대로 움직이고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실천하는 국가나 조직이나 개인은 반드시 크게 성공하고 발전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국가, 조직, 개인은 반드시 퇴보하고 실패하는 시대가 되고 있다.

부처님은 개체의 절대화 경계

대한민국이 앞으로 선진국이 되려면 적어도 아래의 5과제를 풀어야 한다. 그런데 이들 문제의 해결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핵심적 역할과 적극적 기여를 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떠한 과제들이 있고 불교는 어떠한 기여가 가능한가?

첫째, 21세기는 상호의존의 시대이므로 ‘관계성’을 소중히 해야 한다. 21세기는 세계화, 정보화로 인하여 상호의존과 상호작용성이 크게 증대하는 시대이다. 이를 소중히 하는 개인이나 국가는 발전하고 이를 경시하는 개인이나 국가는 퇴보한다. 이제는 앞으로 남과 어떻게 잘 협조하고 남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얼마나 잘 제공하는가가 성공을 결정하는 시대이다.

부처님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너무나 자세히 연기적 세계관을 가르쳐 주셨다. 관계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셨다. 개인이던 국가이던 민족이던 혹은 계급이던 문화이던 ‘개체의 절대화’를 항상 경계하셨다. 개인이던 국가이던 부처님의 연기론(緣起論)을 올바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길이 그대로 21세기 대한민국의 선진화의 길이 될 것이다.

둘째, 21세기는 ‘창조의 세기’이므로 ‘대자유의 마음’을 키워야 한다. 21세기의 발전원리는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아이디어의 창조에서 온다. 21세기 지식정보사회에서는 사실 누가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소위 인터넷(internet)을 통하여 기존의 지식과 정보는 얼마든지 순식간에 장소이동을 한다. 따라서 문제는 누가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생산해 낼 수 있느냐? 신지식과 신정보를 창조해 낼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면 새로운 지식과 정보는 어떻게 창조되는가? 한마디로 자유에서 온다. 창조적이 되려면 ‘외적 속박’과 ‘내적 속박’에서 자유스러워야 한다. 인간은 자기의 기존생각, 고정관념 등의 노예이다. 이를 벗어나야 새로운 시각, 새로운 관점, 새로운 아이디어가 창출될 수 있다.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사과는 익으면 자연히 떨어진다’는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스러웠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간에게 외적 속박은 크지 않다. 문제는 내적 속박이다. 그런데 이러한 내적 속박을 벗어나 인간으로 하여금 항상 창조적이 되라고 수천 년 전부터 가르치신 분이 바로 부처님이시다. 부처님이 항상 강조한 것이 자유와 해탈이다 자유와 해탈이란 무엇인가 기존생각, 고정관념으로 부터의 자유와 해탈이다.

보현보살이 새시대 리더십 표본

셋째, 21세기는 ‘분열갈등의 시대’이므로 ‘중도(中道)와 원융’을 배워야 한다. 21세기는 발전과 더불어 분열과 갈등의 시대이다. 세계화는 발전과 도약의 기회이면서 동시에 민족 간, 계층 간, 문화 간, 종교 간 분열과 갈등도 가져온다. 세계화에 잘 적응하는 그룹과 그렇지 못하는 그룹 간에 경제적 격차가 커지고 그것은 사회적 갈등과 문화적 대립으로 나아가 정치적 안보적 불안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래서 어느 나라가 세계화의 흐름을 타면서도 분열과 갈등의 가능성을 줄이며 공동체적 연대나 가치를 잘 유지 발전시킬 수 있느냐가 대단히 중요한 국가 과제가 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회경제적 분열과 갈등은 쉽게 단순화되면서 ‘사상의 이분법(二分法)’과 ‘사상의 양극화(兩極化)’를 가져올 위험이 크다.

21세기는 세계화의 시대이면서 민주화의 시대이다. 따라서 세계화가 분열과 갈등을 수반한다면 민주화는 이를 보다 쉽게 격발시킬 수 있게 만든다. 따라서 더욱 한 사회의 지도자와 구성원들이 어떻게 통합과 원융의 사상을 가지고 이러한 분열과 갈등의 가능성을 미리 줄여 나갈 수 있는가가 특히 양극화의 위험, 이분법의 위험을 어떻게 미리 줄여 나갈 수 있는가가 대단히 중요해지는 시대이다.

