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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 명강의] 남양주 봉선사 조실 월운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죽음 앞에서도 신심 변치 않을 이 얼마나 되는가

부처님 좋은 법도 혼자만 즐기다간
세상일 멀어지고 불교는 도태될 것

듣고 배운 법에 자신을 비추어
부끄럼 없도록 실천 노력해야

 여러분 반갑습니다. 여러분이 모두 알고 오셨겠지만 이 법회는 대원정사와 법보신문사가 합동으로 마련한 법회입니다. 그동안 훌륭한 스님들을 많이 청해 법문을 듣고 오늘 마지막으로 제가 이렇게 나왔습니다. 부처님 법은 저절로 펴지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법이 잘 펴지도록 돕는 이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성도 후 제일 먼저 만난 이가 법을 전하는 제자가 아니라 장자였습니다.

봄이 오면 꽃이 피겠지만 시멘트 바닥 위에서 꽃이 피는 것은 아닙니다. 시멘트 마당 위에 흙이라도 한줌 뿌리고 씨앗을 심어야 꽃이 피는 법입니다. 우리 삶에서는 이런 노력이 매우 중요한데 이것이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 해서 세제법으로 몰아버리곤 합니다. 요즘 우리 교단에서는 세제와 진제를 양분하는 나쁜 풍습이 있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해 보고 싶습니다.

세제란 세속적인 이야기고 진제란 깨달은 이야기를 뜻합니다. 요즘엔 세속적인 이야기는 하지 말고 깨달은 이야기만 하자고 하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실 때까지 고행하고 수행하고 공양 받은 이 모든 과정이 따지고 보면 세제입니다. 진제는 깨달음을 얻으신 그 이후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을 잘라 버리면 진제도 있을 수 없는 것이었지요.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 비가 오고 덥기도 하고 천둥번개도 치듯이 온 자연이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을 경시하고 결과론만 중요시하는 사고방식은 내가 생각하기엔 건전한 사고방식은 아닙니다. 결과는 원인 안에 있습니다.

나는 출가할 때 불교를 알고 생사를 벗어나려고 부모형제를 끊어버리고, 뭐 이렇게 위대하게 출가한 것이 아닙니다. 너무 가난해 굶어죽게 생겨서 나 하나라도 살려고 출가를 했는데, 다행히 부처님 말씀을 만나고 보니 이렇게 좋구나 싶어 지금껏 중으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중으로서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고 허망만 갖고 사니 부담이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목표를 세웠으면 노력을 해서 목표치 이상을 달성해야 합니다. 출가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공통의 원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2000만 불자를 이야기 하는데 2000만이면 우리 국민의 절반입니다. 그런데 국민의 반을 가진 종교가 이렇게 비실비실해서 되겠느냐 이겁니다. 그럼 어디에 문제가 있을까요.

부처님께서 도를 깨달으시고 하신 이야기를 들어보면 무당집 이야기나 교회 이야기보다 구수하지가 못해요. 신만 믿고 의지하면 되는 종교에서는 ‘신만 믿으면 뭐든 다 해결해준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뭐든 다 들어 주겠다’는 식으로 해주니 아주 편한데 부처님은 안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는데 그 방법은 자기의 착각에 벗어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가 건전한 사고, 건전한 생활을 해라’ 이것입니다. 이것을 ‘성불’이라고 하니 너무 거창해졌어요. ‘성불’이라고 거창하게 이야기를 해 놓으니 벽두에 말씀 드렸듯이 그것이 목적이 되서 그리로 치우치는 허물이 생겼어요. ‘내가 성불을 목표로 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시시한 이야기나 해서 되는가’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시시한 이야기가 쌓이지 않고서는 성불이 이뤄질 수 없습니다. 사소한 일상이 쌓이고 쌓여서 거기서 축적된 힘이 성불의 힘이 됩니다. 성불한다고 해서 어디 딴 세상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이 자리에서 그냥 성불하는 것입니다.

