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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독선 다 비우니 “아 살았다”

기자명 법보신문

수 경 스님 - 문 규 현 신부 등 오체투지 1차 회향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 전종훈 신부 등 세 성직자들은 끄흥, 헉, 아흑 소리를 내며 교만과 독선 그리고 오만을 계속 뱉어내고 있었다.

이 자리에 계신 이 자리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이 희망입니다.
나를 낮추어 세상을 밝게 하겠습니다.
순례단의 참뜻과 깨달음 실천에 눈물이 납니다. 기억하겠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몰랐다. 누구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사람의 길과 생명의 길 그리고 평화의 길. 본래의 순리를 찾고자 길을 나선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 등 오체투지 순례자들이 53일간의 순례를 갈무리하기 전날 밤. 천지가 진동했다. 하늘이 그렇게도 울었다.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 생명의 방울방울들이 다시 땅으로 돌아왔다. 다시 새 생명을 내는 산고의 고통이었다. 생명의 순환이었다. 태고부터 있었던 진리였다.

중악단에 가장 낮은 마음 공양

동이 텄다. 계룡산 신원사 중악단을 향하는 차창 밖에선 계룡산을 목적지 삼은 구름들이 걸음을 재촉했다. 한반도의 큰 정기를 품고 있어 조선시대 때 매년 국가 차원의 산신제를 올렸던 곳. 지리산 노고단에서 날아 온 구름은 계룡산 신원사 중악단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사람의 청정하고 가장 낮은 마음을 받아 북녘 묘향산 상악단으로 전해야 했다. 계룡산 신원사 중악단은 오체투지 순례단을 맞을 채비를 했다.

오체투지 순례 53일 째인 지난 10월 26일. 순례단은 지리산 노고단부터 본래의 진리를 가장 낮은 자세로 묻고 또 묻고 있었다.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 전종훈 신부 등 세 성직자들은 끄흥, 헉, 아흑 소리를 내며 교만과 독선 그리고 오만을 계속 뱉어내고 있었다.

충청남도 논산에서 공주 방향의 편도 1차선 691번 지방도로엔 순례자들로 그득했다. 계룡산 신원사 초입에 다다르자 순례자들은 500여 명으로 늘었다. 세 성직자를 따라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 절을 하는 사람, 합장 반배를 하는 사람 등등. 온전히 이기적인 마음들을 길에 놓아두었다. 비우고 또 비웠다. 하늘에 제를 올리려면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 도리였다.

잠시 소동(?)이 일었다. 도로에 풀벌레가 난입했던 것. 순례자들은 걱정스런 눈길로 풀벌레를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승용차 한 대가 그 위를 지나갔다. 여기저기서 안타까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다행히 풀벌레는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순례자 몇몇이 달려들었다. 풀벌레를 조심스럽게 잡고 풀숲으로 돌려보냈다. 그렇게 사람이 가야할 길과 생명, 평화의 길은 순례자들이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동안 비운 것이 얼마인가.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생명과 평화를 일구려는 작은 발걸음들이 얼마이던가.
지난 9월 2일 조계사 촛불 농성장을 시작으로 서울역 KTX 노동자 농성장,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사투 현장, 평택 대추리 이주민 마을을 찾아 그네들의 마음을 짊어졌다. 그리고 9월 3일 전북 부안 새만금에서 사라져가는 생명들에게 사죄의 진혼을 올리고, 4일 지리산 노고단에서 천고제를 시작으로 본래부터 있었으나 사람들이 잊고 말았던 그 길을 찾아 나섰다.

우리 시대의 아픔이었다. 촛불의 현재, 비정규직의 소외된 공간, 사라지는 생명의 터전을 곱씹었다.
175㎞에 이르는 50여 일의 여정. 생명을 잉태하고 꺼진 생명을 다시 껴안는 땅, 무엇보다 존귀한 땅에 몸을 무한히 낮추어 귀의했다. 서로의 마음이, 국민의 마음이 평온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했다. 희망으로 가는 길을 더듬었다.

순례단이 계룡산 신원사 중악단으로 들어섰다. 순례단을 기다리던 1000여 사부대중들은 합장과 박수로 그네들을 맞았다.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 전종훈 신부는 서로에게 오체투지로 순례 도반으로서 예를 갖췄다. 땅에서 일어난 세 성직자는 서로 뒤엉켜 뜨거운 포옹을 나눴다. 지난 50여 일 간의 순례 동안 길에 묻고 길에서 만난 생명에 묻고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물어 배웠던 작은 가르침과 깨달음, 감회를 나눴다. 결코 쉽지 않았던 그 동안의 순례 동안 느꼈던 수많은 감정들이 오고 갔으리라.

숙연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중악단은 정적에 잠겼고 곧이어 날카롭게 날이 선 검이 중악단의 허공을 가르며 춤을 췄다. 하늘에 제를 올리기 전 정화의식이다. 검무가 끝나자 세 성직자는 중악단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53일 동안 배운 작은 가르침을 오체투지로 온전히 공양 올렸다. 그렇게 또 다시 비웠다. 문규현, 전종훈 신부는 무릎이 불편한 수경 스님을 부축하며 중악단 입구로 돌아왔다. 지리산 노고단 흙과 물, 계룡산 신원사 중악단 흙과 물을 하나로 섞었다. 합수 합토. 지리산부터 계룡산까지의 생명의 정기를 모은 것이다. 생명의 근원인 땅과 물을 하늘 아래 바친 것이다.

생명의 순환과 위대함을 하늘에 고한 후 10여 명의 오체투지 순례단들과 1000여 사부대중은 맞절로 서로를 껴안았다. 고생했노라고. 본래 진리의 길을 찾아 나선 순례단이 희망이라고. 아니, 이곳에 온 마음을 보낸 대중들이 바로 희망의 씨앗이라고.

박남준 시인은 하늘에 기원을 전했고, 김지하 시인은 시로 오체투지 순례단의 1차 회향식을 기렸다. 그리고 참여 대중들은 중악단 입구에 설치된 현수막에 작은 글씨로 큰마음을 담아 순례단을 격려했다.

내년 봄, 묘향산으로 2차 순례

“땅이 있어, 고맙다는 어느 보살님 말씀이 오늘 소중히 들렸습니다. 이 땅의 가장 밑에서 올려다 본 세상이 참 아름다웠던 하루였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이 자리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이 희망입니다.”
“나를 낮추어 세상을 밝게 하겠습니다.”
“오체투지 순례단의 참뜻과 깨달음 실천에 눈물이 납니다. 기억하겠습니다.”

오체투지 순례가 계룡산 신원사 중악단을 끝으로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내년 3월 다시 이곳에서 임진각 그리고 묘향산 상악단까지 순례를 약속한 것이다. 헤매는 사람은 찾고 있는 사람일 터. 나타나라, 어서 나타나라.

계룡산 중악단=최호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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