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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20주년 초청대법회]조계종립 전 기본선원장 영 진 스님백겁 죄도 일념참회면 마른풀 타듯 사라진다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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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8.10.28  17:5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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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 하심
남 탓하면 절대로 공부 안돼

오늘 저는 선원에서 정진하는 한 사람으로서 정진하는 마음을 주제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살면서 가장 두렵고, 급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또 그러한 문제들은 어디에서 온다고 생각하십니까? 요즘은 인터넷, 텔레비전, 라디오 등을 통해 큰 스님들의 법문을 쉽게 접할 수 있어 고통의 근원이 생로병사에서 오는 것임을 잘들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나의 문제가 아닌 남의 일로 여겨진다면 문제 해결의 의지는 결코 생기지 않습니다. 내 문제로 여겨질 때 마음이 급해지고,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세상에 오신지 일주일 만에 어머니를 여위었습니다. 세상에 오면서부터 죽음의 문제를 안고 태어난 겁니다. 태자 시절에는 동서남북 사대문에서 세상의 생로병사를 여실히 관찰하셨습니다. 또 땅에서 기어 나온 벌레를 새가 잡아먹고, 그 새를 더 큰 날짐승이 낚아채는 것을 보며 삶과 죽음에 대해 고민을 했습니다. 그리고 학문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불교는 누가 뭐래도 생사문제를 해결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교리적으로는 12연기법으로 세분화해 설명할 수 있으나 실상 잘 와 닿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 생명 있는 것들은 왜 죽어야 하는 걸까요? 우리는 보편적으로 늙어서 죽는다고 말합니다. 또 늙는 것과 병든 것을 같이 취급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일까요?

역으로 생각해보면 죽음의 원인은 늙고 병들기 때문이고, 늙고 병드는 것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태어남이 곧 죽음의 원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태어난 것일까요? 태어나기 이전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여러분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왜 죽음은 괴롭고 두려운 공포의 대상일까요? 그것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가마솥 안에 손을 넣을 때 그 속에 펄펄 끓는 물이 가득하다면 우리는 충분히 대비를 할 것입니다. 또 차가운 물로만 채워져 있다면 서슴없이 그 속에 손을 넣을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가마솥 안이 어떤 것으로 채워져 있는지 알 수 없다면 두렵고 불안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죽음의 모습을 명확히 안다면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게 됩니다. 만약 사후 모습이 지금보다 더 행복하다면 여러분은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윤회와 고통이 바로 무명(無明)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무명이란 밝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진여의 세계에 대해, 나의 참 모습에 대해, 이 세상의 본질에 대해 밝지 못하다는 겁니다. 이를 뒤집으면, 밝고 또렷하며 바로 본다는 뜻의 명(明)이 됩니다.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밝지 못한 것입니다.
이 우주는 누가 만들었을까요. 낮과 밤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기독교에서는 절대적 존재인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중세에는 이것을 두고 재판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낮과 밤은 조물주의 창조가 아닌 빛을 등지면 어둡고, 바라보면 밝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의 결과입니다. 지구를 벗어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지만 관념에 묻혀 전체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인 것입니다. 바로 무명에 갇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변허공 각소현발(無邊虛空 覺所顯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끝없이 넓고 무한한 허공도 나온 곳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마음입니다. 크기로 말하자면 마음처럼 큰 것이 없으나 작기로 말해도 마음만한 것이 없습니다. 각이라는 것, 마음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천년을 묵은 어둠이라도 한줄기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무명만 없어지면 명이 됩니다. 구름에 가리웠다고 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구름을 걷어내 본래 가지고 있는 명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아석소조제악업 개유무시탐진치 종신구의지소생 일체아금개참회(我昔所造諸惡業 皆有無始貪瞋癡 從身口意之所生 一切我今皆懺悔). 지난 세월 지은 바 모든 악업은 무시이래 탐진치로 말미암아서, 몸과 말과 뜻으로 지었사오니 제가 이제 그 모두를 참회합니다.

『천수경』에 나오는 참회게입니다. 명(明)해지려면 무명(無明)을 제거하면 됩니다. 그런데 무명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업(業)에는 선업과 악업이 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일체가 모두 업인 것입니다. 우리는 두껍게 쌓인 무명에 가려서 악업을 짓게 됩니다. 모르기 때문에 자꾸만 악업을 짓게 된다는 말입니다. 나는 왜 죄를 짓게 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무시(無始)란 시작을 알 수 없는 끝없는 옛날을 의미하는 것으로 무시이래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탓으로 악업을 지었다 이겁니다. 소유하고자하는 탐심과 화를 내는 진심 그리고 어리석은 치심이 행동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탐진치는 따로 구분돼 작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악업을 짓게 되고,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게 되며 본래 맑은 것이 무명의 구름에 가려지게 되는 겁니다.

