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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20주년 초청대법회]조계종 원로의원 고 우 스님자기가 오해하고 착각한 것 바로 보는 게 깨달음
단일로 독립된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착각
모든 수행의 기본은 공을 이해하는데서 출발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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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8.10.28  17:3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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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이 창간 2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법회에 많은 분들이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잘 하나 못하나 선방 주변에서 살아온 사람이라서 어디를 가나 선(禪)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선에 대한 이야기를 드릴텐데, 사실 부처님 가르침이 여러 이야기로 전해지고 수행 역시 다양하지만 말과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따라서 선을 이해하면 다른 수행법도 다 이해할 수 있고, 반대로 다른 수행법을 이해하면 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이 다른 수행과 조금 다른 점을 비유하자면 할머니가 손자에게 과일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손에 과일을 놓아주고 이것이 과일이라고 알려주는 것을 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손에 직접 놓아주는 말을 듣고 어떤 분들은 그 자리에서 다 이해하고 불교가 무엇인지, 부처님 가르침이 무엇인지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깨달은 세계가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 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고 이익을 주는지도 다 알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손에 과일을 놓아주는데도 이것을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드는 것입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사과를 못 본 분은 없겠지요. 그런데 이 선이라는 과일은 우리가 실제로 한 번도 못 봤기 때문에 손에 놓아줘도 과일인지 무엇인지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부처님은 깨닫고 나서 당신 스스로 굉장히 행복해지셨습니다. 이것을 중국의 운문 스님은 ‘매일 매일이 좋은 날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매일 매일이 좋은 날이 되는 이 과일을 표현하는 게 또 어렵습니다. 선에서는 그 과일을 깨달아서 알았다고 하면 이 건물밖에 있는 사람이고, 몰랐다고 하면 죽은 송장과 같다고 했습니다. 어렵지요. 이런 점 때문에 선에 접근하기가 굉장히 힘들다고들 합니다. 또 어려우니까 오해를 많이 하기도 합니다.

신의 입자 ‘힉스’가 곧 ‘공(空)’

그러나 실제로 본 적이 없고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지, 이 말이 바로 할머니가 손자의 손에 과일을 놓아주는 그런 말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말 한마디 듣고 한 순간에 부처님이 깨달은 세계를 안 분이 있는가 하면 1주일이 걸려 깨달은 분도 있고, 한 평생 해도 못 깨달은 분도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부처님 제자가 된 오비구와 같이 순간적으로 깨닫는 방법을 채택하고 그것을 계승해온 것을 선이라고 합니다.

학자들 가운데는 이 선을 중국에 와서 도교와 습합된 것이라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는 과일을 못 봤기 때문에 이해를 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봅니다. 도교의 구경진리와 부처님이 깨달은 구경진리는 확연하게 다릅니다. 얼마 전에 오매일여를 놓고 논박하는 것을 봤는데, 이것 역시 혼돈에서 온 결과일 뿐입니다. 기독교, 도교, 브라만, 회교 등의 세계 종교는 창조주가 각각 하나씩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창조주를 서로 인정하지 않아서 전쟁을 하기도 하는데요, 지금 지구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갈등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이 바로 종교전쟁입니다. 이런 종교를 우리는 전변설(轉變說) 종교라고 하는데, 한 개가 굴러서 변화하여 만물이 창조됐다고 주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불교는 전변설 종교가 아니고 연기설(緣起說) 종교입니다.

