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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 명강의] 실상사 화엄학림 강사 오경 스님(상)

기자명 법보신문

삼라만상은 마음에 의지해 존재
꿈 속 금송아지처럼 본래 없는 것

오늘 주제는 『대광방불화엄경』「보살문명품」입니다. 보살문명품은 부처님 말씀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보살들끼리 묻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돼 있습니다. 다음은 그 중에서 첫 번째 부분입니다. 청량 국사는 이 부분을 ‘연기의 깊고 깊은 이치를 밝힘’이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문수 보살이 각수 보살에게 묻습니다. “마음의 성품은 하나인데, 왜 가지가지 차별된 현상이 있음을 보게 됩니까.” 질문이 계속 이어집니다. “업(業)은 마음을 알지 못하고 마음은 업을 알지 못하며 받음은 과보를 알지 못하고 과보는 받음을 알지 못하며, 받음은 마음을 알지 못하고 마음은 받음을 알지 못한다. 인(因)은 연(緣)을 알지 못하며 연은 인을 알지 못하며 분별하는 의식은 대상 경계를 알지 못하고 대상 경계는 분별하는 의식을 알지 못한다.”

여기서 마음은 무엇이고 업은 무엇일까요.

마음은 주체이고 업(業)은 마음의 작용

『대승기신론』에 보면 마음의 움직임을 업이라 했습니다. 마음은 주체고 업은 마음의 작용입니다. 업을 지으면 그에 따른 과보를 받습니다. 그러나 주체인 마음이 마음의 작용인 업을 알지 못하고, 업을 받는 마음이 업의 과보를 알지 못하고 대상을 분별하는 의식이 대상 경계를 알지 못합니다. 왜 서로 알지 못하는가.

이 때 각수보살이 게송으로 답해 이르기를, “제법은 작용이 없으며 또한 체성도 없다. 그러므로 저 일체가 각각 서로 알지 못한다(諸法無作用 亦無有體性 是故彼一切 各各不相知)”. 말하자면 공(空)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조건의 화합에 의해서 생기합니다(緣起). 여러 가지 조건의 화합에 의해서 생기기 때문에 자성(自性)이 없으며 실체가 없습니다. 그것은 존재하는 방식이 마치 꿈속에서 본 금송아지와 같습니다. 꿈에 분명히 금송아지를 보긴 했지만 금송아지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금송아지가 꿈 즉 꿈꾸는 의식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면, 다시 말해 꿈에서 깨어나도 현실에 존재한다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꿈속에서 본 금송아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꿈꾸는 의식에 의지해서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실체가 없이 현상만 존재합니다. 꿈에서 깨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실체가 없이 현상만 존재하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 현상이 현상이 아니고 허상이며 환상이라면 실제로는 현상도 없는 것입니다(無相). 현상이 없다면 현상의 생멸인 작용도 없는 것입니다(不生不滅, 無用). 이것이 공의 의미입니다. 연기(緣起)라는 말에 이런 뜻이 들어 있습니다(因緣所生法 我說卽是空). 그래서 이러한 상황을 요약하여 경에서 ‘제법은 작용이 없으며 또한 체성도 없다’라고 설하였습니다.

우리가 보는 이 삼라만상도 전적으로 우리의 업식(業識)을 의지해서 있습니다. 그것 자체로 있지 못하고 마음을 의지해서 있기 때문에 삼라만상도 꿈속에 본 금송아지처럼 본래 없는 것입니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인연을 통해, 여러 조건의 화합에 의해서 생기(生起), 즉 일어납니다. 달리 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것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다른 것에 의지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실체도 자성도 없습니다.

삶은 있으나 사는 자는 없어

꿈이 그것 자체로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이 현상만 존재하듯이, 삼라만상도 마음을 의지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이 현상만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이 삼라만상은 다 꿈과 같은 것입니다.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삼라만상은 마음에 의지해 있지만 마음은 또한 대상에 의지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도 똑같이 실체가 없습니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상(相)이 없고 상이 없기 때문에 용(用)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작용인 업은 있습니까. 당연히 없겠지요. 그러니까 있지도 않은 마음으로 있지도 않은 업을 지어서 있지도 않은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다 환(幻)입니다. 그러니 내가 마음을 일으켜 놓고도 내가 그 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왜 모르는가 하면 마음이 원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제법은 환과 같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서로 간에 모릅니다.

