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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만다라]31. 위사카의 어리석은 친구들

기자명 법보신문

“무상의 불길 속 향락에만 빠져있는가”

무엇을 웃고 무엇을 기뻐하랴
세상은 끊임없이 불타고 있는데
그대는 암흑에 둘러싸인 채
어찌하여 등불을 찾지 않는가
 - 『법구경』

위의 게송도 위사카 우바이와 관계된 가르침이다. 위사카의 친구들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 당시의 귀부인들로서 술을 마시는 등, 향락에 젖어서 생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어느 날 그들은 함께 부처님의 법을 듣기 위하여 수행처에 들어와서도 평소의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그들은 숨겨 들여온 술을 마시고 정신이 몽롱해 져서 가르침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여인들은 그야말로 술을 통하여 악마의 노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먼저 신통으로 짙은 푸른빛을 놓으시고 곧 이어서 방안을 아주 깜깜하게 만드셨다. 갑작스런 광경에 놀란 여인들은 차츰 정신을 차리고 자신들의 흐트러진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이렇게 정신을 가다듬은 여인들에게 부처님은 위의 게송을 설하셨다고 한다.

위의 게송은 『법구경』에서 ‘늙음의 장’의 시작이다. 어제가 오늘이 아니고 오늘이 내일과 다르게 시시각각 늙음은 우리를 엄습해 오고 있다. 모든 것이 불타서 언젠가는 사그라져 버리는 그러한 시한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음에 대한 경책이다. 우리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시간은 머물러 주지 않고 세월은 멈추지 않는다.

수행처에서 술 마신 이들

욕망과 집착으로 우리의 불타는 삶에 기름을 붓듯이 환락(歡樂)에 빠져서 우리 자신을 소진(消盡)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헤쳐나아가야 하는 생사(生死)의 바다에 망망대해를 항해(航海)하는 우리들의 육체의 배는 낡을 대로 낡아서 이제 배의 바닥에 구멍이 나려고 한다. 점차 바닷물이 구멍의 틈새로 새어 들어오면 배는 머지않아서 썩어서 가라앉고 말 것이다. 우리의 육체가 사멸(死滅)해 가듯이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멸의 시각이 다가옴에도 눈앞에 보이는 즐거움에 사로잡혀서 시간을 헛되이 낭비해 버리고 만다. 이러한 어리석음에 대한 경책은 부처님 가르침의 전반에 흐르고 있다.

『아함경』의 가르침 중에 산상(山上)의 설법으로 ‘세상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는 유명한 설법이 또 있다. 부처님 말씀에 의하면, 일체는 불타고 있음을 직시(直視)하라고 하신다. 세상 사람들의 눈과 입과 몸과 내지는 마음이 불타고 있으며, 눈으로 보는 감정에서부터 마음으로 느끼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 괴롭고 즐거움에 불타고 있고, 성내고 기뻐함으로 불타고 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불타고 있고, 늙고 병들고 죽음으로 불타고 있으면서 아비규환의 세상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현실을 직시하고서 타오르는 탐욕의 불을 끄고 암흑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혜의 등불을 찾아야 한다는 가르침인 것이다. 무상(無常)의 불길과 탐욕의 불길은 우리의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불길을 꺼버리기 위해서는 몽롱함에 가려서 미처 깨닫지 못한 사성제(四聖諦)의 진리에 눈떠야 하고 부처님 가르침인 지혜의 등불을 손에 쥐어야 한다. 위의 가르침의 게송은 이 안타까운 현실을 깨우치려는 내용이다.
‘어찌하여 환락에 젖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가? 세상이 온통 불에 타고 있는데, 헛된 탐욕의 불빛에 사로잡혀서 지혜의 등불을 찾아 나서려고 하지 않는가?’

부처님의 목소리가 강열한 빛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위사카 친구들의 어리석은 삶에 대하여 절규에 가까운 경책을 토로하시는 부처님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향락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부유한 여인들이 수행처에 와서“까지 저지르고 있는 탐욕의 행위를 부처님은 지혜의 등불로서 깨우쳐주고 계시는 것이다.

절규에 가까운 붓다의 경책

3천년이 지난 오늘 우리 불자들의 모습은 위사카의 친구들의 행위에서 얼마만큼 향상되어 있는가를 스스로 반성해 볼 일이다. 보시를 한다는 명목으로 오히려 죄업을 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공을 드린다는 행위가 오히려 부처님과 거래를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살펴볼 일이다. 수행자의 곁에 있으면서 수행을 함께 실천하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의 무거운 업만을 오히려 수행자에게 덮어씌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헤아려볼 일이다.

부처님 당시 거룩한 우바이 위사카가 고민했듯이 오늘날 이 땅의 모든 불자도 자신들의 서있는 위치를 정확히 살펴보고 고민해야 한다. 위의 게송은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부처님의 직언(直言)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승가(僧伽)는 출가승가(出家僧伽)와 재가승가(在家僧伽)로 나누어 구성되어 있다. 재가 승가에게도 5계와 8재계로 포살과 수행을 요구하고 있다. 자신의 3업을 청정하게 유지하지 못한다면 재가승가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불교가 이점에서 다른 종교가 요구하는 맹목적인 신앙을 거부하는 것임을 잘 알아야한다.

구원해준다는 말만을 믿고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맹신(盲信)이며 미신(迷信)이다. 이제 모든 불자는 맹신과 미신에 귀 기울이는 일 없이 청정한 자신을 가꾸어 가는 일에 발 벗고 나설 때이다. 그리고 참다운 수행처에 나아가서 진실한 수행자와 벗하여 진리를 함께 공유하고 열반에 나아가는 길을 찾아야 할 때이다.

본각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그림=이호신 화백, 수화자문=원심회 김장경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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