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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 특별기고] MB정부규탄 불교도대회를 보고[4]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08.10.01 15:08
  • 댓글 0

“생명·생태 문제에 있어 대통령은 완전히 ‘건달’”

생명·평화시대…대중통합의 원만성 확립은 대통령 책무
뉴라이트에게만 손 내미는 건 반쪽 소통에 매달리는 것

“바로 그것이다.”
“머레이·북친은 어떤가?”
“실질적으로 아득한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드볼·서션스의 심층생태학은 어떤가?”
“낭만적 동기는 있으나, 문화와 인간의 자유를 설명할 수 없다.”
“기든스나 울리히·백 등의 성찰적 근대화 철학 등은 어떤가?”
“싸구려 상품이다. 이젠 거들떠보지도 않는 낡은 것이다.”
“벌써?”
“유럽시장은 본디 무정하지 않던가!”
“무엇이 대신 유행하는가?”
“불교다.”
“유일한가?”
“아시아샤머니즘과 함께다.”
“어떤 샤머니즘?”
“고대의 여신(女神)이나 모권제(母權制)신화다.”
“불교를 찾는 원인은?”
“영성고갈, 불안, 세계가 세계 자신을 인식하는 근본적 만물해방의 갈증…”
“선(禪)말인가?”
“그렇다. 그것과 함께 영적인 우주론이다.”
“생태학과 유럽녹색당을 대신할 신사상과 운동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우리는 동아시아를 지켜보고 있다. 전세계에서 그것이 가능한 곳은 그 곳 밖에 없어 보인다.”
“왜인가?”
“불교 때문이다. 불교가 기본이 된다면 그것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수행자와 지성인들의 마음은 하나로 통한다. 김지하 시인은 현대를 생명·평화의 시대로 규정하고 있고,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는 상생과 화합을 기원하며 200km 오체투지 순례에 나섰다.

불교를 구박하는 현 정부의 녹색 짝퉁 타령은 해괴할 뿐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심한 피로감 속에서 생각했다.
환경이라는 말이 엉터리이듯이 녹색짝퉁의 시대도 끝나가는구나! 이젠 불교를 붙들고 새로운 영적 생명의 사상과 운동을 창조해야 할 때다. 쓰는 말부터 고쳐야 한다.
‘환경(環境)’ 이것은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빙 둘러싼 모든 자연은 물건들의 들러리, 무대장치란 뜻이다. 옳은가? 사람은 말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환경이란 말 폐기하지 않는 한 환경문제는 절대로 해결 못한다.
‘녹색’은 어떤가?
생명이 왜 녹색뿐인가? 무지개의 일곱 빛은?
그러나 한국과 동아시아 전통의 무지개는 아홉 빛깔이다. 아홉과 아홉이 곱해서 ‘천부경’의 생명신비수인 ‘81’이 되는데 아마도 바로 이 ‘81’이 앞으로 올 생명 또는 ‘신령컴퓨터’의 기초수학이 될 듯하다. 그러나 그 생명의 ‘81’이 세 번 곱해져야 영, 또는 마음의 수(數)인 ‘531,441’이 된다. 돌았나?
요즈음 바로 그 불교를 ‘도라이’ 보듯 우습게 보고 차별과 구박을 어쩌지 않는 현정부가 바로 그 녹색짝퉁타령을 불러 대는 것이 해괴할 뿐이다.
저탄소 녹색성장!
맘대로?

내가 아는 독일의 몇몇 생태기업가들이 있다. ‘게오르그·빈터’같은 이가 대표적인 예다. 이른바 이산화탄소를 적게 배출하는 유명기업인으로 그는 아름답고 역동적인 피아노 연주로도 유명하지만 동아시아 공부로도 이름이 났다. 특히 참선과 불경공부로!
누군가가 좀 배워야 하지 않을까?
다섯째,
러시아의 대신비고 브라마트스키의 계승자요 독일녹색운동, 유기농운동의 창시자이자 영성대안학교 ‘발도르프’의 창시자와 ‘루돌프·슈타이너’는 현대와 같은 대혼돈기에 가장 탁월하고 참다운 윤리는 ‘모심’이라고 했다.
호주의 생태학자 발·플럼우드 역시 현대와 같은 대혼돈을 넘어서는 유일한 길은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 등 일체존재를, 모두 다 거룩한 우주공동체로 ‘모시는 문화와 생활의 대변혁’ 뿐이라고 거듭거듭 강조한다.
한국 유학(儒學)에서도 퇴계나 남명은 공경(恭敬)을 인간의 최고 윤리로 강조하고 있다. 예수 역시 최고의 사랑을 다름 아닌 섬김이라고 했다.

