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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혜·고봉의 회상에 들다]7. 천목산(天目山)② 끝.

기자명 법보신문

사관에 담긴 고봉의 체취서 용맹정진을 배우다

 
고봉 선사가 천목산에 들어와 15년간 면벽수행을 했다는 무문관 사관(死關). 사관은 고봉 선사가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 문을 닫고 영원한 세계의 문을 연 곳이다.

고봉은 남명사 산문을 나서 강심사(江心寺), 국청사(國淸寺), 설두사(雪竇寺) 등으로 행각(行脚)을 떠났다가 3년 뒤 다시 설암 선사를 찾았다. 설암을 시봉하며 지내던 어느 날, 설암이 “매사 주인공이 되느냐”고 묻자, 고봉은 주저 없이 “그렇다”고 했다. 이에 다시 설암이 “잠잘 때도 주인공이 되느냐”고 물었고, 고봉은 이번에도 거리낌 없이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자 설암 선사는 “잠잘 때에는 꿈도 생각도 없고 보지도 듣지도 못하거늘 주인공이 어디에 있느냐”고 다그쳤다. 순간 고봉은 머릿속이 텅 빈 채 아무런 답도 내놓지 못했다.

“오늘부터 부처를 배우려거나 법을 배우려 하지 말고, 지난날이든 지금이든 결코 궁구하지 마라. 그저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자고 잠을 깨거든 정신을 가다듬어 한 결 같이 깨닫는 주인공이 필경 어느 곳에서 안신입명(安身立命)하는지 만을 생각하라.”

목침 소리에 활연대오하다

설암 선사는 이렇게 고봉을 채근하고 나서 방문을 닫아걸고는 더 이상 고봉을 만나주지 않았다. 사실 고봉의 첫 번째 깨달음은 확철대오(廓徹大悟)가 아니라 지견일 뿐이었다. 때문에 이를 간파한 설암 선사는 고봉을 진정한 화장(華藏) 세계로 이끌고자 이토록 모질게 내친 것이다.

고봉 역시 스승의 뜻을 알아채고는 “일생을 버리고 한낱 바보가 될지언정 결코 이 일착자(一着子)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말리라”며 그 길로 용수사(龍鬚寺)로 들어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직 화두만을 참구했다. 그렇게 용수사에서 5년을 지낸 어느 날 밤, “쿵”하는 소리가 고요한 선방의 정적을 갈랐다. 함께 정진하던 도반이 잠을 자던 중 그만 목침을 바닥에 떨어뜨린 것이었다. 갑작스런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 고봉은 지금껏 눈앞을 가리던 먹구름이 걷히고 환히 밝아짐을 느꼈다. 스물넷에 견처를 안 이후 꼬박 10년 만에 드디어 조금의 의심도 없는 활연대오(豁然大悟)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고봉 선사가 천목산에 들어와 법의 수레를 굴렸다는 선원 ‘개산노전(開山老殿)’에 들어섰다. 개산노전은 고봉 선사와 제자 중봉 명본, 단애 요의 스님을 모신 전각 한 동으로 소박했다. 고봉 선사의 활발발한 선풍이 전해질 것이란 기대와는 다른 모습에, 수행이 턱없이 부족하기만 한 중생의 마음은 이내 실망으로 바뀌었다. 개산노전은 선원이라기보다 조사당에 가까운 모습이다. 또한 안에서는 낡은 스피커를 통해 구슬픈 멜로디와 같은 ‘나무아미타불’ 염불소리만 흘러나오고 있어, ‘선당(禪堂)’이라 써 붙인 편액을 무색케 했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라면 고봉 선사가 사용했다는 발우를 직접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개산노전 한 편에는 중봉 스님의 부도 탑에서 발견됐다는 고봉 선사의 동(銅) 발우와 중봉 스님의 홍(紅) 가사가 전시돼 있었다. 그러나 그 진위는 이제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가고 없는 고봉만이 알 일이다.

세발지에 너도나도 손을 담그다

 
800년 전 고봉이 그 모습 그대로 좌정한 채 미소로 순례단을 맞았다.

개산노전을 나와 천년고도(千年古道)를 따라 고봉 선사의 구도 여정을 만나는 본격적인 순례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중봉 스님의 부도 탑이 순례단을 맞았다. 기록에 따르면 고봉 선사에게는 수 백 명의 제자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 중에서 중봉 명본(中峰明本)이 단연 제일이다. 중봉 스님은 15세에 출가해 고봉 선사를 스승으로 구족계를 받은 후 천목산에 머물며 수행에 전념했는데, 스님의 도력과 법력이 차츰 알려져 훗날 원나라 황실 국사로 책봉되기도 했다. 때문인지 이 지역에서는 ‘고봉의 제자 중봉’보다는 ‘중봉의 스승 고봉’으로 더 많이 불릴 만큼, 중봉 스님에 대한 존경심이 컸다.

