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근현대 불교사]50.‘정화’된 종단 다시 내부에서 양분
[새로 쓰는 근현대 불교사]50.‘정화’된 종단 다시 내부에서 양분
  • 법보신문
  • 승인 2008.07.29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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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개운사파 양분…종권다툼 점입가경
 
1977년 신문에 실린 이서옹 종정의 중앙종회 해산 발표 장면. 사진제공=민족사

종정-총무원장 중심제 힘 대결…결국 소송으로 얼룩져
교세 위축과 승려자질 저하로 분열…10·27법난 빌미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대처승 사찰에서 물러가라’는 담화 발표를 계기로 시작된 이른바 ‘정화운동’은 1970년 1월 대처승 측에서 태고종을 창종함으로써 막을 내린다.

조계종은 이 분쟁을 ‘정화운동’ 또는 ‘정화불사’라고 부르며, 오늘날 조계종이 한국 불교 최대 종단의 모습을 갖추게 된 계기가 된 것으로 파악한다. 반면에 태고종 측은 2006년에 발간한 『태고종사』에서 이 사태를 법난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법난의 성격은 이승만 정권이 일본 불교 잔재 청산한다는 미명 아래 비구 승단이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종권을 탈취하는 것을 방조하였으며, 여기에 언론사가 가세하여 대처 승단을 매도하였다고 본다. 이 분쟁이 ‘정화’라는 이름으로 자리매김 되려면 적어도 1970년 1월 이후에 비구 승단 내부에서 종권을 둘러싼 갈등이 없었어야 한다. 왜냐하면 ‘정화’라는 작업을 통하여 ‘불순하거나 더러운 것’이 제거되고, ‘깨끗한 집단’만이 남았기 때문에 적어도 ‘정화된 집단’ 내부에서 더 이상의 분쟁과 폭력이 난무하는 일은 없어야 ‘정화’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다.

‘정화운동’ 당시에 동원된 폭력배들은 수행력이 떨어지고, 계율을 제대로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감히 종권을 넘볼 수는 없었고, 그들은 어차피 하수인에 불과하였다. 문제는 수행승으로 자처하는 승려들이 종권 장악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그런데 1978년 조계종은 또 다시 두 개의 종단으로 분열되는 내홍을 겪는다. 1974년 8월 중앙종회는 이서옹을 종정으로 추대하는데 아마도 문중 배경이 없고 파벌색이 약하다는 이유가 작용한 듯하다. 종정에 취임한 이서옹은 종단의 실무를 장악하고 친정 체제를 구축하려한 데서 사태의 발단은 시작된다. 1975년 8월 이서옹 종정은 총무원장 손경산을 비롯한 부장·국장급 30여명에게 사퇴를 종용한다. 그리고 향후 본사 주지를 발령할 때는 반드시 종정의 재가를 받아서 시행할 것을 명한다. 당시 총무원장이었던 손경산은 여기에 반발하면서 실권을 장악하려 한다. 하지만 손경산은 경기도 양주군 대성암의 토지 매각 대금을 유용하였다는 혐의로 현직 총무원장으로 구속되는 사태를 맞는다.
이후 송서암이 총무원장으로 선출되지만 서암 집행부는 행정 경험의 미숙으로 종단은 혼미를 거듭한다. 송서암 이후로 박기종·고경덕·김자운 등이 총무원장으로 취임하지만 종단은 안정을 찾지 못한다.

1977년 7월 김혜정 총무원장 체제가 구성되고, 신임 총무원장은 종정을 보좌하여 업무를 집행하면서 호흡을 맞추고자 한다. 그러자 중앙종회 측에서 여기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송월주·이설조 등을 중심으로 한 중앙종회 의원들은 총무원장 중심제로 종헌을 개정할 움직임 보이고 있었다. 이들의 주장은 종정은 상징적인 어른으로 있고 종무행정의 실질적인 운영은 총무원장 중심으로 운영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었던 것은 종헌에 종정과 총무원장의 권한이 명확하게 구분되어있지 않은 데 있었고, 1962년 통합종단 종단 출범 이후 종정은 종무행정에 깊이 관여하지 않은 데도 원인이 있었다. 1977년 9월 9일부터 10일에 걸쳐 개최된 제48회 임시 중앙종회는 종헌·종법을 개정하려는 종회 의원들과 종정 중심제를 주장하는 총무원장 측 의원들이 대립하여 유회가 된다. 이러한 상황을 감지한 이서옹 종정은 종령 제36호를 발포하여 종회 개최 장소를 조계사로 국한시킨다.