동학은 우주와 생명과 영의 비밀을 바로 ‘모심(侍)에서 찾는다.
오늘 이 상처받은 생명의 시대에 있어 모심은 구체적으로, 실천적으로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것뿐 10대 소년 소녀들, 간난애를 유모차에 태우고 나와 미친 쇠고기를 아이에게 절대로 못먹이겠다고 외치는, 그러나 노래하고 춤추는 젊은 엄마들, 그 평화를 지키는 여성들을 마귀라고 한마디로 찍어대는 몇몇 예수쟁이(그들은 목사, 즉 양을 돌보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팔아 제 뱃떼기를 채우는 날강도로서 바로 예수의 회초리감들이다)들의 위선의 향연이요 권력에의 아첨인가?
불교는 이 경우 ‘나무(南無)’란 말을 쓴다.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부처는 무량광, 무량수(無量光 無量壽) 다함없는 빛의 평화와 다함없는 생명이겠다.
우리에게 더욱 다가오는 설명이 원효스님에게 있다.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疎)만 앞에서 이 ‘나무’의 뜻을 깊이 새겨 ‘귀명(歸命)’이라 풀었다.
‘목숨을 들어 목숨의 진리에 돌아간다.’
생명운동은 생명을 바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다.
아마도 ‘모심’의 어떤 예들 가운데 원효스님의 이 설명, 즉 ‘목숨에 돌아감’만큼 절실한 것은 또 없을 것이다.
불교는 목숨의 진리다.
그 목숨의 진리는 목숨을 바쳐야 깨닫게 된다는 것.
그런데 이번 불교차별사태 앞에서 어떤 스님들이 자기 몸을 불사르는 소신공양(燒身供養)을 각오하고 결의를 내비추었다고 한다.
반대다.

나는 절대 반대다.
지금까지도 역시 일부 멍청이들에게 반역자라는 욕을 먹고 있지만 1991년 노태우정권 당시 젊은 학생들이 정권퇴진을 요구하면서 연쇄분신자살을 한 적이 있는데 그것에 대해 나는 완강히 반대하고 가차없이 질타했다.
그 때 내가 한 말이다.
“한 인간의 생명은 정권보다도 훨씬 더 크다”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한 스님의 생명은 정권과는 도무지 비교되지 않을 만큼 거대하고 심오한 우주적 지혜의 빛 그 자체다.”
그러면 원효스님은 왜 목숨에 돌아간다고 했을까? 왜 그 돌아감은 목숨을 들어야 한다고 했을까?
한자로 ‘歸命’은 스님의 원문이고 한글로 ‘목숨을 들어’는 그 ‘소(疎)’의 번역자인 이기영(李箕永)박사의 첨언(添言)이다. 멋지기는 하지만 역시 조금 가볍다.
노조파업 때마다 등장하는 노래,

‘나 먼저 가노니 산 자여 따르라!’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죽음 나름의 아름다움이긴 하다.
그러나 함부로는 결코 불러서 안되는 노래다.
그런데 그것을 마치 유행가처럼 맨날 흥얼흥얼 부르고 있다. 그렇게 흥얼흥얼 자주 불러대면 인간마음 안엔 저도 모르게 ‘시체선호증(necrophilia)’이 생긴다고 ‘융심리학’은 쓰디쓰게 가르친다.
경계해야 한다.
아미타부처가 빛과 목숨, 즉 ‘생명과 평화의 부처’임을 명심하자.
원효스님에 걸어서 죽음을 미화해서도, 베트남의 그 뭇스님들을 걸어서 ‘소신공양’을 말해서도 안된다.
절대 안된다.
지금은 생명과 평화의 시대다.
돌아감이 참다운 모심일 때 그 첫 번째 대상은 당연히 제 목숨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원효 아니라 원효할아버지라도 단연코 안된다.
더욱이 스님은 ‘목숨을 들어’ 즉 ‘바쳐서’란 조건을 걸지 않았다. ‘산자여 따르라’노래 부른 적 없다.
부처님은 피안이 아닌 지금 여기 차안 바로 살아있는 내 목숨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현대 불교는 고대불교가 이미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은 생명과 생태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을 내세워 케이블카 설치에 여념이 없다.