한 바라문이 부처님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대사문이시여 당신이 내세우는 최고의 진리는 무엇입니까? 내가 듣기로는 니르바나라고 하던데 맞습니까? 과연 니르바나를 얻으면 어떻게 됩니까?” 부처님께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이에 화가 난 바라문이 부처님께 욕을 하며 뒤돌아 나갔습니다. 그때 부처님의 옆에서 시봉을 들던 사리불 존자가 그 바라문을 조용히 불러 부처님께 듣고 싶었던 대답을 자신이 대신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라문에게 “여기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불꽃이 활활 타 연소돼 완전히 꺼져 재마저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니르바나입니다. 니르바나를 얻으면 어떻게 되냐는 질문은 모두 불타 재마저 사라진 자리에서 불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고 했습니다.

탐진치 삼독심이 완전히 연소된 것이 니르바나라는 대답입니다. 물론 이 대답이 니르바나에 대한 완벽한 설명은 아니지만 바라문에게 이것보다 더 좋은 설명이 있겠습니까. 스스로 찻잔의 물을 마셔야 뜨거운지 차가운지, 그냥 맹물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법입니다. 하나하나 설명해 준다고 해서 알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바라문이 스스로 깨달아 니르바나를 경험하도록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종신구의지소생(從身口意之所生) 이 악업을 신구의로 지었으니, 일체아금개참회(一切我今皆懺悔) 내가 일체를 현재 이 자리에서 몰록 참회합니다. 참(懺)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저지른 모든 죄를 뉘우치는 것이고, 회(悔)는 지금부터 미래의 일까지 다시는 이 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서원하는 것입니다. 참회란 이참(理懺)과 사참(事懺)이 함께 되어야 합니다. 이참은 마음으로 이치를 따져 모든 번뇌와 죄악을 끊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사참은 절이나 독경 등 자신의 죄를 스스로 뉘우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몸으로 다짐하는 것입니다. 참회는 이와 같이 이참과 사참이 함께 되어야 진정한 참회라 할 수 있습니다.

백겁동안 쌓인 죄도 일념으로 참회하면 마른 풀이 불타듯 완전히 소멸돼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원래 내가 부처이고, 밝은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바람이 불어 구름을 날리면 태양이 드러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것이 선(禪)의 도리이고 원칙입니다. 빠른 길이 있는데 왜 돌아가려고 합니까. 모든 것은 마음에 따라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철저해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심이 생기는 겁니다. 버리지 않고서는 근심은 풀어지지 않습니다. 시골에 사시는 분들은 문을 걸고 다니지 않습니다. 그런데 도심에 사시는 분들, 그 중에서도 많은 것을 가진 분들은 문을 굳게 닫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런저런 경비시설을 설치한다고 합니다. 가진 만큼 근심의 크기도 큰 법입니다.
제가 예전에 인도로 배낭여행을 떠났을 때의 일입니다. 장기간 여행을 계획하고 떠난 까닭에 배낭을 앞뒤로 메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짐이 많다보니 버스 타는 것은 고사하고, 화장실 한 번 마음 편히 가기 어려웠습니다. 필요 없는 짐만 버려도 한결 간편했을 터인데 당시에는 그렇게 할 생각을 못했습니다. 내가 가진 필요 없는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던 것이지요.

최근 언론을 통해 부탄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지수가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보도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몽골 유목민들의 행복지수가 높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부탄이나 몽골 유목민이나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가난하고 잘 살지 못하는 나라의 사람들입니다. 돈이 많다는 것이 결코 행복한 삶이 아니라는 반증일 것입니다. 어떠한 마음으로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욕심 없는 그 마음이 바로 행복한 삶입니다.

마음 따라 일어나는 죄는 마음이 멸하면 함께 사라집니다. 죄와 마음이 모두 멸해 모두가 원만하게 공하게 될 때 그것을 진짜 참회라고 합니다. 그러면 마음을 소멸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소멸시켜야 한다는 생각만 하면 될까요? 마음이 본래 부처라는데 여러분은 부처입니까? 여러분은 부처님처럼 행동하고 있습니까? 왜 여러분은 부처이면서 부처가 아닐까요?

그것은 여러분이 자신이 부처임을 아직까지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내가 부처임을 확인하는 작업을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나옹 선사는 “생각이 일어나면 생(生)이요, 일어나지 않으면 사(死)”라고 했습니다. 또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사에 즈음해서 마땅히 화두에 진력하라”고 했습니다. 생사문제를 해결하려면 참선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이 부처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아무 것도 모르고서는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왕자가 왕이 되기 위해서는 왕이 되는 교육을 철저히 받아야 합니다. 달라이라마도 달라이라마가 되기 위해 철저한 교육을 받습니다. 나도 법왕이 되려면 끝없이 수행하고 정진해야 하는 법입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하다보면 산이 물 되고, 물이 산이 될 때가 있습니다. 공부를 하다보면 무엇인가 보일 때도 있고, 상기병을 얻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공부를 잘 못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공부에 매진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세계는 미국 월가에서 비롯된 금융위기로 공황상태에 직면해 있다고 합니다. 만원의 가치밖에 없는 상품을 몇 배로 뻥튀기해 돈 잔치를 벌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실체가 아닌 거품을 실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실체가 아닌 거품을 보고 살아갑니다.
마음이 평온하면 뚜렷이 볼 수 있으나 바람이 불어 물결이 일면, 우리의 시야는 탁해집니다. 그렇지만 마음을 안정시키면 다시 명확하게 볼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을 안정시키고, 본래 마음이 부처임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해야 합니다. 실체가 아닌 헛것은 잡으려 한다고 잡히지 않습니다. 악몽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뿐입니다.