『육조단경』에 보면 ‘내 마음은 거울과 같으니 때때로 닦아 먼지가 끼지 않도록 하라’ 했습니다. 즉 그냥 두면 녹이 쓰니 열심히 닦으라는 뜻입니다. 시커멓게 녹슨 구리거울 속에 얼굴을 비출 수 있는 요소가 갖추어져 있으니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수행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에 ‘나를 경책할 줄 알고 나를 길들여서 자신이 길들여진 사람을 성불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불교를 믿는 사람들도 “보살님은 절에 다니는 목표가 뭡니까”하고 물어보면 “목표가 뭐가 있어요, 그저 열심히 빌어 부처님 복 받으려는 것이지”하는 정도지 “나는 불교인으로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개념이 없어요. 불교의 목표는 자타일시성불도입니다. 축원할 때 꼭 자타일시 성불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어쩌다 빠졌어요.

전해 오는 말에 인불언(人不言)이면 귀불지(鬼不知)라, 사람이 말하지 않으면 귀신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젊어서 결혼을 했는데 부인이 첫 아이를 낳다 그만 산고로 죽어버렸습니다. 옛날엔 첫 아이를 낳다 죽으면 귀신이 되서 남편을 잡아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래 이 남자가 고민이 되서 잠을 못잘 지경이었습니다. 어쩌다 잠이 들어도 귀신이 된 부인이 나타나서는 피를 뿌리며 괴롭혀 잠을 못 잤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살 수가 없어 이 사람이 죽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는 산으로 올라갔는데 그곳에서 도력이 높아 보이는 노스님을 만났습니다. 젊은이가 보기에 그 노스님이라면 자기가 죽지 않고 살 방법을 알려 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노스님이 말하기를 살고 싶으면 내 말을 꼭 믿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젊은이가 그러겠다고 다짐을 하니, 노장은 나무해 와라, 불 때라, 청소해라, 밥하라며 온갖 일을 시켰습니다. 젊은이는 속으로 못마땅했지만 그래도 시키는 대로 하다 보니 몸이 고단해 잠도 조금씩 잘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도 귀신이 아주 안 보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지내다 보니 노스님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믿고 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스님이 젊은이에게 붉은 팥을 다섯 개를 주며 “귀신에게 이것이 뭔지 아냐 물어 모른다하면 귀신에게 확 뿌려라, 하지만 안다면 다시 몇 개냐고 물어본 후 또 모른다고 하면 귀신에게 이 팥을 던지면 귀신이 사라 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철썩 같이 믿고 그날 밤 잠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귀신이 나타났습니다. 그래 귀신에게 이게 뭐냐 물었더니 팥이라고 딱 맞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몇 개냐고 물었더니 다섯 개라고 척척 맞추는 것입니다. 결국 그날 밤 귀신을 쫓는데 실패했습니다. 그 다음 날에 팥알 몇 개를 더 갖고 잤는데 귀신이 또 척척 맞춰 실패했습니다. 그랬더니 노스님이 “그 귀신이 개수를 척척 맞추는 이번엔 아예 세보지도 말고 그냥 한 움큼 집어 갖고 있어봐라” 했습니다. 그날 밤 역시나 그 귀신이 또 나타났는데 몇 개냐고 물어봤더니 이번엔 귀신이 ‘모르겠다’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 팥을 귀신에게 확 던지니 마침내 그 형상이 사라지고 젊은이는 오랜 만에 편한 잠을 실컷 잘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왜 몇 개인지 몰랐을까요. 노스님 말씀하시길 “사람이 다 만든 것이지, 죽은 귀신이 뭘 알겠느냐.” 사람이 아니 귀신도 아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을 때 숨이 멈추었더라도 듣는 기능이 끝까지 남아 있기 때문에 죽은 사람에게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을 해주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염불을 지극한 마음으로 해주어야지 염불 소리와 염불하는 사람의 마음이 다르면 중음신은 마음의 소리를 듣습니다. 염불을 하면서도 부모님은 왜 재산을 나 안주셨나, 동생이랑 나눠가져라 하시니 속이 상한다는 둥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부모님 영가가 그 말씀을 듣고는 극락 갈래야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부모님 영가가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뭘까요. 저 철없는 자식이 철드는 것을 봐야 마음 편히 갈 길을 가겠는데 어린아이를 우물가에 내놓은 것 같으니 극락이 아무리 좋다 해도 마음이 놓이질 않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칠월 백중에 부모님 천도하려는 마음만큼만 평소에 부모님 생각을 하면서 순간순간을 살고, 내가 지금 사는 모습을 부모가 보신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 것인가를 생각하면 아무렇게나 행동하며 살 수 없겠지요. 그러면 천도가 다 된 것입니다.

