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6. 진정성과 보살행의 미학[하]

기자명 법보신문

눈 먼 자식위한 어미의 노래 시대 초월한 진정성의 ‘백미’

 
‘천수대비가’는 눈 먼 자식을 위해 천수관세음 앞에 엎드린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 그 자체로 진정성을 낳고 있다. 사진은 여동완 작가의 작품집 ‘Into Tibet’중에서.

라깡의 말대로 인간은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다. 우리는 남보다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연봉, 더 강한 권력, 더 즐거운 향락을 꿈꾼다. 그럼에도 세상엔 왜 살 만한 틈이 보이고, 선한 인간이 빚어내는 선행으로 우리는 오랜 동안 감동에 젖을 수 있을까. 이기적 인간이 어떻게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가.

혼자 사냥할 때 열흘에 한 마리의 사슴을 잡았던 몇몇 사람이 어느 날 열 명이 짝을 이루어 사냥하면 열흘에 스무 마리의 사슴을 포획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를 알고 나서 사람들은 집단을 이루어 채집을 하고 사냥을 하였으며 나중에는 농사도 지었다. 헌데 내가 동료의 아내가 예쁘다고 그 여자를 겁탈하거나 사슴을 독차지한다면 그들은 나를 동료로 삼지 않으려 할 것이다.

인류는 거의 300만 년에 달하는 세월을 통해 이를 깨달아 사회를 형성하였고 더 큰 욕망의 달성을 위해 현재의 욕망을 유보하기 시작하였다. 의식의 장에서 잠시 추방된 욕망은 이때부터 자아 안에 무의식이라는 영역을 만들어 자리하기 시작하였다. 사회가 만들어지면서 욕망이 무의식의 영역을 만들어 숨고, 본래 이기적인 존재인 인간이 이타심에 바탕을 둔 연대를 행하기 시작하였다.

이타가 이기인 경우에 대한 깨달음과 문화적 선택도 한 몫을 하였다. 흉년이 들었을 때 할아버지의 자살은 그것만 놓고 보면 이타적인 행위이지만,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후손을 퍼트리기 위한 이기적인 선택이다. 한 아버지가 남의 식량을 훔쳐서 자신의 자식에게 먹이는 것은 다른 가족의 기준에서 보면 이기적인 행위이지만, 가족의 입장에서 보면 가족을 위해 타인의 비난과 조롱, 신체적 손상, 혹은 죽음도 각오한 이타적 행위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인간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이는 인정의 변증법을 낳았다. 수많은 이들과 더불어 사는 사회 속에서 인간은 좋든 싫든 타인의 시선 속에 놓인 존재다. 그는 단 한순간도 타인의 시선을 벗어나 존재할 수 없다. 혼자 방 안에 있을 때조차, 일기와 같은 독백의 글을 쓸 때조차 인간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 타인의 시선은 권력을 형성하고 자아에 대한 억압으로 작용한다. 대신 타인의 시선은 이기적인 욕망을 인정 욕망으로 전환한다. 사르트르의 주장대로, 인간은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는 존재이기에 나의 실존은 타자의 실존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라깡은 인정의 변증법을 이야기한다. 그의 표현대로 “무의식은 우리들 사이에 존재한다.” 어떤 이가 뇌물이나 미인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은 그 돈을 소비하고 미인과 함께 하는 즐거움보다 그를 물리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청렴하고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자존감이 더욱 소중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인간은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라지만, 타자들로부터 인정받는 것 또한 절절하게 욕망한다.

무의식의 영역으로 숨어든 욕망

이런 유전적, 문화적 요인으로 인간에게는 선의 씨앗도 있고 악의 씨앗도 내재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물화된 욕망을 극단으로 추구하여 선의 씨앗을 소멸시키고 악의 씨앗만 자라게 하는 체제로 보았다. 때문에 그는 자본주의 체제를 해체하고 모두가 서로 선의 씨앗을 키우기 위하여 서로 노력하는 사회를 건설할 것을 주장한다. 그가 볼 때, 개인은 본래적으로 사회관계 속에 있는 개인(individuals in social relation)이다.

