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6. 이분법에서 퍼지의 미학으로 [중]

기자명 법보신문

분별 떠난 안목, 질박한 서민의 그릇서 美 발견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 막사발에서 천하 명기가 갖는 미학을 해석해 냈지만 그는 ‘미추’와 ‘아속’을 동일시 하는 오류를 범했다. 사진은 도예가 천한봉 선생의 ‘조선 다완’.
필자의 독서량에 한계가 있지만, 지금까지는 서양이든, 동양이든 어느 누구도 언급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필자 나름대로 이야기했다. 이것이 수준이 어느 정도는 되는지 그에 미치지 않은지, 타당한 논리인지 아닌지에 대해선 엄정한 평가를 받아야 하겠지만, 독창적이었다는 점은 자부한다. 하지만, 이번 장에서 말하려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진술한 자가 있어 이를 인용하면서 글을 풀어보련다.

‘미와 추’ 둘로 나누는 습관

이런 가을날 숲길을 걷다가 보랏빛 벌개미취 꽃을 만나면 누구나 아름답다고 느낀다. 하지만, 꽃잎과 이파리에 짐승의 분비물이 묻었거나 누군가가 그 꽃을 자르고 밟아버렸다면 아름다움을 느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추함을 느낀다. 지나는 산들바람 소리엔 귀를 기울이지만, 비행기의 소음은 듣기 싫어 귀를 막는다. 나뭇가지 사이를 오고가며 도토리를 줍는 다람쥐는 귀여운 동물이지만, 집채만큼 큰 다람쥐는 괴물이다. 눈과 귀와 코가 알맞게 조화를 이룬 이는 미인이지만, 한 쪽 눈만 주먹만큼 큰 이는 추녀다. 방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정돈된 거실에 주인마님이 수놓은 자수가 걸려 있고 창밖으로 국화와 맨드라미, 과꽃 등 가을 꽃들이 만개해 있다면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거실이 온통 어질러져 있고 개와 고양이의 분비물로 가득하다면 추하다고 여길 것이다. 간단히 말하여, 우리의 눈과 귀와 코를 즐겁게 하는 것이 미라면, 불쾌하게 하는 것이 추다.
청각이나 시각을 통해 주어지는 쾌감, 미적 대상과 우리 내부의 영혼이 적합하여 아무런 어긋남이 없는 적의(適意, Wohlgefallen)가 바로 미다.(I. Kant: Kritik der Urteilskraft/민주식: 「미와 추, 아와 속」)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름다운 것은 생물이든,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물이든간에, 그 여러 부분의 배열이 일정한 질서를 가지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일정한 크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크기와 질서 속에 있기 때문이다.”(아리스토텔레스: 『시학』: 55)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이후에 논의된 것을 결합하여 정리하면, 미의 주요한 형상은 통일, 균정, 비례, 조화, 율동, 대조이다. 통일(unity)은 다양하고 복잡한 의미와 형상이 하나로 일관되게 합치하여 하나의 전체에 같이 소속하는 관계를 말한다. 균정(均整(symmetry)이란 사람이나 동물이 좌우로 대칭을 이룰 때 아름답듯, 좁게는 좌우 대칭, 넓게는 좌우 같은 부분이 서로 같은 분량, 형상, 인상효과 등을 갖는 경우를 뜻한다. 비례(proportion)란 팔등신의 비너스니 황금분할을 한 그림이 아름다운 것처럼 전체에서 부분 상호간의 비율 관계, 또는 한 부분과 전체 부분과의 비율이 직관적으로 쾌적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조화(harmony)란 석굴암처럼 둘 또는 둘 이상의 부분이 상이하게 대립하면서도 서로 어우러져 통일적 인상을 주는 경우를 이른다. 율동(rhythm)이란 시의 운율처럼 일정한 단위로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음, 또는 형체 운동의 분절을 말한다. 대조(contrast)란 다윗과 골리앗처럼 상반된 사물이나 형상을 이용하여 양자를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것을 뜻한다.
추한 것이란 이 형식의 법칙을 어긴 것이다. 전체 주제나 형식의 통일성을 벗어난 글이나 그림의 한 부분, 오른 팔이 기형적으로 큰 사람, 머리가 전체 몸의 1/5이나 되는 사람, 합창 도중에 지른 비명 소리, 운율을 어긴 시의 구절, 어설픈 색으로 칠해진 배경 하늘 등은 추한 것이다.
추한 것은 도처에 널려 있다. 불도저로 파헤쳐진 숲이나 오염으로 떼를 지어 죽은 물고기처럼 자연에서는 파괴되거나 에코시스템 자체에 이상이 생겼을 때, 인간의 경우 살해되거나 폭력으로 멍이 들고 피가 흐르고 신체가 손상당하였거나 질병에 걸렸거나 죽을 때, 사회의 장에선 부조리, 부패, 탄압과 마주칠 때, 문화의 장에선 야만과 공포와 주술과 만날 때, 우리는 추함을 느낀다.
이렇듯 미와 추, 미적 쾌(快)와 불쾌(不快)는 서로 대립적이다. 반면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에서 말하는 48서원(誓願) 가운데 제4원을 바탕으로 무유호추론(無有好醜論)을 편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무유호추론’

