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생이란 말은 불교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말로서 고통의 세계에 갇혀 있는 생명들을 놓아준다는 뜻이다. 사람의 목숨만 귀중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아 있는 모든 생명들은 모두 귀중하다. 생명이란 우주와 통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며 또한 창(窓)이며 부처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신성 존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생이란 고통과 슬픔, 괴로움이 있는 것을 풀어주고 놓아주어 살아 있는 동물이 스스로 자유의 경지를 얻도록 해주는 데에 있다.
방생의 유래에 대해서는 『금광명경 유수장자품』에 자세히 나와 있다.
“유수라는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하루는 유수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들이를 하다가 연못가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못은 오랜 가뭄으로 인해 물이 말라 많은 고기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것을 본 유수는 두 아들과 함께 주머니와 그릇을 가지고 먼 곳에서 물을 길러와 고기들을 살렸다. 나중에 유수는 그 공덕으로 인해 십천천자(十千天子)로 환생하였다.”
또 『불설관정칠만천신왕 호비구주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나사열지라는 곳에서 비구들과 같이 보리산중 천제석실에 가셨는데 그 때 그곳에 있던 많은 비구들이 서로 불안한 자세로 몸을 흔들면서 잠시도 조용하지 못하는 것이 마치 그물 속에 들어 있는 고기 떼와 같았다. 이 때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내가 설하는 관정장구를 자세히 들어보라. 너희들은 과거에 어족(魚族)들로서 금세에 사람의 몸을 받고 났으며 아직도 전생의 습기가 그대로 남아 있어 몸이 안정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이제 관정장구를 설하여 그물에 걸린 고기들의 생명을 구하게 되면 그 공덕이 한량없다는 것을 알도록 하리라”고 하셨다.
이것이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방생에 대한 최초의 경전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오늘날 불가에서 방생을 하는 것도 이 경전에서 유래가 된 것이다. 방생은 존귀한 생명을 해방시키고 고통을 덜어주기 때문에 커다란 공덕이 아닐 수 없다.
옛날 『도서』(都序)라는 책에 보면 ‘자미해탈(自未解脫)하고 욕해타박(欲解他縛)’이란 말이 있다. 이는 ‘내 몸도 꽁꽁 묶여 있는 처지에 남의 얽힌 것을 풀어보겠다’는 말이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의 생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한 의미에서 방생이란 다만 육신적(肉身的)인 생명을 일시 해방시키고 연장시켜주는 것도 물론 공덕이 된다고 볼 수 있지만 방생의 참뜻은 일시적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생명을 얻도록 하는데 있다.
예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어느 사람이 소를 보고 “보리심을 발하라”고 하였더니 소가 이 말을 가만히 듣고 난 다음 하는 말이 “너는 안하니” 하더라는 것이다.
이 말은 자신이 확실히 보리심을 발하지도 못한 처지에 소에게 보리심을 발하라고 하는 말이 너무도 가소로운 일이라는 것을 비웃는 경책이다. 불교에서는 법력(法力)은 무엇보다도 제일 소중하다. 법력이란 오욕과 삼독이 끊어지고 오랜 정진과 수행에서 이루어진 인격의 향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력으로 행하는 방생이야 말로 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월서 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