“안이비설신의는 항상 유전하되 유전하는 자는 없다(眼耳鼻舌身 心意諸情根 以此常流轉 而無能轉者)”고 했습니다. 유전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끊임없이 작용하지만 작용하는 자는 없습니다. 행위는 있지만 행위 하는 자는 없습니다. 현상은 있지만 현상을 존재케 하는 자, 또는 현상하는 자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뭐꼬’ 화두를 들 때, 보고 듣는 이놈이 뭐냐고 찾지만 이 보고 듣는 놈은 없습니다. 보고 듣는 현상만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무아설(無我說)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기관인 육근을 움직이는 놈, 마음, 정신, 영혼, 다름 아닌 내가 꼭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몸뚱이를 여기까지 끌고 온 이놈, 이것이 무엇인지 보라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이놈을 위해서 끊임없이 번뇌, 망상, 욕심, 모든 나쁜 짓을 다하는 것인데 그것이 없다고 하면 번뇌 망상 욕심도 다 사라집니다. 그 놈이 있는 한, 그 뿌리를 뽑지 않는 한, 번뇌 망상은 아무리 없애도 마치 아카시아 나무의 뿌리를 뽑지 않고 위에 올라온 가지만을 자른 것과 같이 언제든지 다시 나옵니다. 그러니 번뇌, 망상, 욕심을 일으키는 그 뿌리, 즉 마음, 정신, 혹은 영혼이라고 하는 그 뿌리가 없음을 보라는 것입니다. 있는바 그대로 보는 것, 그것이 선정입니다. 자세히 관찰해보면 삶은 있지만 사는 자는 없습니다.

선가에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화엄경』에서 누누이 설명했듯이 성품은 없습니다(無自性). 달리 말하면 성품이 없다는 성품이 있습니다(無性之性). 이것이 진짜 성품입니다(眞性). 그래서 성품을 본다는 것은 성품이 없음을 보는 것입니다. 나라고 할 것이 없음을, 마음이 없음을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법의 성품에서 보면 본래 생멸이 없으나 현상적으로 보면 생멸이 있으니 이 가운데는 현상케 하는 자도 현상한 세계도 없다(法性本無生 示現而有生 是中無能現 亦無所現物).” “눈, 귀, 코, 혀, 몸, 의식 육근인 내가 일체가 공하여 자성이 없거늘 망령된 마음으로 분별하여 있게 되었다(眼耳鼻舌身 心意諸情根 一切空無性 妄心分別有).”
“이치대로 관찰하면 일체가 다 자성이 없으니, 법안은 불가사의라. 이와 같이 보는 것은 전도가 아니다(如理而觀察 一切皆無性 法眼不思議 此見非顚倒).”

 나도 없고 세상도 없는 게 실상

지혜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불가사의입니다. 나도 없고 세상도 없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를 하겠습니까. 우리가 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이것이 세상의 실상이라고 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법의 눈으로 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사유로는 불교를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사의입니다.

그 다음은 또 더 재미있습니다. “진실이라고 말하건 허망하다고 말하건 세간의 진리이건 출세간의 진리이건 이 모든 것은 다 거짓말이다(若實若不實 若妄若非妄 世間出世間 但有假言說)”. 부처님 말씀을 포함하여 이 세상의 모든 언설은 다 가언설, 즉 임시로 하는 말입니다.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는 것입니다. 그 때, 그 상황, 그 사람에게만 맞는 말입니다. 모든 부처님의 말씀은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생각을 바로잡아 주기 위한 방편설입니다(對機說法). 불변의 진리는 없습니다(無有定法). 모든 법칙은 조건으로 환원됩니다. 어떤 조건하에서, 어떤 상황 하에서 어떤 사람에게만 맞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진리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어떤 조건하에서만 어떤 상황 하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도 그러해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사실만이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영원불변의 진리는 없다는 진리만이 영원불변의 진리입니다. 이것이 연기, 공, 무아, 무생, 무자성이며 진리, 진아, 진성, 제법의 실상입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지난 6월 17일 부산 미타선원(주지 하림)에서 열린 ‘화엄경 강의’에서 오경 스님이 『대방광불화엄경』「보살문명품」을 주제로 강의한 내용을 요약 게재한 것이다.


오경 스님은


경북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출가 후 송광사 강원을 졸업하고 실상사 화엄학림 제 1기 출신으로 『화엄경』을 연찬했다. 제방 선원에서 10여 안거를 성만하고 서울 법련사 주지를 지냈으며, 현재 실상사 화엄학림 강사를 지내고 있다. 지난 5월부터 부산 미타선원 선원장을 맡아 재가불자들을 위한 참선 지도와 하안거 기간 동안 선원에서의 첫 번째 화엄경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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