종헌·종법을 개정하려는 노력은 10월 7일부터 8일간 해인사에서 개최된 제49회 임시 종앙종회에서 나타난다. 이 임시 종회에는 재적의원 48명 가운데 24명이 참석하여 3년 전에 선출한 이서옹의 종정 추대 취소를 결의하고, 종정에 대한 불신임을 결의한다. 이들은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통도사에서 제50회 정기 중앙종회를 개최하여 총무원장 중심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종정이 발포한 종령의 무효를 선언하면서 지난 번 해인사에서 개최한 종회 결정이 적법하다는 것을 결의한다. 총무원 측은 사전에 집행부와 협의 없이 개최된 종회를 불법 종회로 규정하였고, 11월 11일 이서옹 종정은 중앙종회의 해산을 명한다. 여기에 맞선 중앙종회 의원들은 종정과 집행부의 직무 집행정지 가처분을 신청한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1978년 1월 이서옹 종정은 원로회의에 종정의 모든 권한을 위임한 뒤 사퇴하고, 원로회의는 명칭을 종단재건회의로 개칭하고 의장에 이운허를 선출하고, 총무원장으로 강석주를 선임한다. 1월 21일 서울 고등법원은 조계종 종정 직무대행에 채벽암을 선임한다. 종헌 개정 세력인 재야측은 3월 10일 종정으로 채벽암, 총무원장에 윤월하를 추대하고, 개운사에 임시 총무원을 개원함으로써 조계종은 양분된다. 조계종이 양분되자 문교부와 종단재건회의가 중재에 나섰다. 서울 고등법원은 7월 18일자로 윤고암을 조계종 종정 직무대행으로 임명한다. 이것은 개운사파와 조계사파가 총무원장 중심제와 원로원 신설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8월 16일 윤고암은 개운사 측과 합의사항을 이행할 수 없다고 통고하고, 긴급 명령을 발동하여 비상종회 구성하게 한다. 그러자 개운사 측은 10월 23일 임시 중앙종회를 개최하여 종회 의장에 손경산을 선출하고 윤고암의 직무대행 추대를 취소한다. 1979년 6월 대법원은 이서옹이 개운사 측을 상대로 제기한 종정 직무 정지 가처분 신정을 기각하고 개운사 측의 손을 들어준다.

이후 양측은 정통성을 확보기 위하여 수차례나 세속법에 의지하지만 어떤 판결도 어느 일방의 완전 우위를 확인시켜 주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내분 때문에 1979년 부처님오신날 법회는 두 총무원이 별도로 갖기도 한다. 1979년 6월 대법원은 종정 이서옹이 개운사 측을 상대로 낸 종정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에 대한 상고를 기각시킴으로써 개운사 측이 승소를 한다. 조계종의 내분 상황은 1980년에 들어서면서 재판 판결은 개운사측으로 기울어진다. 1980년 3월 30일 양측은 화해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협상을 시도한 결과 종회의원 총선에 합의한다. 1980년 4월 17일 전국 24개 교구에서 제6대 중앙종회 의원 총선거를 실시하여 69명의 종회의원이 선출된다. 4월 26일과 27일에 걸쳐 중앙종회가 개최되어 총무원장에 송월주, 종회의장에 황도견, 종회부의장에 유월탄과 정초우를 선출한다.

 
개운사 측과 조계사 측이 분규 해소를 위해 합의서에 서명하는 장면.

그러나 송월주 총무원장 체제의 출범은 3년 동안 계속된 조계사 측과 개운사 측의 종권분쟁을 완전 종식시키지 못하고, 법적인 통합을 이루는데 지나지 않았다. 당시 종회는 종정 선출 문제를 놓고 이성철과 최월산을 추대하려는 양측의 팽팽히 맞섰기 때문에 조계사 측과 개운사 측 어느 쪽도 과반수 득표를 얻지 못하여 결국 추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5월 7일 다시 종회를 열어 종정 추대를 재시도 했으나 총무원장과 종회 정·부의장 등을 모두 개운사 측이 독점한 것이 문제가 되어 조계사 측과의 분쟁은 다시 재현된다. 5월 13일 개운사 측는 조계사 측의 총무원을 강제로 점거한다.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성립된 조계종은 내부 분열로 말미암아 양분되는 사태를 맞게 되고 이후에도 이런 일을 여러 번 겪게 된다. 이러한 사태가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은 조선시대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교세가 위축되고, 승려들의 자질이 저하된 데서 찾아질 수 있다.

불교계가 일제시대에 들어와서 일본의 대처승 제도를 사상적으로 소화해 내지 못하고, 짧은 기간에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데 있다.
더욱 큰 문제는 해방 당시 90%가 넘던 대처승들을 10분의 1도 안 되는 비구승들이 짧은 시간에 대처승을 몰아내고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과정에서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한데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불교계에서 이처럼 혼미한 상황이 계속되자 당시 전두환 정권은 조계종단이 자체적으로는 더 이상 정화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신임 집행부 인사들을 대거 구속시키는 10·27법난 사태를 일으킴으로써 불교계를 몸서리치게 만든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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