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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청심]자비심

기자명 법보신문

거금도 금천선원장 일선 스님

오랜만에 기차를 타고 자비명상 여행을 다녀왔다. 천안 만일사에 이르니 오색단풍은 그윽하게 대웅전 뜨락을 장엄하고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산새와 청량한 석간수의 맛이 뼛속까지 시리다. 오랜만에 젖어드는 자비스러운 기운이 온통 감각을 드러내 놓는다.

여러 수행자들은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서 노래를 하고 모든 감각을 스스럼없이 열어 놓고 그대로 바라보는 수행을 하고 있다. 거친 감각과 기운을 신나는 노래로 헹구어 내고 난 다음에는 심체를 드러내는 플롯연주가 시작되고 있다. 하늘의 별을 보고 청량한 공기를 맛보며 온통 감각을 있는 그대로 살피다 보면 어느덧 더 이상 흐르지 않는 성품이 드러나는데 이제 여기에 일체를 회광반조 하는 수행이다. 우리는 누구나 깨달으려고 하지만 이러한 순수한 감각을 덮어두거나 드러내지 않고 여러 수행 방편들을 통해서 오히려 없애려고 하거나 밀쳐내려고 하다보니 성품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이 나의 몸과 본래 둘이 아닌 줄 깨달으면 온통 자비심으로 충만하고 일체 일어나는 감각 그대로가 부처의 작용이 된다. 지금 여기에서 드러나는 순수한 감각을 바로 뒤집으면 거기에 바로 성품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부들은 나타나는 감각을 따라가거나 계교 사량하여 곧 번뇌망상에 사로 잡혀 끝없이 고통을 받고 살아가는 것이 현재 삶의 모습이다. 이와 같이 자기 점검이 철저히 이루어지고 나면 이제부터는 한 치의 틈을 주지 말고 면밀하게 수행을 해야 한다.

오래전에 선방에서 화두의 의정을 바르게 짓지 못하고 지독한 상기병을 얻어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어 안거를 중간에서 파하고 무작정 남인도의 위빠사나센터로 가게 되었다. 문제는 수행의 기본인 자비심을 발하지 않고 우선 깨닫고 나면 세상을 다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한탕주의적인 이기심에서 비롯된 급한 마음이었다.

처음에는 집중의 훈련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호흡에 어떤 테크닉도 붙이지 않고 순수하게 알아차리고 일어나는 감각이나 일체 대상을 호흡에 내려놓고 보니 상기병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다음엔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일체 대상이나 일어나는 망념을 먼저 알아차리고 호흡과 하나되면 성품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초심자들은 아직 공부가 성숙하지 못하여 곧 안정이 흐트러지게 되는데 그러면 다시 호흡의 집중으로 돌아오고 안정이 이루어지면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마음의 관찰로 나아간다. 이렇게 걸음걸음 한 치의 틈을 주지 않고 두 철을 보내고 나니 어느덧 성품이 드러나는데 이제는 드러나는 성품을 바라보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나아가 체득 하려면 화두의 의정이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이 참으로 절실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한 생각 망념이나 대상을 만나면 곧 알아차리고 호흡과 하나되면 마음도 아니고 몸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것이 오롯이 드러나는데 여기에 즉해서 바로 화두의 의정으로 들어가면 온통 성품에 계합하게 되니 위빠사나와 화두의 절묘한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제 수행에도 벽이 무너지고 지구촌 사람들이 하나로 만나고 있다. 불어 닥친 경제의 한파로 올 겨울은 참으로 추울 거라고 예고를 하고 있다. 수행의 시작과 끝에서 위기를 맞는 것은 기본인 자비심을 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가 자비심으로 만난다면 훈훈한 수행의 향기를 세상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뜰 앞에는 유자가 노란 손수건을 걸어 놓은 듯 가볍게 흔들리며 깊은 향기를 토하고 있다.

거금도 금천선원장 일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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