“‘설령 내가 부처를 이룬다 해도/나라 안의 사람과 하늘/형과 색이 같지 않고/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정각을 취하지 않겠다.’ 이 원의 의미는 ‘설령 내가 부처를 이룰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정토에서 여러 사람들의 형과 색이 같지 않고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 나는 정각을 취하지 않겠다.’라고 단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각을 취하다’라는 것은 올바른 깨달음을 얻어 부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알다시피 아미타여래가 되기 전의 법장보살이 세웠던 대원 중의 하나입니다. 이 원이 ‘무유호추의 원’이라고 불리는 것은 글 속에서 ‘호추가 없는’ 나라를 소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호추(好醜)라는 말은 현대어로 고치면 미추(美醜)입니다. 옛날부터 『정토군의론(淨土群疑論)』의 저자 회감(懷感)도 이것을 ‘형무미추(形無美醜)의 원’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정토에서는 모습에 미와 추의 구별이 없다’라는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몸의 대소라든가 용모의 상하라든가 그러한 차별이 없는 세계의 일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라고 주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의미를 좀 더 깊게 파고들어 미추의 이원(二元)을 허락하지 않는 구경(究竟)의 세계에서의 비원을 제시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야나기 무네요시: 『미의 법문』) “그래서 ‘미의 정토’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빠짐없이 아름다움에 받아들이는 나라로 이해해주면 좋겠습니다.”(같은 책)

예토와 정토가 하나이고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듯, 미와 추 또한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눈에는 형과 색, 아름다움 것과 아름답지 않은 것,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 사이에 분별이 없다. 서양에서, 아니면 일반인들이 미와 추를 구분하여 미를 숭상하고 추를 멸시하였다면, 야나기 무네요시는 미와 추 사이에 분별이 없음을, 바로 이런 미의 경지가 최상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대상의 아름다움을 보는 경지라고 선언하고 있다.

분별없는 미의 경지가 깨달음

기존의 불교미학이론이 불교미학이라기보다 불교철학을 별로 가공하지 않은 채 나열한 데 불과한데,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를 미학으로 전환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의 저서인 『미의 법문』과 무유호추론은 기존의 불교미학에서 진일보한 것이다. 또 이론에만 머물지 않고 실제로서 예술작품에 이를 적용하여 서민들이 사용하던 조선조의 막사발에서 천하제일의 명기가 갖는 미학을 해석해 낸 것 또한 탁월하다.