절에 가 법문을 듣는 것도 내가 그 생각을 똑바로 알고 있는가, 그 훈련이 잘 돼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불법을 배운다는 것은 문(聞), 사(思), 수(修) 삼단계입니다. 듣고 생각하고 닦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듣기만 하려고 합니다. 법문을 듣고 내가 할 역할이 무엇인지는 생각을 안 해요. 지금까지 네 명의 대법사가 다녀가셨습니다. 그 법문을 다 들으셨는데 그 법문에서 무엇을 강조하셨는지 마음에 남는 것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게 헛장사한 것입니다.

 
불자들이 월운 스님의 법문에 심취해 있다.

내게 찾아오는 사람 중에는 술 끊게 약 달라는 사람도 있고 부적 써 달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술 끊는 약도 없고 술 끊는 부적도 없습니다. 제일 잘 듣는 약이 딱 하나 있는데 사람들이 믿질 않습니다. 바로 본인이 안 먹는 것입니다. 누가 술을 먹입니까, 먹으라고 협박을 합니까. 자기가 먹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를 용서하는데 너무 관대합니다. 남을 책망할 때는 면도칼 같으면서 자기를 용서하는 데는 너무 관대합니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관불용침 사통거마(官不容針 私通車馬)’라 했습니다. 관법으로는 바늘도 안 들어가는데 사사로운 일에는 수레가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자기에게 관대하지 말고 자기를 조여서 그것이 관습화되는 것이 힘입니다. 그 힘은 우리 몸에 들어있습니다. 그 힘이 우리 몸에 간직돼 있는 것을 『반야심경』에서는 ‘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라, ‘다섯 가지 색수상행식이 공한 것을 비춰보는 힘이 일체고액을 건너게 해준다’ 했습니다. 즉 평소에 다진 힘, 정법으로 다져진 힘이 다시 과오를 저지르는 길로 가려는 것을 막아준다 이겁니다. 그 힘이 묶이고 묶여 교단적인 힘이 되서 불법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사회가 아름답게 되면 그것이 ‘자성불 타성불’인데, 불교는 지금 늙은 코끼리 같이 되서 잘못 가고 있어요.

기독교가 이 땅에 처음 들어온지 100여년 만에 천주교 순교가 사태가 났습니다. 천주교 신자 150여 명을 잡아다 놓고는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는 못한다고 해서 죽음을 재촉했습니다. 나는 비록 이교도지만 그들의 거룩한 마음을 존경합니다. 그들을 배워야 합니다. 어떤 폭군이 나와서 여러분에게 불교 믿으면 죽이고 안 믿으면 살려주겠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선거 때만 되면 불교신자도 아닌 사람들이 불교인척 하며 그럴듯하게 말하면 표 다 찍어주지요? 이게 꼴이 뭡니까. 이렇게 된 것은 너무 오랜 세월동안 불교가 나 하나 즐기면 된다는 쪽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교를 믿는 분들이 언제 어디서나 부처를 향한 마음에 날 비춰보고 그 말에 내가 복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오온이 다 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실 때 ‘자기 부처를 믿으라’고 하신 말씀이 이 말입니다. 건방지게 내가 부처인데 누구한테 불공을 하냐며 막가라는 말이 아니고 어디를 가든 내 자신이 부처니 자신의 본래 양심에 위배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힘이 다져지고 그런 사람이 많아져서 그런 사람들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활화 돼 세상을 끌고나가는 힘이 됐더라면 우리가 오늘 할 역할이 참 많았을 것입니다. 오늘 이런 자리에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지만 대통령 선거 이후 오늘까지 세상이 지글지글하고 있습니다. 내가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정상은 아닙니다. 지금 대통령이 서울시장 할 때 칭찬이 자자했는데 촛불 집회하는 걸 보니 대통령이든 대통령을 뽑은 사람이든 뭔가 잘못된 것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계에서도 이런 잘못을 바로 잡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불교계에는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없습니다. 즉 불교계는 세상일에 관심없는 집단이 돼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도 닦기 좋고 나 혼자 즐기기에는 좋겠지요.

