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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진정성과 보살행의 미학[상]

기자명 법보신문

굴절된 현실 통해 이상향 볼 때 예술의 진정성은 빛을 발한다

 
현대인들은 물질적 풍요 속에 생활하고 있으면서도 모두 고독하고 불안해한다. 매일의 끼니를 탁발로 이어가는 승가의 경제 활동은 현대인들에게 아득한 옛 이야기일 뿐이다.

이 가을, 저 단풍에 자주 눈이 가는 것은 나무가 곱게 물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이 물든 탓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산록에 단풍이 불탈수록, 시린 바람이 살 속을 파고들수록, 더욱 고독해지고 그리움은 깊어간다. 왜?

고독한 것은 소외 때문이다. 외로울수록 사무치게 님을 그리워하는데, 그 님은 바로 공동체이다. 국민소득 2만 불 시대다. 당신은 과연 행복합니까? 왜 행복하지 않죠? 양극화 시대에서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도 작용을 했지만, 근원을 따져보면 소외 때문이다. 설사 20만 불을 번다 하더라도 우리는 불안하고 고독하며 타인들로부터, 자기 자신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고 느낀다.

자본주의의 산물 ‘소외’

소외는 따돌림 이상의 것이다. 따돌림이란 인간 집단이 형성되면서부터 생긴 것이라면, 소외는 엄격히 말하여 자본주의 체제가 등장하면서 보편화한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뒤집어버린 사회이다. 나는 십년이 넘게 쓴 만년필을 한 자루 가지고 있다. 이제 펜촉이 닳고 닳아 글씨는 쓰는 족족 번지고 뚜껑은 너덜너덜해져 쓸 때마다 소음을 낸다. 남들은 이제 버리라고 하지만 이 펜에는 버릴 수 없는 역사가 스미어 있다.

나는 이 펜으로 밤을 새워 편지를 써서 한 여인의 마음을 흔들어 부부의 연을 맺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좌절해 있는 후배에게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기도 하였다. 나에게 이 만년필의 가치는 수백 만 원 이상이다. 하지만, 내가 백화점에 가서 명품 겨울 코트를 사면서 만년필로 지불한다면 점원은 나를 미친 놈으로 여길 것이다. 점원은 만년필에 담긴 역사를 모른다. 그 만년필이 잉크만 주입하면 아직 얼마나 많은 글을 쓸 수 있고 이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지 잘 알지 못한다. 그에겐 사용가치는 보이지 않고 오로지 교환가치만 따져지는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는 교환가치가 지배하는 사회,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보다 우월한 사회다.

교환가치와 사용가치가 전도된 사회에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 물화(物化, reification)다.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이들이 교환가치를 우선시하면서 모든 것을 물질로, 돈으로 대체하여 바라보기에 사람들의 관계가 사물의 성격을 지닌다. 노동은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는 것도, 자기 앞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인간 주체의 실천 행위도 아니다. 돈 버는 수단일 뿐이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하여, 돈을 벌어 더 많은 물질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육체를 소진하고 마음에 없는 아부를 하기도 하고 남을 곤경에 빠트리기도 한다. 물화한 개인은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물질의 눈으로, 상품관계로 바라본다.

그래서 우리 집에 대해 묻는 이들에게 우리 집 창으로 아름다운 관악산 능선이 보이고 베란다에는 과꽃이 흐드러졌다고 하면 그들은 잘 알아듣지 못한다. 평당 얼마 짜리 아파트의 몇 평 아파트라 해야 금세 이해한다. 온갖 삶들이 이렇듯 물화되어 있으니 우리는 서로를 소외시킨다. 배우자를 고를 때조차 그 사람의 교환가치를 따진다. 가족이든, 친구든, 동료든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한 이용대상일 뿐이다. 나 스스로가 인간성을 상실하였으며 타인 또한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다.

현대인을 병들게 하는 소외가 하나 더 있다. 자기로부터, 정확히 말하여 자기 동일성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 우리가 수 억 원의 뇌물을 받은 정치인을 보며 손가락질을 하지만, 행정고시에 합격하였다는 소식을 듣는 그 순간 “야, 이제 고급 공무원이 되었으니 무지막지하게 뇌물을 받아 부귀영화를 누리고 그것을 상납도 하여 출세좀 해야 겠다.”라고 맹세한 사람은 없다.

타락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남보다 더 악하거나 돈을 좋아하여 뇌물을 받는 것은 아니다. 누구보다 선하고 정의를 추구하였던 후배나 제자들이 버티고 버티다 동료들과의 관계 때문에 결국 촌지를 받고 말았다는 고백을 많이 한다. 문제는 한 마디로 착한 사람을 병들게 하는 이 체제에 있다. 자신이 학생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청렴한 선생이라 여겼는데 어느 날 문든 보니 촌지를 받고 월급을 받는 만큼 수업을 때우는 선생이 되어있음을 볼 때 얼마나 낯설까. 정도 차이일 뿐이지 우리는 이 체제 안에서 모두 자기 동일성으로부터 소외된다.

풍요 속 고독 느끼는 현대인

그러니 현대인들은 물질적 풍요에 있으면서도 모두가 고독하고 항상 불안하다. 피를 나눈 형제조차, 가장 사랑하는 부부조차 서로를 믿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대하지 못한다. 고독한 개인들은 소비와 육체적 향락으로, 때로는 일탈로 고독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욕망은 신기루다. 그럴수록 더욱 고독은 머리와 살을 파고든다. 명품을 사면 살수록, 알코올에 젖으면 젖을수록, 수많은 이들과 섹스를 하면 할수록 그들은 고독과 소외의 늪에 빠진다. 소외는 20세기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병리가 되었다.