하지만 위에서 요약한 내용이 모두라 해도 그리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언부언(重言復言)하면서 간단히 한 장 정도로 언급해도 될 것을 책 한권의 분량으로 끌고 간 점, 이론에 대한 치열한 논증이 없이 제4원인 ‘무유호추의 원’을 그대로 ‘무유호추론’으로 전환하고 있는 점도 문제지만, 치명적인 한계는 미추(美醜)와 아속(雅俗)을 동일시한 오류를 범한 것이다. 그가 미와 추의 경계가 무너진 예술작품, 다시 말해 추한 것이지만 어느 작품보다 아름다운 미학을 내재하고 있는 것으로 거론한 작품들인 조선조 막사발, 민화, 옛 탄바의 미즈사시(古丹波水差)는 모두 추한 작품이 아니라 서민들이 만든 속스런 작품, 질박미를 갖춘 작품들이다.

아(雅)와 속(俗)은 동양 미학을 가르는 두 범주다. 사대부들이 창조하고 향유한 것으로, 성정의 올바름[性情之正]을 추구하고, 유가의 (통치)이념에 부합하며, 온유돈후(溫柔敦厚), 초탈(超脫), 무심(無心), 고아(古雅) 등의 미(美)를 추구한, 아어(雅語)와 아문(雅文)으로 이루어진 작품이 아(雅)이다. 반면에, 서민들이 창조하고 향유한 것으로 성정의 자유를 희구하고 정(情), 이(利)에 좌우되어 속어(俗語)와 속문(俗文)으로 질박한 감정과 정서를 표현한 것이 속(俗)이다. 사대부의 미학에서 보면, 속은 질이 낮은 예술이거나 아예 예술도 아니다.

미추-아속 동일시한 오류 범하기도

하지만 이런 관점과 미학은 중세 말에 뒤바뀐다. 이미 17세기에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은 “정(情)이란 마음이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인 것(情者 心之感於物而動者)”으로 정의하고 “시는 본래 뜻을 그리고 정을 말하는 것(詩本所以寫意道情)”으로 본다. 그는 시를 정(情)의 표현으로 간주하고 충과 효, 의(義)와 같은 성정의 올바름[性情之正]보다 정의 참됨[情之眞]을 내세운다. 즉 시(詩)는 정(情)의 발로이며 꾸밈과 허위가 없는 정을 진솔하게 표현할 때 시는 생각함에 바르지 못함이 없는 경지[思無邪]에 이른다는 것이다.

진(眞)의 의미가 조선조 전기에 당위적이고 도덕적인 선(善)과 통하는 것이었다면, 속의 미학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인위와 당위를 떠난 무위(無爲)이고 자연이고 현실과 마음 그 자체이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해석에 따르면, 이는 어린이의 마음의 눈[童心之目]이다. 즉,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전파견문론』처럼, 당위적이고 도덕적인 목표, 인위적인 조작, 일체의 가식과 선입견, 교육과 문화에 의해 교화되고 세련된 모든 의식에서 벗어나 진솔하게 어린이의 마음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다. 이들은 더 나아가 서민들이 쓰는 일상어를 질료로 하여 노래로 전달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구름이 피어오르듯 감동을 준다고 주장하였다.

아의 미학에서 볼 때 ‘소나무’를 ‘겨울에도 푸른 충신의 지절(志節)’로, ‘까마귀’를 ‘새끼가 어미를 부양하는 효(孝)’로 노래하는 것이 아름다운 시였다면, 속의 미학에서 볼 때 ‘소나무’를 ‘님의 단단한 성기’로, ‘까마귀’를 ‘연적(戀敵)을 죽음으로 이끄는 사자’로 표상하는 것이 진솔한 아름다움인 것이다. 이처럼 야나기 무네요시가 말한 무유호추론은 이미 17세기에 서민들이 그들의 언어로 자신의 정서를 진솔하게 표현한 것을 아름답다고 한 미학과 동일하다. 그의 미학은 불교의 미학이라기보다 진보적인 유가의 미학에 가깝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