이름 모를 선사들의 부도가 즐비한 부도군을 지나 조금 더 내려가니 커다란 삼나무 뿌리 아래 작은 샘이 발길을 잡는다. 고봉 선사가 공양 후 발우를 씻었다는 세발지(洗鉢池)라는 설명에 순례단 일행은 차례로 그 물에 손을 담갔다. 고봉 선사가 발우를 씻었던 곳이기에 ‘저 물방울 하나로 800년 전 고봉을 만날 수 있다’는 욕망이 샘솟는 것 또한 어쩌면 당연한 중생심이 아니겠는가.

모퉁이를 돌아서자 천 길 낭떠러지 위에 자리 잡은 조그만 토굴 하나가 시야에 들어온다. 바로 고봉 선사가 천목산에 들어와 15년간 면벽수행을 했다는 무문관인 ‘사관(死關)’이다.

고봉 선사는 용수사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4년을 더 머무르는 동안 한 벌의 납의(衲衣)만을 입고, 솔잎을 먹으며 오로지 좌선삼매(坐禪三昧)로 일관했다. 그러나 선사의 명성은 소리 없이 천리를 갔고, 고봉을 찾는 제방 납자들의 발길은 끝 없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1279년 고봉이 42세 되던 해, 남송이 멸망하자 학인들은 흩어졌고 선사도 천목산으로 거처를 옮겨 이곳에 무문관을 세웠다. 바로 눈앞에 나타난 사관이 그 무문관이다.

사관은 고봉 선사가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 문을 닫고 영원한 세계의 문을 연 곳이다. 밧줄을 타지 않고는 오르기 어려울 정도로 험한 곳, 비바람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토굴이었지만 고봉은 시봉도 마다하고 오직 화두만을 참구했다. 하지만 험준한 곳임에도 도를 묻는 이들이 끊이지 않았고, 고봉의 법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감복했다.

험준한 절벽 위 세워진 사관(死關)

고봉은 이때 찾아오는 납자들을 삼관(三關)으로 시험하고 공부 정도를 점검했다. 그 삼관이란 것은 첫째가 밝은 해가 하늘에 떠서 비추지 않는 곳이 없거늘 무엇 때문에 조각구름에 가렸는가, 둘째는 사람마다 있는 그림자는 촌보도 옮기는 일이 없건만 무엇 때문에 밟지 못 하는가, 셋째는 온 대지가 불구덩이니 무슨 삼매를 얻어야 불에 타지 않겠는가 였다.

먼저 이 관문을 통과한 납자가 있으면 또 다른 삼관으로 점검했다. 중봉 스님은 이러한 스승의 모습을 “고봉의 높은 점 하늘과 비교 안 되고, 사관의 험한 점 18지옥과 비교가 안 된다”고 찬탄하며 가르침을 새기기도 했다.

사관에 이르니 800년 전 고봉이 그 모습 그대로 좌정한 채 미소로 순례단을 맞는다. 그리고는 무언의 사자후로 ‘철저히 죽어야만 산 사람을 볼 수 있다’, ‘360개 골절과 8만4000천의 털구멍을 한꺼번에 뭉쳐 한 개의 의심덩어리를 만들어 참구해 의심하라’고 가르침을 내린다. 이심전심, 그 가르침을 받아든 순례단이 손을 모아 고봉 선사에게 예를 갖춘다. 그렇게 선사 앞에 선 수행인들은 성성한 선기를 온몸으로 느끼는 듯 한참을 그 자리에서 떠나지 못했다.

 
많은 납자들이 이 길을 따라 고봉의 가르침을 받고자 사관을 향해 천목산을 올랐다. <사진설명>

1295년, 어떠한 계율도 소홀히 여기지 않음으로 세인의 존경을 받았고, 법도가 있으면서도 입실제자(入室弟子)들에게 자비함을 잃지 않았던 고봉은 제자들에게 후사를 부탁하며 게송 하나를 남기고 홀연히 피안의 세계로 향했다.

‘사관을 와도 들어가지 않고(來不入死關)/ 죽어서 가도 사관을 벗어나지 아니하네(去不出死關)./ 쇠로 된 뱀이 바다를 뚫고 들어가서(鐵蛇鑽入海)/ 수미산을 쳐서 거꾸러트리네(撞到須彌山).’

세수 58세 법납(法臘)은 43세, 12월 초하루의 일이다.

4일 동안 간화선 선적지를 찾아 대혜 선사와 고봉 선사의 숨결을 만끽한 순례단의 돌아오는 발길은 가벼웠다. 한편으로, ‘역대 조사의 관문과 생각의 길을 끊지 않는다면 풀잎이나 덤불에 붙어사는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무문관』의 한 구절처럼 순례단의 표정 하나하나에는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겠다는 비장한 각오가 오롯이 드러나 있었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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