그럼 이 타락한 세상을 어찌 구제할 것인가. 국가나 정치인이 나서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시스템과 제도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들이 자본과 결탁하여 유착관계를 맺고 있으니 애시당초 이는 기대할 것이 못 된다. 그래서 혁명가와 활동가들은 이 체제를 바꾸려 풍찬노숙(風餐露宿)을 하고 영어(囹圄)의 몸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예술가들은 타락을 고발하고 소외가 없는 세상을 상상한다.

카프카의 『변신』이란 우화 같은 짧은 소설이 있다. 그레고르 잠자는 잠자다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한다. 그러자 그가 가장 사랑하였고 그를 사랑하였던 가족들은 그를 징그러워하고 혐오스러워 한다. 그 중에서도 더 끔찍이 사랑하였던 누이마저. 그는 끝없는 고독 속에서 죽어간다. 마침내 그가 죽자 가족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피크닉을 떠난다.

사람이 벌레로 변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이는 현실성이 없는 소설이다. 그러나 이 소설만큼 산업사회나 자본주의 사회가 얼마나 인간을 소외시키고 있는 가에 대하여 극명하게 보여준 작품도 드물다. 우리 모두는 벌레가 아닌가? 벌레 같은 존재이면서도 위엄이 있는 인간이라고, 모두에게 사랑 받고, 인정받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잠자가 죽었을 때 오히려 가족들이 피크닉을 떠난 것처럼 내가 죽었을 때 내 주변의 사람들은 그리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살아가지 않겠는가, 나 또한 다른 이들에게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는 존재인 것은 아닌가? 이 소설을 20세기 최고의 소설로 평가하는 평론가들이 많은 것은 이것이 현대인의 대표적 병리인 소외와 인간의 관계에 대해 짧은 형식 안에 예리하게 잘 해부하였기 때문이다.

미학과 비평이론에서 이런 것을 추구하는 이들이 마르크시스트 미학자들이다.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 맑시즘이 유용하느냐고 많은 이들이 반문하지만, 자본주의의 모순이 존재하는 한 이 체제를 가장 잘 분석할 수 있는 과학으로서, 소외된 삶을 공동체의 삶으로 바꾸는 비전으로서 마르크시즘은 유용하다. 인류 문명사에서 하나의 사상이 올바르다는 신념 하나로 수십, 수백만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은 것이 종교를 제외한다면 마르크시즘 이외에 또 있었는가?

예술은 현실 생생히 드러내야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이 물화와 소외임을 간파하고 타락한 사회에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양식으로서 예술에 주목한다. 낯설게하기의 측면에서 보면 박노해의 시나 톨스토이의 작품은 독창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박노해의 시를 읽으며 일하다 기계에 손가락을 잘리고 그 보상으로 겨우 소준 몇 잔 값이 주어지는 세상에 분노하고 노동이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을 실현하여 자신이 자유롭게 되고 또 타자들도 자유롭게 하여 정의를 구현하는 방편이 되는 사회,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모든 이들이 다 같이 평등하고 존엄한 사회를 꿈꾼다. 이처럼 진정성이란 예술 작품에서 객관적 현실을 구체적으로 반영하거나 굴절시켜, 타락한 현실 사회의 모순과 세계의 부조리를 비판하거나 부정하는 동시에 삶의 진실을 드러내고 보다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

진정성을 추구할 때 몇 가지 법칙이 있다. 맑시즘의 핵심은 토대와 상부구조이다.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하지 상부구조가 토대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 철학은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발을 디뎌야 한다. 진정성은 당위가 아니다. 대가의 수필보다 행상을 하는 아주머니의 일기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거기 구체적인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진정성은 우리가 먹고 자고 싸며 다른 이들과 갈등하고 경쟁하는 구체적 현실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드러낼수록 진정성의 꽃은 핀다.

더 높은 세계에서는 세계는 하나이나, 우리 일상의 차원에서는 세계는 밤과 낮, 주와 객, 진리와 허위, 이데아와 그림자 등 둘이다. 원래 하나인 것을 모르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강자와 약자, 저들과 우리들, 자본가와 노동자, 서양과 동양, 선과 악, 정신과 육체, 이성과 감성, 도덕과 욕망, 둘로 나뉘어 치열하게 대립을 하고 갈등을 하는 장이 바로 현실이다. 현실은 이렇게 양자가 모순과 대립 속에 있는데 이를 간과한다면 이 또한 현실의 왜곡이다. 달동네 사는 장애인의 삶을 다루면서 그의 가난과 소외를 개인의 일상에 맞추어 그려내고 그를 그리 가난하고 불행하게 만든 자본주의 체제, 국가의 잘못된 제도, 정치인과 관료들의 부조리 등을 되돌아볼 수 없게 한다면, 그 소설이나 영화는 진정성을 저버린 작품이다.

우리 현실 자체가 모순이다. 우리 삶은 꿈과 현실 사이에서 진동한다. 누구나 이상을 바라지만 누구도 그에 이를 수 없다. 그럼에도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그 길을 향하여 걷는 것은, 바로 유토피아를 향한 희망이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보는 틀을 마련해주며, 현실을 유토피아쪽으로 조금 더 다가가게 하기 때문이다. 현실의 부정을 통한 유토피아의 빛이 보일 때 진정성은 작품 사이에서 빛을 발한다. 길이 얼마나 험하고 어두운가 하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거기 별빛만 비춰준다면 나그네는 동경과 기대를 가슴 가득 안고 굳게 발을 내딛는다.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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