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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 특별기고]자제와 열정이 새 문명의 출발점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08.10.21 10:45
  • 댓글 0

MB정부 규탄 불교도대회를 보고<7·끝>

 
지난 8월 27일 불교도대회에 참석한 1만 2000여 스님들은 세상의 소통을 한마음으로 기원했다. 김지하 시인은 이를 새 문명의 출발점으로 평가했다.

나는 옛날 학생시절 탈춤을 추었지만 오래도록 마당에서는 추지 않고 새벽 수련 뒤에 혼자서 추곤 하였다. 그런데 그 큰 광장에서 그 빨라지는 목탁소리와 독경소리에 내 몸의 밑바닥으로부터 춤사위가 뜀뛰어 펄펄 살아오르기 시작하는 것 아닌가!
생명운동이다. 말만 운동이 아니다. 진짜 생명의 진짜 운동이다. 아니, 이럴 수가 있나! 생명운동은 이래야한다.
그 생기는 곧 동작에서는 ‘기화신령(氣化神靈)이라 부르는 것인데, 그런데, 정말 이럴 수가 있나!
아, 진짜 이럴 수가 있나!
그 몸속에서부터 터져 오르는 춤기운은 자연스럽게 이제껏 확성기에서 외치던 문구와 구호와 항의와 거기에 대해 맞받던 추임새인 ‘와아,’ ‘옳소’의 외침, 그 모든 것에 대한 빈틈없는 동의(同意)를 끓어오르게 하는 것 아닌가!
이럴 수가 있나!
이럴 수가 있나!
바로 풍류(風流)다.
화백 뒤의 대풍류(大風流) 바로 그것이다!

만사가 만사를 깨닫기 시작

옛옛 우리 조선시대 신시가 열리고 그 치열한 화백회의 뒤에 어느 정도 이성적 동의에 도달할 때는 이른바 팔여사율(八呂四律), 팔풍사유(八風四維)의 대풍류(大風流)가 크게 일어나 이제는 아주 영성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완전합의, 전원일치, 만장일치에로 그 화백차원을 드높여 완성해 버렸다고 하는데 바로 그 풍류인 것이다.
불교나름의 화백이라 그 그런 화백 나름의 대풍류다.
나는 이 지점에서 거의 만족에 도달한다.
그러나 역시 ‘가만히 좋아하는’ 만족이다. 바로 이것, ‘자제와 열광,’ 이것이다. 이것이 곧 새 문명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시청 근처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수많은 사람들, 불자들이 싸인을 부탁해 얼른얼른 해주고는 숭례문 방향으로 빠져나간다. 나가는 도중에도 내 눈에 옴팍하게 드는 것은 아주머니들이 서로서로 인사나누기 바쁜 것과 여기저기 빌딩들 아래 무더기무더기 모여 앉아 깃발을 흔들고 있는 태연한 불자들의 그 느긋한, 그러나 상기된 모습들이다.
참 보기 좋다.
광장 근처, 통제된 거리거리의 차들, 차들, 사람들, 물건들, 말들, 생각들, 경찰들, 닭장차들에서 까지도 그 갇힌 내면으로부터 흰 빛이 배어나오기 시작한다.
내 눈에 그것이 실제로 보인다.
전혀 환상이 아니다. 미친 것도 아니다. 눈부신 것이다.
아하! 화엄의 도입부에서는 이런 감각이 현실적으로 정상적 상태에서도 일어나는 것이로구나!
하늘엔 도리어 구름들이 빨리 몰켜들고 목탁소리, 독경소리 반복되며 더욱 빨라지면서 새 세계의 훠언한 예감이 내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세계가 세계를 인식한다는, 만사가 만사를 깨달아가기 시작한다는 그 대 장관의 예감이 내게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한다.
목탁소리, 독경소리 더욱 더 고조에 오르는데 그 앞을 지나는 사람 걸음들은 도리어 더 느려지고 눈동자들이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빛을 발하고 있다. 수없이 많은 눈빛들!
이것은 또 무엇일까?
아마도 범불교도대회 참가자들이 태평로, 세종로, 종각을 지나 조계사 쪽으로 행진을 시작하려고 할 바로 그 무렵, 나는 삼성 본부건물 앞에 와 있었다.
숭례문 쪽으로 내려가는데 문득
픽-
웃음이 난다.
동시에 내 속 소리가 올라온다.
‘촌놈들!’
아마도 불자들을 가리키는 말일 터이다.
그때 불현듯 깨닫는다.
“아!
나는 동학당이었지!”
뒤이어 마치 귀신불처럼 번뜩 -
서경석 목사가
“불교는 더 성숙해져야 한다”던 그 소리가 나를 엄습한다.
같은 말 아닌가!
또 뒤이어 나는 내 자신에게 나도 모르게 한마디 뱉는다.
“에이 순 촌놈!
더 성숙해져야돼!”
그래.
올해 불기(佛紀)는 2552년이다.
해가 반짝하고 얼굴을 내민다.
4시 정각이다.
일산으로 돌아오는 길에 택시 안에서다.
한국 시민사회의 대표적인 국민 정치평론가이신 택시 운전기사양반이 한 마디 하신다.
“우리나라 주택문제 큰일이에요.
모조리 아파트만 지어대니 단독주택은 씨가 말라 버릴거에요. 살림집은 다양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불교계도 폐습 뜯어 고쳐야