여섯째,
녹색성장을 주장하면서 원자력타령을 하고, 태양열 운운하면서 그 예산을 삭감하며 촛불들이 그리도 주장하는 물을 장사꾼에게 넘기고 가스를 넘기고 의료보험을 넘기고 교육을 예전보다 더 강압적인 형태로 밀어붙이고 그것이 ‘뉴라이트’랍시고 윗통을 벗어붙인채 벌죽벌죽 웃는다.
그리고는 ‘뉴라이트더러만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고 있다. 저런 쯧쯧쯧!
왜 ‘반쪽소통에만 매달리는 것인가? 잘하는 짓인가?
사회라는 이름의 ‘대중통합의 원만성 확립’은 대통령의 책무다.
제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무슨 큰소리할 자격이 있는가?
복수나 원한으로? 토목공사하듯이 짜르고 용접하고?
사회생명파괴가 대통령 직무인가?
대운하 토목공사의 연장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이란 옛 왕조시대의 얼굴보다는 그래도 조금은 더 나아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과연 나은가?
무엇이 문제인지 알기나 하는가?
옛 왕도정치는 자연이나 생명에 대해서 엄청나게 까다로웠다.
물은 아래로 흐르고 누구나 맑은 물을 먹어야 한다. 불은 위로 오르고 함부로 쓰지 못하도록 방제해야한다.
만약 물이 위로 올라가고 (대운하토목공사의 경우처럼 문경새재 위에 갑문을 달아 물을 산 위로 200미터 퍼 올려서 거기 배가 다니도록 하려 한다던가) 물을 아무나 손대서 더럽히거나 약을 섞어 팔게 할 때엔 사간원(司諫院)은 물론 대신들이 전부 임금에게 달려와 그 도덕적 책임을 따져 매섭게 묻는 것이 다름 아닌 왕도정치다. 그리하여 임금은 책임을 지고 몇일간 금식하고 하늘에 빌던가 했다.

이 자연생명의 책임문제에 있어 왕조시대보다 현재의 대통령이 더 편하다면 큰 문제다.
대통령의 자연생명, 물, 가스 등에 관한 책임을 훨씬 더 무겁게 요구하여 소환제나 국민투표보다 더 엄격한 제약을 법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생태, 생명문제에 있어 요즘의 대통령은 완전히 ‘건달’이다.
그래도 되는가?
민주주의는 옛 왕조 보다 더 퇴보한 것인가?
녹색을 떠들어대면서 원자력을 대체에너지로 뒤받히고 있는 정부를 우리는 무엇이라 보아야 하는가?
제임스·러브릭은 위대한 과학자와 영국정부의 발언이라고 핑계댄다고 한다.
오 완전한 ‘짝퉁’들이다.
이 다음기회에 어디에서든 러브릭비판을 자세히 쓰겠다. 또 예수를 믿는다면서 생명을 우습게 아는 자들, 성프란치스코의 만물형제사랑 등에 관해서는 단 한마디도 모르는 자들이 진짜 기독교인인지 의심을 내야 할 때다.
절집의 옛 조실(組室)스님이 무거운 석장(錫杖)을 짚고 절에 그것도 땅이 울리도록 쿵쿵찍으며 천천히 걸었던 것은 그 소리에 놀라 개미나 벌레들이 몸을 피하라는 불살생(不殺生)의 계율 때문이었다 한다.
아는가?

알면 어찌해야 하는가?
뭐든 장삿꾼 사깃꾼들에게 넘기기만하면 그것이 ‘우파’인가?
틀림없는 에코·파시즘의 시작이다.
우리의 생명을 이런 정부 아래서 어디에 맡겨야 하는 것인가?