우리네 공동체에서 서로 연대하고 서로 공존공영을 추구하였듯, 꼬뮨을 만들어주면 개인은 자신을 타자와 깊은 연관 속에서 파악하고 서로가 타자를 자유롭게 하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 순간 진정한 자기실현으로서 자유와 타자를 자유롭게 하여 나를 자유롭게 하려는 정의는 일치한다. 이런 꼬뮨과 인간형을 비전으로 품게 하고 그에 다가가도록 이끄는 것이 마르크스 예술론이 추구하는 진정성이다.

보살행은 윤리적 당위일 뿐 아니라 연기의 지혜에서 비롯된다. 연기의 소승적 깨달음이 철저한 욕망의 소멸로 귀결되었다면, 대승적 깨달음은 보살행을 낳는다. 예를 들어, 수 억 원에 이르는 환경비용을 지출하지 않고 비오는 날 폐수를 몰래 버리는 것이 자기 회사의 이익이라고 생각한 자본가가 있다고 치자. 그가 어느 날 윤리적이거나 종교적인 깨달음에서 이를 악으로 규정하고 중지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선악의 문제나 판단과 관계없이, 그가 어느 날 자신이 버린 폐수를 먹고 자란 물고기를 자신이나 자신의 자식이 식용하면 병에 걸리고 나아가 기형아도 낳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를 수 있다. 이를 깨달은 사람은 더 이상 폐수를 버리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지혜란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원인과 결과로 맺어지고,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아(我)란 없으며 공(空)임을 깨닫는 것이다.

연기를 깨닫고 나면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뿐만 아니라 모든 타자들,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 우주의 구성 성분들 모두가 ‘우리’의 범주에 들어온다. 길거리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던 두 사람이 제3자로부터 실은 두 사람이 이복형제라는 소리를 들으면 싸움을 중지하고 포옹할 것이다. 이처럼 연기는 각 존재자를 우리의 범주에 속하게 한다.

이때 ‘우리’는 각 존재자들이 서로 소통하고 상호작용을 하면서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독립투사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까지 희생하는 것에서 보듯, 각 존재자는 우리의 범주에 들어온 타자를 위해 자신의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거나 포기한다. 진정 깨달은 자는 욕망을 완전히 소멸시키고 해탈을 이룬 자다.

하지만, 아직 이 경지에까지 이르지 못하는 속인이 취할 바는 나의 욕망이 타인의 욕망을 점함을 인식하고 타인을 비롯한 지구상의 온생명을 위하여, 혹은 나라는 주체가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하여 나의 욕망을 유보하고 절제하는 삶의 자세이다. 그러기에 욕망은 연기에 대한 깨달음을 매개로 ‘욕망의 자발적 절제’와 보살행의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는 지평을 펼친다.

연기의 대승적 깨달음이 보살행

삼국유사엔 보살행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애장왕(哀莊王: 801~810) 때 한겨울밤에 정수 스님은 천엄사(天嚴寺) 문밖을 지나다 한 여인이 얼어 죽어가자 모든 것을 다 벗어주고 알몸으로 절로 뛰어갔다. 그 이야기와 함께 언뜻 떠오르는 향가는 ‘천수대비가’다. 경덕왕(景德王: 742~765) 때다. 지금 경주 분황사 동쪽 지역인 한기리에 사는 양인 계층의 한 부녀, 희명(希明)이 눈먼 자식을 데리고 분황사의 관음보살을 찾아 아이를 시켜 ‘천수대비가’를 불렀다.

무릎을 꿇으며/두 손바닥 모아 괴면서/천수관음(千手觀音) 전에/축원의 말씀을 두노라//천 개의 손엣 천 개의 눈에서/하나를 놓아 하나를 덜겠사옵기에/두 눈이 먼 나이니/하나야 주소서 매달리누나//아야야! 나에게 끼치여 주신다면/내놓아도 쓸 자비사 뿌리인고.