연기설 종교에서는 창조주를 어떻게 볼까요. 모든 존재에 창조주가 보편돼 있다고 봅니다. 컵 속에도 창조주가 있고, 여러분 속에도 창조주가 있고 다 각각 보편돼 있습니다. 그 창조주가 따로 따로인 그것을 우리는 자성(自性)이라고 하는데, 자성은 따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일돼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법성(法性)이라고 합니다. 모든 존재는 그렇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불교인들은 종교를 차별해서는 안됩니다. 차별하게 되면 그분들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지금의 종교전쟁은 그렇게 차별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 세상의 모든 형상이 있거나 없거나 모든 존재는 연기로 존재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열린 눈으로 모든 세상을 봐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에서의 갈등도 멈추고 이 사회는 물론 국가간에 일어나는 갈등까지 멈출 수 있습니다. 이런 위대한 종교가 바로 연기설 종교이고, 연기설을 주장한 종교는 불교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위대한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미국의 오바마 등 불교 밖에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불교를 알아서가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끼고 과학으로 물질을 규명하면서 불교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파인만이라는 물리학자는 자기를 표현하기를 수 억만 개의 원자덩어리가 여러분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강의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원자덩어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몸이 단일로 독립된 ‘나’라는 게 있어서 움직이고 있고, 살고 있다고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또 지난 9월 10일 스위스 제네바와 프랑스 국경 지역 지하 100m에서 이 우주가 생긴 최초의 물질을 발견하기 위한 가속기(거대강입자가속기·LHC)를 가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이 우주에서는 수 억만 개의 물질을 만들어왔는데, 이것을 단 시간에 역으로 추적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입자인 힉스를 찾는데, 물리학계에서는 이것을 신의 입자라고 합니다. 이것은 아직 물질화 되지 않은 입자입니다.

과학자들의 가설은 이것이 어떤 에너지를 만나면 질량화 되고 물질화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물질화 되지 않은 상태,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공(空)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반야심경』에서의 ‘오온개공’입니다. 오온(五蘊)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말하고, 여기서 색이 바로 물질입니다. 우리도 여기에 해당이 되고요. 그리고 수상행식은 우리의 정신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게 공한 줄 알면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난다고 했습니다. 팔만대장경을 압축하고 압축해서 한 글자로 만든다고 하면 그것이 바로 공입니다.

불교는 공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없는 것을 발견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 그 공의 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힉스가 바로 공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공을 ‘아무 것도 없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힉스 입자를 말하면서 무엇인가 에너지를 만나면 그것이 변해서 물질이 된다고 했는데, 불교에서의 공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공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같은 공을 이미 오래전에 말씀하셨습니다. 과학은 뒤늦게 이를 실험을 통해 증명하려고 하고 있는 셈입니다.
조금 쉽게 이야기를 하지요. 불자님들이 지금 저를 바라보고 있지요. 저도 여러분을 보고 있고요. 이것 말고 나를 보는 면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냥 내 외형만 보고 있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이것 말고 한가지를 더 보신 겁니다. 그것이 없는 것을 보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고우 스님은 어떤 스님이다 하고 보고 있고, 저는 저분은 어떤 불자님이다 생각하면서 그렇게 외형만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는 데에 너무나 오랫동안 길들여져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여기서 외형 이외에 한 가지를 더 본 것입니다. 그게 바로 공입니다. 왜냐면 모든 존재는 연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단일로 독립돼서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착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어느 한쪽을 동쪽이라고 가정할 때 이게 동쪽이라는 것을 알고 보면 오온개공까지 다 보는데, 이것을 서쪽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에 해가 뜨는 것을 보고나면 서쪽인줄 알았던 곳이 동쪽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자기가 오해하고 착각한 것을 바로 보는 게 깨달음입니다. 내가 오해를 했던 것이지 저기에 있던 동쪽이 이리로 온 것도 아니고 서쪽이 동쪽으로 변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달음에 대한 신비도 너무 많이 가져서는 안됩니다. 동쪽을 서쪽이라고 오해했을 때의 생각이 지금 우리가 사고하고 있는 그것입니다. 그런데 동쪽을 제대로 이해한 후에는 지금 사고하고 있는 것과는 조금 바뀌게 됩니다. 이렇게 바뀐 것을 ‘마하반야로 본다’고 합니다.