민주주의 국가 대통령이란 왕조시대 얼굴보단 나아야

또 묻는다.
물을 장삿꾼에게 넘기는 것이 곧 ‘선진화’인가?
선진화가 무엇인가?
뉴라이트 주장대로라면 유럽 흉내내기 아닌가!
나는 오스트리아 등 여러 유럽을 여행하면서 보수당정권이 물, 석수는 물론이고 강물까지도 엄청나게 섬세하게 관리하고 보호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가스 따위 또한 물론이다.
나아가 생명문제에도 좌우가 있는지 묻고 싶다.
선진화가 도둑놈이나 장삿꾼에게 단 하나뿐인 목숨 내주는 제도요 발전이념이요 국가목표가 될 수 있다는 이론은 도대체 누가 착상한 것인가?
문제는 무식에 불성실에 콤플렉스에 무책임이다.
그것도 담론이요 정책일 수 있는가?

일곱째, 마지막얘기다.
세상은 디지털얘기와 범불교도 시국집회얘기로 가득찼다. 둘은 구체적으로 무슨 관계인지 말하고 다음 그 집회 소식으로 넘어가자.
미국MIT의 미디어 테크날로지 교수요 미디어랩(media lab)의 창설자 니콜라스 네그로돈테의 ‘디지털되기(Being Digital)’에서 한구절 인용해 보자.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아날로그의 공간이다. 우리 눈으로 볼 때 세계는 디지털이 아닌 연속성의 세계이다. 아날로그의 세계에서는 갑자기 커지거나 꺼지는 일, 검정에서 흰색으로 바뀌는 일, 단계적 변환없이 어떠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급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마이크로의 단계에 다가서면 이러한 현상은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
전선을 흐르는 전자나 우리 눈으로 들어오는 광자의 차원에서는 사물이 불연속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연속적이라고 생각하는 수많은 사물은 사실 수많은 독립구성요소로 이루어진다.
이 책(아날로그 매체)은 대충 1,000,000.000.000,000,000,000,000개의 아톰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불연속성과 생명의 관계는 어떤가?
생명을 ‘연속성’ 그 자체로만 확신하고 있는 서구인들에게 제일 어려운 이야기가 생명의 불연속성, 또는 불연속적 연속성에 관한 동아시아의 그 흔한 생명담론들인 듯하다. 그 중에도 그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경락(經絡), 기혈(氣穴), 단전(丹田)또는 풍수지리와 연관된 기(氣)이야기를 해볼까?
동아시아 사람 중에도 사람 몸 속에 일년 365일과 똑같은 경략계의 움직임이 없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거나 안다해도 그것이 피나 물처럼 선적(線的)으로 연속적으로 흐르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침(鍼)이나 뜸(灸)이거나 부황 같은 우리민족 특유의 생명의술을 이해할 도리가 없다. 그래서 아직도 불법(不法)의료행위로 처벌대상이다.
경락은 불연속적이다.
그것은 마치 하늘의 별이나 초원의 꽃처럼 여기 저기서 ‘반짝’ 뜨거나 혹은 ‘살폿’핀다.

그렇게 각각 제 나름으로 열리거나 피는데 어떤 정신(神靈)을 동반한 기(氣)의 변화(化)가 상호작용하여 치유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신비스럽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MRI나 렌트겐으로 관찰해서 제 눈으로 직접 판독하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서구과학자들이 못 믿을만도 하다. 또 인간의 몸은 약창고로써 뜸이나 침이 건드려만 주면 몸 자신이 치료한다는 것이다.

이것도 서구인들은 납득하지 못한다.
그런데 치료가 되는걸 어쩌랴!
이래서 서양의학이나 중국의술에게 억압당하며 숨도 못 쉬는 뜸·침·부황과 황제내경(黃帝內徑·본디 한민족의 생명과학)한국파들이 법정에 불려다니는 판에도 미국인·유럽인들은 눈에 불을 켜고 관심을 쏟는 것이다.
깨끗이 치료가 되는데에야 어쩔건가?
그 서구인들이 물질단계, 아톰과 비트단계에서 불연속성의 비밀에 눈을 뜬 것이다. 그래서 컴퓨팅이 가능해졌다.
다음단계는 무엇일까?
생명의 불연속성이다. 이때는 복잡해진다. 불연속과 연속의 복합생성이다.
그 다음 단계는 무엇일가?
영성이요 신성일 것이다. 아마도 연속성 쪽이 강세가 아니겠는가.
그 다음단계는?
그 때는 컴퓨팅이 아닌 텅빈 무궁(無窮)과 무극(無極)의 무한네트워킹 즉 ‘대화엄’일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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