여기서 현실은 자식이 난 지 5년 만에 갑자기 눈이 멀어버린 사실이다. 이상은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 잘 살고 나아가 중생도 구제하는 것이었으리라. 양자는 심각한 괴리를 빚는다. 이 괴리를 메울 자로 희명이 선택한 것은 분황사의 좌전 북쪽 벽에 걸린 천수대비 관세음보살이다. 우선 지금이나 그때나 부모의 마음, 눈 먼 자식을 둔 애끊는 현실에 동감하기에 이 구체적 현실 자체가 진정성을 낳는다.

여기에 진정성을 더하는 것은 불교의 세계관이다.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을 보면, “만약에 한량없이 많은 1백천만 억의 중생이 가없는 고뇌에 빠지더라도 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그 이름을 일컬으면 관세음보살이 즉시 음성을 듣고 모두 해탈을 얻도록 하나니라.”라고 설하고 있다. 신라 시대에 미타신앙이 내세의 왕생을 희구하는 이상의 실현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면, 관음신앙은 현실의 고통의 구제에 중점을 둔다. 당시의 서민들은 삶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고통을, 구세이생(救世利生)하는 관세음보살의 대비원력을 통해 가장 쉽고 친근하게 해소할 수 있었다. 때문에 관음보살이 낮은 데 임한 이들의 고통을 구제하는 대자대비심을 발할 것이란 점은 이미 전제된 것이다.

여기서 희명은 관음보살께 질박하지만 부모의 애틋한 마음이 담긴 서원을 한다. 교리를 떠나 천 개의 눈을 가진 관음이시니 그 가운데 하나를 자신의 자식에게 떼어주셔도 별 상관이 없을 것이라는 발상을 하고, 또 중생구제를 서원으로 한 보살인 이상 이것이 꼭 이루어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고 “천 개의 손엣 천 개의 눈에서 하나를 놓아 하나를 덜겠사옵기에”라고 감히 말한다. 관음보살에 대한 굳은 신심에 실현될 것을 확신하면서도, 눈먼 자식을 둔 어머니로서는 자식이 밝음을 얻기까지는 아프고 불안하다. 이에 희명은 “두 눈이 먼 나이니/하나야 주소서 매달리누나”라고 하소한다. 자기 자식이 처한 입장이 절박하면 할수록 모성애는 뜨거워지니 이 목소리는 직설적으로, 원초적으로 내뿜어진다.

그렇게 하소연하고 나서 어머니로서의 희명은 아직도 불안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 거듭 강조하고자 한다. 반면에 부처님 앞에 선 한 중생으로서의 희명은 하소연만으로 끝낼 수 없는 것이다. 초월적 존재에 대한 예를 갖추어야 한다. 이 두 가지 마음이 하나로 응축되어 표명된 곳이 결구다.

결구에서는 ‘아, 야, 야! 나에게 끼치여 주신다면’이라고 하여 거듭 강조를 한 다음 “내놓아도 쓸 자비사 뿌리인고.”라고 말하고 있다. 불교에서 근(根)이란 근본, 증상(增上)하고 능생(能生)하는 작용을 말한다. 그냥 근(根)이라 함은 인식의 근본인 육근(六根)이기도 하고 선행업의 근본인 선근(善根)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부분은, “너무나 자비심이 크신 관음보살님이시기에 나에게 그 자비를 베풀어주신다 한들 그 무량한 자비야 항상 뿌리를 이루어 육근과 선근의 근본을 이루면서 샘솟듯 솟아나리”란 의미이다.

원초적 모성으로 빛나는 향가

이처럼 이 노래는 한기리의 양인 부녀 희명이 관음보살의 자비심에 의지해 아들의 눈을 뜨고자 하는 마음으로 분황사의 천수관음보살 전에 가서 자식을 시켜 부르게 한 노래이다.

 의례를 무시하고 무릎부터 꿇고, 교리를 떠나 눈 하나를 떼 달라고 기구하는 것이나, 은유와 상징보다는 직설적인 일상어로 노래한 것은 위대한 시인이나 부처님 앞에 선 신도가 아니라 눈먼 아이를 둔 한 어머니로서 모성을 원초적으로 표출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하듯 완전한 버림만이 완전한 사랑을 낳고 온전한 변화를 낳는다. 그러기에 이 노래는 문학성은 다른 향가에 비하여 떨어질지 모르지만 진정성은 별처럼 빛난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