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칼럼]무편무당
[이종찬 칼럼]무편무당
  • 법보신문
  • 승인 2008.09.22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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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고 무리지음 바로잡는 게 정치
통치권자는 편당에 쏠리지 말아야

사람살이란 홀로 삶이 아니기에 서로 어울림으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살아감에 있어서 자연스런 모임으로 결합되는 첫 단계가 가족이니 이것은 윤리적 결합으로서 이해득실의 계산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삶의 범위가 확대되면서 사회라는 집단의 구성이 형성되면 여기서는 어쩔 수 없는 이해득실의 장단점을 계산하게 된다.
이러한 이해득실의 계산이 개재되면 어울림에 편차가 생겨 원근(遠近) 친소(親疎)의 간격이 벌어져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쏠림 현상이 일게 된다. 이러한 쏠림 현상이 커지면 하나의 집단, 하나의 사회로 기울어지는 불균형이 조성되어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가 큰 공간으로 확산된 것이 국가이고 국가의 균형을 잡는 것이 정치이니, 정치에는 항시 이 쏠림의 불균형이 없도록 조절하는 기술을 강조하게 된다. 이 불균형의 조절 방향을 일러 무편무당(無偏無黨)이라 한 것이다. 이 말을 풀이하면, ‘기울어짐이 없고 무리지음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의 출처는 동양 고전의 역사서요 정치지침서인 『서경(書經)』에서 유래한다. “기울어짐이 없고 무리지음이 없어야 다스림의 길이 튼튼하다(無偏無黨 王道蕩蕩)”하였다. 왕도란 올바른 정치를 이르는 말이다. 올바른 정치를 하려면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안되니 끼리끼리의 무리지음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삶에는 가깝고 멀다는 친근과 소원이 없을 수 없으니 자연 어울림의 쏠림이 없을 수 없고, 어울림에는 자연 가까운 이에게 쏠리게 마련이다. 그래서 경계의 교훈이 항시 뒤따른다. 가까운 이에게 어쩔 수 없이 쏠리지만, 정상적 친소의 거리를 두어 편애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순자(荀子)』에 “기울고 무리짓되 바르지 못함은 편벽되어 듣기 때문이다(偏黨而無經 聽之也)”라 함이 있다. 삶의 어울림에 어쩔 수 없이 편당이 있더라도 정도를 지키면 이 편당은 기울어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의 정치 수단이 어쩔 수 없이 정당의 맞섬에서 최선의 방법을 찾는 것이라면, 무편무당이 아니라 ‘유편유당(有偏有黨)’이니, 위에서 제시된 『서경』의 가르침과는 정면적으로 충돌되는 느낌이다. 무편무당이라면 양당정치로 대립되는 현대정치가 설 수가 없지 않는가 한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이 말은 외형적 어울림의 쏠림을 말함이 아니라, 삶의 정서적 쏠림을 말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잘못된 쏠림을 ‘편애’니 ‘편당’이니 하여 경계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다문화가 어울린 사회이다. 사회 통제의 방법만이 아니라, 개개인의 정서적 생활이나 정신적 의지처인 종교적 믿음까지도 다양해졌다. 여기에 나만이 옳다고 주장한다면 정치적 충돌 뿐만 아니라 문화적 충돌도 불가피한 상황이 된다. 요즘 나라 안이 종교적 갈등의 조짐이 보이는 듯하여 적이 우려되는 점이 있다. 그 발단이 어느 편이나 어느 특정인에게서 유발되었다 하더라도, 종교인 한 분 한 분의 당체로 돌아보면 스스로 자중자애해야 할 일이지 남의 탓을 할 일이 아니다.

노자가 “빛을 숨기고 먼지와 함께하라[和其光同其塵]”란 말이 있다. 불가에서는 이 말을 인용 ‘화광동진’을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려면 보살의 지혜 광명마저도 숨기고 번뇌가 충만한 먼지 세상에 나아가 중생과 인연을 맺고 차례로 제도하라는 의미로 쓰인다. 모두 내탓이라 하며 정진합시다. 다시 강조하건대, 나라의 통치권자들은 위 순자의 말 ‘偏黨而無經 聽之也(편당이무경 청지벽야)’를 항시 깊이 새기기 바랍니다.

이종찬 동국대 명예교수 sosuk0508@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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