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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 명강의] 길상사 전 회주 법정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삶의 자세가 幸福·不幸 가르는 법 외적 상황 벗어나 일상에 감사해야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요즘 청명한 날씨 덕에 살아 있다는 것이 새삼스레 고맙고 복되게 느껴집니다. 저는 연일 화창한 가을 날씨 덕에 여러 가지로 흥겨운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특히 빨랫줄에 빨래를 널 때면 서정주 시인의 ‘푸르른 날’이란 시가 저절로 입가를 맴돕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이렇게 두런두런 시를 외우면 마음이 풍부해지고 즐거워져 사는 일이 새삼스럽게 고마워집니다. 청명한 가을날 시를 읽고 있으면 마음이 아주 그윽해집니다. 시는 언어의 결정체로 그 안에는 우리말의 넋이 살아있습니다. 또 우리말의 아름다운 얼굴이 투명하게 드러납니다. 가끔은 바쁜 일상이라도 꼭 시를 읽기를 추천합니다.

요즘 우리 주변은 지겹고 짜증스런 뉴스로 가득합니다. 미국발 금융위기, 외환사정, 펀드와 주식 폭락, 쌀 직불금 부정수령 등 들리는 소식마다 우리를 몹시 우울하게 합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경제와 관련된 얘기뿐입니다. 경제를 살리겠다고 나선 사람들은 경제를 살리기는커녕 널뛰는 경제에 갈팡질팡 하는 형국입니다.

입만 벌리면 모두 ‘경제’, ‘경제’ 하는데 과연 우리는 가진 것만큼 행복한지 스스로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많이 가진 사람이 그만큼 행복할까요? 그러면 많이 가지지 못한 사람은 불행할까요? 이와 같은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봐야 합니다. 외부적인 여건만 가지고 행복과 불행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가진 것이 많아도 사는 법을 모르면 불행하고, 적게 가졌어도 사는 법을 알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외부 현상이 삶 전부 아니다

행복과 불행은 외부적인 상황이나 여건에만 있지 않고 내적인 수용여부 즉, 받아들이는 삶의 자세에 행복과 불행이 달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들려오는 소식에 휩쓸리다보면 우리 자신이 외소해지고, 너무 무력해집니다. 외부적인 현상만이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 경제, 경제 하지만 경제만이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 눈을 안으로 돌리면 보다 긍정적이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영역은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그러나 눈앞의 현실, 밤낮 들려오는 뉴스에만 귀를 기울인다면 삶 자체가 시들해 집니다. 그런 외압에 짓눌리면 우리가 가진 잠재력과 가능성을 일깨우려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사는 일이 지겹고 힘들어 지는 겁니다.

옛 사람들이 살아온 자취를 살펴보면 우리 후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참으로 배울 점이 많습니다. 250여 년 전, 서울을 배경으로 활동한 장혼(張混)이라는 선배가 있었습니다. 그는 인왕산 아래에 허름한 집 한 채를 마련하고, ‘평생의 소망’이라는 글을 통해 자신이 꿈꾸고 계획한 이상적인 삶을 하나하나 서술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자신이 가진 여덟 가지의 ‘맑은 복’에 관한 내용이 가장 인상적입니다.

장혼은 여덟 가지의 맑은 복에 대해 첫 번째 태평시대에 태어난 것, 두 번째 서울에 사는 것, 세 번째 선비로 태어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 네 번째 문자를 대충 이해할 수 있는 것, 다섯 번째 산수가 아름다운 곳 하나를 차지한 것, 여섯 번째 꽃과 나무 1000그루를 가진 것, 일곱 번째 마음에 맞는 벗이 있는 것, 여덟 번째 좋은 책을 소장하고 있는 것을 꼽았습니다.