동쪽을 동쪽이라고 바로 보고 오해와 착각을 없애서 바로 본 결과대로 내 생각이 바뀌는 것, 이것이 불교입니다. 그 바뀐 생각으로 삶을 살게 되면 운문 스님이 말한 매일 매일이 좋은날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정권을 잡은 중에 제일 높은 자리에 있는 분이 자꾸 소통 소통하는 소리를 하는데, 그분의 소통은 자기를 이해해서 자기 의견을 잘 따라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통이 아닙니다. 지혜가 생겨서 동쪽을 동쪽으로 바로 보고 착각과 오해를 없애게 될 때 소통이 되는 것입니다. 이 소통이 일상생활에 적용이 되어서 그런 마음과 시각으로 생활을 하게 되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게 됩니다. 인정하고 존중할 때 갈등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신비감 갖지 마라

그런데 우리는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라고 하면 그것을 손해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라는 생각이 있어서 이기심이 자꾸 그렇게 만드는 겁니다. 부처님이 발견한 무와 공을 이해하면 자연스럽게 내 사고가 바뀝니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불교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집중적으로 해서 봉사, 염불, 참선 등을 해야 합니다. 수행방법의 기본 바탕은 공을 이해하는데서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봉사를 많이 하는데 『금강경』에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없이 보시하라고 했습니다. 이 보시가 봉사인데요, 네 가지 상없이 보시하라고 하는 것은 결국 공을 이해하고 봉사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금강경』에서는 또 이 공에 대한 가치를 갠지스강의 모래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경전에서 그 갠지스강의 모래알 만큼 보물을 보시하는 것보다 공을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공덕이 크다고 했습니다. 공덕이 크다는 말은 우리를 그만큼 행복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더해서 이것을 백천만겁을 해도 공을 이해하는 공덕에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공을 이해하는 것에는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나 혼자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잘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가 안 되는 것은 이 귀중한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공이라고 하는지 이유를 알고 나서 체험을 하면 ‘나’라는 것이 세탁이 돼서 그만큼 마음의 갈등이나 대립이 줄어듭니다. 이것은 제가 경험한 것입니다. 저는 견성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옛날에 이 공을 모르고 지낼 때와 공을 이해한 후와는 천지차이입니다. 정말로 편안합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법문하는데도 소극적이었는데 이렇게 법문도 하러 다니고 그럽니다. 또 공부를 하게 되면 굉장히 당당해집니다. 당당해졌다고 해서 절대 교만해지는 것은 아니고, 당당하면서도 겸손해집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비교되는 어떤 현상 앞에서 속상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런 것에서도 자유로워졌습니다. 또한 이런 것들이 내 일상을 행복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발전하고자 하는데 경쟁심이나 투쟁심으로 자기발전하는 것과 이같은 마음으로 발전하는 것은 내용이 다릅니다. 경쟁심이나 투쟁심으로 발전하는 데서는 계속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아이들 역시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경쟁심을 부추기기 보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면 집중력도 높아지고 효과적입니다. 그렇게 할 때 아이가 성장해서 인격을 갖추게 됩니다. 지금 우리사회 지도층들은 경쟁심으로 공부해서 그 자리에 있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인격이 갖춰지지를 않았습니다. 이 사회에 어른이 없습니다. 종교계에도 어른이 없고 각계 각층에 어른이 없습니다. 이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공을 이해하면 집안에서 부부의 관계나 아이와의 관계도 달라지고 내 스스로의 삶의 목표도 달라집니다. 하지만 삶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경쟁심으로 하면 시기, 질투가 일어나고 교만심이 일어나게 됩니다. 미국에서 요즘 금융회사 하나가 망하니까 세계가 들썩거리고 야단인데요. 그것은 그 나라도 지도자들이 인격이 안 갖춰지니까 자기의 욕망을 극대화한 것입니다. 그 망한 회사의 회장 연봉이 우리 돈으로 수백 억이었다고 하는데, 그러니 안 망하겠습니까.