『금강경』에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하며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하니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하다”고 했습니다. 일체의 모든 현상은 꿈과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그림자 같으며 이슬 같고 번개불 같으니 응당 이렇게 관하라는 말입니다.

의정 뭉쳐 의단된 것이 화두
이 뭣고 하나로 번뇌 쳐내야
눈을 비비고 허공을 보면 꽃이 보입니다. 이것을 공화라고 합니다. 이 공화가 완전히 소멸되면 명징하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 됩니다. 그때의 마음이 본래 부처입니다. 우리는 광석을 금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 광석을 용광로에 넣고, 재련 과정을 통해 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일단 금이 되고 나면 물속에 넣어도 흙속에 넣어도 돌 속에 넣어도 금입니다. 이 마음을 이 금을 부처라고 합니다. 본래 부처를 보기 위해서는 이러한 재련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제 참선하는 방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참선을 하려면 첫째 신심이 확고해야 합니다. 여기서 신심이란 내가 부처라는 사실의 완전히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은 선지식에 대한 확고한 믿음입니다. 신심이 안 되는 사람은 하심을 해야 합니다. 하심이 안 되면 신심이 생기지 않습니다. 오체투지는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최상의 방법입니다. 그렇지만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 하심(下心)입니다. 화가 나는 것도 하심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사그라져 재처럼 돼 그 마음이 어떠한 말에도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하심만 되면 신심은 저절로 생겨납니다. 모든 사람을 부처님처럼 공경하는데 무슨 업을 짓겠습니까. 남을 탓하면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참회하고 하심해야 신심이 굳건해져 공부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이것 없이는 공부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는 대의단(大疑團)을 가져야 합니다. 선지식의 말씀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알려준 정답은 자신의 답이 아닙니다. 스스로 먹어봐야 맛을 알 수 있습니다. 일어나는 의정이 뭉쳐 의단이 된 것을 화두라고 합니다.

화두는 가장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진면목(本來眞面目), 이것이 이뭣고입니다. 화두 없이 앉아 있으면 온갖 번뇌 망상이 치고 들어옵니다. 그러나 오직 화두 하나로 이 모든 것을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이~뭣고’하면 치고 들어오는 모든 번뇌 망상이 한꺼번에 사라집니다. 하지만 그사이 또 다른 번뇌 망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일어나는 것을 없애려하면 또 다른 번뇌 망상이 일어납니다. 그 번뇌 망상들을 내버려 그만두고 오직 이뭣고에 모든 것을 실어 정신을 집중합니다.

물속에 우유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우유는 물과 하나가 돼 물속에서 우유를 구분할 수 없듯이 나와 화두가 한 덩어리가 돼야 합니다. 뭉쳐져 나눠지지 않는 것을 의단이라고 합니다. 깨닫는 측면에서 보면 화두는 분명 방편이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드는 나와 들려지는 화두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주와 객이 무너지면 하나이기에 화두를 더 이상 방편이라고 표현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한 덩어리가 되면 공부는 멀지 않습니다.

경허 스님 말씀 중에 염궁(念弓)문이라는 법문이 있습니다. 밤길을 걷다 호랑이를 만난 사냥꾼이 온 힘을 다해 화살을 날렸습니다. 화살은 호랑이에게 명중했으나 호랑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두 번째 화살을 날렸는데 이번에는 화살이 튕겨져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그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커다란 바위였습니다. 첫 번째 화살은 생사를 걸고 쏜 것이기에 바위마저 뚫을 수 있었으나, 의심을 가지고 쏜 두 번째 화살은 튕겨져 나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화두도 몸과 마음을 실어 완전히 들어야 합니다.

백 천 가지 물이 강으로 모여 바다로 흐릅니다. 웅덩이가 있으면 잠시 고였다가 다시 흐르고,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기도 하지만 강물이 향하는 곳은 오직 바다입니다. 본래 부처를 확인하는 작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능력과 근기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본래 부처 자리를 향해 한발이라도 내딛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몰록 내가 부처의 경지에 들어가는 첩경입니다.

선방을 흔히 선불장(選佛場)이라고 합니다. 부처를 뽑는 과거장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선방뿐 아니라 공부하는 곳 모두가 선불장입니다. 나는 선원에서 정진하는 사람으로 참선을 하는 방향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 길을 향해 나아가기를 진심으로 발원합니다.
정리=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영진 스님은
1972년 금산사에서 도영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용봉 스님으로부터 사미계를, 석암 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았다. 1999년부터 3년간 조계종 기초선원장 겸 동화사 선원장을 맡아 종단 간화선 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다. 스님은 기초선원장 소임을 맡은 때를 제외하고는 봉암사, 해인사, 통도사, 백담사 무금선원, 은해사 기기암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에만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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