장혼은 글을 읽을 수 있고 좋은 벗과 책을 가졌으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이 자신이 가진 행복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참 소박한 행복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제 자신의 맑은 복을 생각해 봤습니다.
첫째 저에게는 스승과 말벗이 되어 줄 몇 권의 책이 있습니다. 제가 산중에서 혼자 지내면서도 기가 죽지 않고, 나날이 새로워지려하는 것은 이 몇 권의 책이 나를 받쳐주기 때문입니다. 둘째 출출하거나 무료해지려 할 때 마시는 차가 있습니다. 차는 제 삶의 맑은 여백과 같습니다. 셋째 굳어지려는 삶에 탄력을 주는 음악이 있습니다. 또 내 손을 기다리는 채소밭이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고맙게 느껴집니다. 책과 차, 음악과 채소밭은 내 삶이 녹슬지 않도록 받쳐주는 아주 고마운 존재들입니다.

소동파(蘇東坡)는 ‘적벽부(赤壁賦)’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강물의 맑은 바람과 산중의 밝은 달이여/ 귀로 들으니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니 빛이 되는구나/ 가지고자 해도 말리는 사람 없고 쓰고자 해도 다함이 없네/ 이것은 천지자연의 무진장이구나.”

자살은 자해의 업(業)만 추가

이러한 것들은 우리 주변에도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나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강과 산은 본래 주인이 없습니다. 그것을 보고 느끼면서 즐길 줄 아는 사람이 강과 산의 주인입니다. 눈을 밖으로만 돌리기 때문에 외부적인 상황이나 덫에 걸려 이러한 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좋은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고 합니다. 오늘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이 하루 30여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결코 자랑스러운 통계는 아니지만 우리나라 자살률이 세계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내 최고 수준이라고 합니다.

목숨처럼 귀하고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하나뿐인 목숨입니다. 그런데 그런 목숨을 내팽개치고 있습니다. 이 순간에도 병원에는 단 몇 분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산소 호흡기를 떼지 못하는 환자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이 존엄한 목숨을 스스로 내팽개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하더라도 결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삶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자살은 스스로를 해치는 자해행위로 업(業)이 되어 윤회의 사슬이 되고 고통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자살은 자해의 업만 추가하는 일일 뿐입니다. 보고 듣고 말하는 모든 것은 업이 됩니다. 이것은 결코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관성(慣性)의 법칙처럼 습관이 되고 업력(業力)이 되어 업장(業障)으로 이어집니다.

자살 충동은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원인이 고뇌에 갇혀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고통은 지속되지 않습니다. 맑은 날이 있으면 흐린 날도 있는 법입니다. 우리의 삶은 늘 유동적이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외부적인 여건뿐 아니라 생각도 변합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절망감도 한 때입니다.

얼마 전 자살로 세상을 놀라게 한 사람들도 막막한 한때의 덫에서 벗어나 맑은 정신으로 인간사를 널리 살폈다면 그 외골수의 생각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시야로 자신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만이 길이라는 외골수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해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누구든지 한때의 생각에 갇혀 넘어져서는 안 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모든 것은 고정돼 있지 않고 늘 변합니다.

어려운 일 닥칠 때 혼자 해결 말라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혼자서 해결하려 하지 마세요. 혼자서는 일방적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가까운 친구를 만나거나 그런 친구가 없다면 절이나 교회를 찾아 짐을 부려놓아야 합니다. 절이나 교회의 문은 항상 열려있습니다. 종교는 그런 자문에 응하라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약 자살하기 전에 좋은 친구나 스승을 만난다면 그러한 끔찍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살만큼 살다가 제 목숨이 다하면 누구나 몸을 바꿉니다. 부처가 됐든 부처의 할아버지가 됐든 영원히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때 극단적인 충동으로 지금의 몸을 버리면 더 좋은 삶이 있을 것 같아도, 사실은 그 업의 찌꺼기가 다음 생까지 따라옵니다. 업력이란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있다는 사실에 늘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고마움을 세상과 함께 나누기 위해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좋은 가을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정리=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이 법문은 길상사 전 회주 법정 스님이 10월 19일 서울 길상사 가을 정기법회에서 대중에게 설한 법문을 요약 게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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