진보와 보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잘 살게 하자고 만들어 놓은 제도이지 진보나 보수가 목표는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목표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고쳐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습니다. 힉스나 파인만 등이 주장한 과학적 공의 증명 뿐만 아니라 사회제도에 의해서 변화시켜야 한다는 정치지도자도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의 오바마같은 사람이지요. 오바마는 부시가 이분법적 사고를 해서 민주당과 공화당의 갈등을 부추기고 미국을 망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이분법적 사고를 허물고 서로 인정하고 존중해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자고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분이 흑인으로 태어나 백인 어머니와 아시아인 의붓아버지 슬하에서 자라고, 부인의 가족 구성원에 중국계가 있는 등 말하자면 작은 유엔이라고 할 만한 상황에서 생활하면서 느낀 인종문제 등의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을 알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너다’, ‘나다’ 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하게 되면 문제해결 방법이 힘이 됩니다. 아마 여러분 가정에서도 그런 일들이 있지요. 힘으로 하는 방법을 제일 잘 하는 사람이 부시인데요, 부시만 부시는 게 아니고 여기 계신 분들도 부시형이거든요. 공을 모르면 부시형이 됩니다. 공을 이해할 때 해결 방법도 달라지게 됩니다.

 보물창고 주인으로 의무·권리 다해야

공을 모르고 나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면 밉다는 소리가 나오기는 쉬워도 곱다는 소리는 잘 나오지 않습니다.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내가 없는 줄 알면 자존심도 없을 겁니다. 그러면 지혜가 나오게 됩니다.

앞에서 오바마 이야기를 한 것은 우리나라 대통령이나 지도자들이 미국의 본을 참 잘 보니까, 미국에서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에도 제2의 오바마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건 정말 슬픈 이야기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기대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부처님이 발견한 그 세계를 우리가 이해하고 내 마음이 변화되면 그것을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내 마음이 변화되면 현실에 맞게 사고하면서 정말로 더불어 잘 살아갈 수 있는데, 지금 이 세계는 모두 부처님 말씀에 역행하고 있습니다.

『법화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큰 부자가 어려서 아들을 잃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아들이 자기 집 머슴 중 하나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사실을 이야기하면 놀라 도망갈까 싶어서 나중에 집안 일을 관리하는 집사로 만들어 집안 살림을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그날로부터 고용인이 아닌 주인으로서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고용인으로서의 삶과 주인으로서의 삶은 천지차이입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입니다. 그러나 착각과 오해로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조 스님과 대주 스님의 일화가 있습니다. 대주 스님이 마조 스님을 찾아오자 “뭐하러 왔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대주 스님이 “불법을 배우러 왔습니다”하고 답을 합니다. 이에 마조 스님은 “너에게 있는 보물창고는 놔두고 왜 밖으로 찾아다니느냐”고 호통을 치고, 대주 스님은 그 말끝에서도 몰라 “내 보물창고가 뭡니까”하고 되묻습니다. 그러자 마조 스님이 “바로 묻는 그놈이다”고 알려주고, 대주 스님은 여기서 깨닫습니다. 보물창고, 여러분은 보물창고의 주인으로서 쓰고 살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야 할 의무도 있습니다.

『아함경』에 한 사람이 화로에 꿀을 달이고 있다가, 친구가 오자 빨리 대접하고 싶은 마음에 꿀을 식힌다고 화로에 부채질을 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부채질을 하니까 꿀이 더 끓어서 친구도 자신도 못 먹게 되지요. 우리가 무아와 공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는 것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이처럼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는 것이 부처님 『아함경』 이야기입니다.
의무와 권리, 그리고 꿀 먹는 이야기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리=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고우 스님은
1937년 고령에서 태어났다. 1961년 김천 청암사 수도암 법희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관응 스님으로부터 ‘기신론’을, 고봉 스님으로부터 ‘금강경’을, 혼해 스님으로부터 ‘원각경’을 배웠다. 봉암사, 묘관음사, 축서사, 용주사, 각화사 등 선원에서 정진했다. 1968년 문경 봉암사 선원을 재건해 종립특별선원의 기틀을 다졌다. 전국선원수좌회 공동 대표, 각화사 태백선원장 등을 지냈다. 현재 조계종 원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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