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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랑 박사의 율장 속 부처님이야기]범단법

기자명 법보신문

말에 대꾸도 않고 가르침을 주지도 않는
범단법 조치는 승가의 마지막 경고인 셈

고따마 싯다르타가 29세의 나이에 출가를 결심하고 성을 넘었다는 전승은 출가유성이라는 이름으로 부처님의 일대기 가운데서도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으로 꼽힌다. 왕궁에 남아 전륜성왕의 길을 가기를 바라는 부왕과 애타는 처자식의 바람을 뒤로 한 채, 출가자로서 최고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삶을 선택한 순간이었다. 여러 전승에 의하면, 싯다르따 태자는 한 밤중에 챤나라는 마부에게 명하여 애마인 깐타까를 뜰로 데리고 오게 한 후 타고 성문을 나가, 교외에 있는 한 숲에 도착하자 보의(寶衣)를 벗어 챤나에게 주며 성으로 돌아가도록 했다고 한다. 바로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마부 챤나가 율장에서는 바일제 제12조 이어뇌타계(異語惱他戒) 및 범단법(梵壇法)과 같은 중요한 율 조문 제정의 계기를 제공하는 주인공으로 곳곳에서 등장한다.

챤나는 훗날 출가하여 승가의 일원으로 살아가게 되었는데, 부처님이 속세 생활을 할 때부터 자신과 특별한 인연이 있음을 내세우며 매우 교만하게 행동했다. 즉, 자신의 도움으로 싯다르타 태자의 출가가 가능했으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태자가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될 수도 있었고, 또 많은 제자들의 깨달음 역시 가능해졌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항상 자만심을 버리지 못한 채, 다른 제자들을 무시하고 거친 말과 행동을 일삼았다. 율을 어기는 일도 많았고, 또 어겨도 참회하지 않았기 때문에 징계갈마의 대상이 되곤 했다. 게다가 갈마를 통해 이루어지는 정식 힐문에 대해서조차 불성실한 태도로 일관하여 다른 스님들을 괴롭혔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꼬삼비라는 나라에 있는 한 원림에 머무르고 계실 때의 일이다. 챤나는 비법을 행하며 율을 어겨 스님들로부터 갈마를 통해 힐문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챤나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참회하기는커녕, 다른 스님들을 경멸하며 질문 받아도 엉뚱한 궤변을 늘어놓거나 침묵을 지키며 대꾸하지 않는 등, 매우 불성실한 태도로 스님들을 곤란하게 했다. 즉,‘누구에게 죄가 있는가? 무엇이 죄인가? 어디에 죄가 있는가? 어찌하여 죄인가? 당신들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가? 당신들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가?’라며 반론을 거듭하다, 궤변을 늘어놓는 행동을 문제 삼자 이번에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어뇌타계가 제정되었다고 한다. 이어(異語)란 질문이나 충고에 대하여 엉뚱한 대답을 하는 것으로, 방금 전에 한 말을 다시 뒤집어 다른 말을 늘어놓거나 궤변을 설하는 것을 말한다.

챤나의 행동은 바일제죄의 대상으로 정해져 금지되었지만, 그는 조금도 개선의 여지를 보이지 않은 채 이전처럼 행동하며 다른 스님들을 난감하게 했다. 사실상 바일제죄란 본인의 참회만 있다면 언제라도 출죄(出罪)할 수 있는 것으로, 강력한 제재력은 없다. 결국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가까워졌을 무렵, 아난존자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셨다.‘아난아, 내가 가고 난 후, 챤나비구에게 범단법을 실행해라.’아난이 범단법의 내용을 묻자,‘챤나비구가 마음대로 떠들게 내버려 두어라. 그러나 비구들이 그에게 말을 걸어서는 안 된다. 훈계해서도 안 된다. 교계해서도 안 된다.’라고 설명하셨다. 즉, 챤나가 무슨 말을 떠들어대든 대꾸도 하지 말고 잘못을 일깨워주기 위해 가르침을 주고자 애쓸 것도 없다는 의미이다.

서로가 거울이 되어 스스로를 돌아보고 이끌어주는 과정을 통해 올바른 수행자로 거듭나는 과정을 거치는 승가 공동체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이 범단법의 조치는 승가의 마지막 경고라고 볼 수 있다. 아니, 이것이 어찌 승가만의 문제이겠는가. 어느 단체의 일원으로서든, 혹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든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고 살아가는 세상이라면,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여 자신의 행동을 돌아볼 수 있는 최소한의 성실함은 반드시 필요한 덕목일 것이다.

이자랑 도쿄대 박사 jarangl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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