불교신자는 사회에서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이 좋다며 모델을 보여줘야 하는데 오늘날 불교는 좋은 것을 만들어 놓고도 알릴 생각을 안 하고 혼자만 즐깁니다. 여러분, 우리가 좋은 불법을 만났으면 내가 체험해서 남에게 이야기 할 정도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뜻을 같이 모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이 땅에 들어온 지 200년도 안되서 저렇게 큰 세력이 돼 나라를 지배할 정도가 됐는데 불교는 구경이나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번 법회가 경학 하는 사람들을 모았다고 합니다. 경학 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딴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중생 모두 성불할 수 있다고 해서 오늘 당장 부처되자는 것만 떠들 것이 아니라 부처되기 위해 해야 할 단초부터 풀어가자는 것이 교학입니다. 선학이 단도직입으로 꿈을 깨는 것이라면, 교학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꿈을 깨는 절차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꿈이 저절로 깨지는 것이니 무책임해도 된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 교학적 해석입니다. 교와 선은 결코 대립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부처님과 내 말이 연결되서 부처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가를 점검해보세요. 누가 내 얼굴을 한 번 때릴 때도 내가 ‘관세음보살’하고 말할 수 있는지, 처음엔 되더라도 나중엔 잊어버려서 화를 내는데 깜빡 잊어버리는 모습이 보이면 내 마음에 부처님이 아직 자리 잡지 않았다, 불교의 신앙이 말로 끝나고 생각으로 끝났다, 나의 체질로 바뀌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조석예불을 하고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은 부처님을 잊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바쁜 시대에 108염불을 어떻게 하겠냐고 하겠지만, 그것을 아침에만 하지 말로 하루 세 번 이라도 시간을 정해 놓고 그 시간에는 염불을 하세요. 그렇게만 할 수 있으면 부처님을 깜빡 잊어먹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이 언제나 나를 도와주시는 분이지만 언제나 부처님의 가피력을 입고 싶으면 언제나 부처님을 놓지 않아야 합니다. 부처님을 놓지 않는 그 노력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체크해봐야 합니다. 실천하고 노력해서 우리의 체질, 혈액을 바꿔야 합니다. 내가 불교 신자가 됐으면 부처님의 말씀을 나에게도 이익이 되고 내가 하는 행동이 공업이 되서 사회 사람들 모두가 건전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이것을 넓혀가는 운동으로 이어져서 꽃이 피었으면 합니다. 혼자만 갈 것이 아니라 같이 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노력, 실천 속에 불교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말을 명심해 주시면 이 사람 오늘 법문 한 것이 되고 공덕이 되겠지만 여러분이 말자취만 따라가다 헛갈리면 이 사람은 도리없이 망어를 지은 죄가 되니 저를 봐서라도 노력하세요. ‘나는 불제자다’라는 마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월운 스님은
월운(月雲) 스님은 1949년 운허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56년 해인사 강원을 졸업하고, 1957년부터 61년까지 통도사 강사를 지냈다. 1965년 조계종 역경위원에 선임됐으며 1979년∼1993년까지 중앙승가대 교수를 역임했다. 1993년 동국역경원장에 취임한 이래 한글대장경 사업에 전념해 고려대장경의 한글화를 선도했다. 역경보살로 칭송 받는 스님은 현재 조계종 제25교구본사 봉선사 조실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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