-그렇다, 화엄세계가 되어야 한다.
“나는 10년 전에 일산 이사했는데요, 10년전 풍동 땅값이 평당 60만원, 그뒤 5년 지나서 800만원, 지금은 아마 수천만원일거에요. 하긴 그러니 단독주택 마음이나 먹을 수 있겠어요?”
-어흠, 가장 중요한 정치문제다.
평론가께서 행주산성 근처에 와서는 난데없이 장경동이라는 목사욕을 시작한다.
“그런 건 목사가 아니라 예수쟁이에요.”
내가 묻는다.
“불교신자세요?”
“아니요.”
“그런데 왜 욕해요?”
“누가 봐도 싸가지 없는 녀석 아니에요?”
“하긴 그렇군요.”
“그런 것들 때문에 기독교 시세 폭락하는 거에요. 왜 그런 것들을 목사로 내세우는 거에요? 본래 타고나길 싸가지 없는 것들이죠! 말이나 돼요?”
어째서 택시기사들을 최고의 평론가라고 부르는지 그 까닭을 참으로 실감한다.
신도림동 빗물펌프장 근처에 이르러서는 몹시 배고팠지만 갈 때처럼 서푼짜리 분노는 없었다. 텅 비었다.
빗물처럼 펌프질을 해서인가?
웬일인가?
가만히 예수가 좋아지기 시작한다.
가만히, 가만히!
그러면서 평소 내가 안 좋게 생각하던 불교의 힘들이 뚜렷이 새겨지기 시작한다.
내 스스로 끔쩍 놀랄 정도로!
첫째,
내가 존경하는 한 스님이 늘 개탄하는 여러 스님들의 과도한 축재(蓄財), 으리으리한 외제 승용차, 아무 소용도 닿지 않는 번거로운 사치들!
둘째,
이미 만해(卍海),성철(性徹) 큰스님들이 공적 태도로서 드러낸 바 있는 민족토착적인 민중신앙들, 삼신각(三神閣), 칠성각(七星閣), 환웅전(桓雄殿), 북극전(北極殿) 들을 절집에서 싸그리 청소하거나, 아니라해도 그대로 두고 있긴 해도 사실은 여지없이 경멸하거나 평가절하하는, 지금에까지도 남아 있는 그 교만(驕慢)!
보편은 특수 속에서만 산 듯이 사는 법….
어떠한 진리도 이 법칙에서는 못 벗어난다.

모심의 선(侍禪)이 개벽의 전제조건

셋째,
내가 평소 존경해마지 않는 훌륭한 스님들까지도 못 버리는지 안 버리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되먹지 못한 반말. 절집의 조금 아랫사람들한테는 여지없이 당연한 듯 뱉어내는 그 반말들!
사실 내가 카톨릭에 정나미가 삼천리는 떨어져 결국엔 교회를 나와버리게 만든 몇 가지 이유중 하나가 바로 그 신부라는 사람들이 남녀노소 불문하고 뱉어 내는 그 반말을 절집에서도 그대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인격 문제가 아니라, 불교 교리와 그 오랜 관습적 체계 때문일 것이다. 이런 폐습을 그 사상과 철학 자체에서부터 크게 문제 삼아 근본적으로 뜯어 고치지 않는 한, 불교에 의한 새 문명 창조나 화엄개벽은 이미 배 띄우기도 전에 물 건너 간 일장 춘몽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수직구조가 화엄학이나 선(禪)적인 자유와 무슨 관계인가? 더구나 촛불들 앞에서?
동학의 저 철저한 모심(侍)에서 크게 깨우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철저한 개벽적 모심 없이는 민중 뿐만 아니라 중생구제, 물질해방의 생명평화는 위선의 향연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화엄은 개벽을 절대적 필요로 하는 것이고 그 개벽은 ‘모심의 선(侍禪)’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부디 가슴에 깊이 새기시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27일 광장의 그 ‘가만히 좋아하는’ 불교 나름의 촛불, 그 ‘흰그늘’은 이미 내 영혼 안에서 잔잔하게, 그럼에도 치열하게 타기 시작했음을 이젠 굳게 믿어도 좋다.
得命!
和淨!
無碍!
이것이 내 논평의 세 마디 총괄이다.
8월 29일 밤 11시 30분
일산 노루목에서 모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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