넷째, 21세기는 ‘정체성위기의 시대’이므로 ‘주체성’을 바로 세워야 한다. 우리 대한민국은 이제 새로운 차원에서 새로운 국가정체성과 국민정체성의 창조가 보다 강하게 요구되고 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은 후진국과 중진국의 단계를 지나 이제 선진국의 문턱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려면 지난날의 피해의식과 후진의식(열등의식)을 극복하고 지구촌의 문제해결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세계 공헌국가로서의 새로운 국가정체성을 세워나가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국가정체성을 세워나가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특히 불교의 수은(受恩報恩)사상이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다섯째, 21세기는 ‘리더십위기의 시대’이므로 ‘올바른 지도자’를 키워야 한다. 21세기는 리더십위기의 시대이다. 세계화 정보화시대 선진화에 성공하려면 우리는 뛰어난 많은 지도자를 가져야 한다. 역사는 국민이 만든다. 그러나 역사의 성공은 뛰어난 지도자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따라서 선진화를 위해선 각계각층에서 선공후사하면서 각 분야의 본분을 지키는 지도자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언행일치(言行一致)하고 무실역행(務實力行)하는 지도자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그래서 현재의 ‘불신의 공동체’를 ‘신뢰의 공동체’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어떻게 우리는 새로운 ‘선진화 리더십’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그 답은 불교의 ‘보현(普賢)사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보현보살이야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선진화 리더십의 표본이다. 보현은 거짓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항상 언행일치하고 선공후사한다. 보현은 교만하지 않다. 항상 하심(下心)하고 선청(善聽)하고 존현(尊賢)한다. 보현은 ‘여민동락(與民同樂)한다. 보현은 중생이 다하고 중생계가 다할 때까지 자신이 서원한 것을 반드시 실천한다. 우리 사회 각계각층에 보현의 사상으로 무장한 지도자(보현보살)들이 등장하여 간단없이 자리이타행을 실천하여 나갈 때 분명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에 우뚝 서는 선진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선진화, 대한민국의 국가이상의 추구는 사실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불국토의 건설’을 의미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선진화도 그렇고 불국토의 건설도 그렇고 제도개혁과 의식개혁이 함께 되어야 성공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제도개혁으로는 인간의 마음의 변화를 1/2정도만 이루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도개혁만으로는 부족하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선진화도 법과 제도와 정책만 고쳐서 성공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불교의 선진화를 위하여도 앞에서 교육제도의 개혁과 거버넌스의 개혁을 제시하였지만 이러한 제도개혁만으로 불교 선진화의 완성을 이룰 수 없다.

대한민국의 선진화가 성공하려면 반드시 국민의식이 선진화되어야 하듯이 불교의 선진화는 ‘불자의 마음’이 바뀌어져야 한다. 따라서 불교의 선진화가 완성되려면 앞에서의 제도개혁(교육제도와 거버넌스개혁)과 더불어 반드시 새로운 수행법이 나와 불자들의 마음이 완전하게 개벽되는 의식개혁이 있어야 한다.

노동행선으로 선진화 성공

그러면 21세기 불교의 선진화를 위한 새로운 수행법은 무엇인가? 여기서는 전문 수행스님들의 수행법을 논하려 하는 것은 아니고 일반 재가불자들을 위한 수행법에 국한하여 논하려 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나는 21세기 불국토 건설을 위한 재가불자들의 새로운 수행법은 노동행선(勞動行禪, 勞動念佛 포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노동행선이란 무엇인가? 여성들이 가사노동을 하면서 그리고 남성들이 직장노동을 하면서 학생들이 학교공부를 하면서 자기가 지금 하는 그 노동에 모든 정성과 마음을 다 하는 수행법을 의미한다. 부처님 앞에 최고의 찬탄을 하며 불공을 드리듯이, 지극한 정성으로 자신의 노동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 노동행선이다. 세계적 장인(匠人)이 최고의 예술품을 만들듯이 조금도 매(昧)하지 않고 오직 성성(惺惺, mindfulness)하게 깨어서 자신의 혼을 자신의 작품에 불어 넣듯이 하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으로 우리의 직업노동 가사노동 학교공부를 하는 것이 바로 노동행선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하는 일마다 불공드리듯이 하면 이르는 곳 마다 부처를 본다(事事佛供, 處處佛像)’는 말이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러한 노동행선을 통하여 재가불자들이 성불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결과로 이 땅에 불국토가 완성될 수 있고 대한민국의 선진화가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리=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