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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수용과 법열의 미학 상

기자명 법보신문

작가와 독자가 대화할 때 미학의 새 지평 형성

 
예술 작품의 가치는 작가의 의도와 독자의 견해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를 좁혀가는 과정에서 생산된다.

우리는 흔히 예술작품의 감상을 작가의 의도를 찾는 작업으로 착각한다. 예술작품이란 남보다 탁월한 예술적 감각과 감수성, 천재적인 창조력을 지닌 작가가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특별한 형식에 담아내는 것으로 간주한다. 때문에 우리는 한 편의 시나 미술작품을 대하면, 먼저 그를 창조한 작가의 목소리를 듣고자 한다. 그를 직접 들을 수 없으면, 그에 관한 전기나 그가 남긴 자료들을 뒤져 작가를 종합한다. 작가가 그 작품에 대해 직접 평하거나 남긴 메모가 있다면 금상첨화다.

오랜 못이여, 개구리 뛰어드는/물소리 퐁당
(古池や蛙飛びむ水の音)

우리는 보통 위의 하이쿠의 의미를 알기 위해 작가인 마츠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에 주목한다. 그는 에도 시대를 대표하는 하이쿠 시인, 하이진이다. 1644년 이가우에노에서 가난한 하급 무사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당시의 풍속을 소재로 재미 삼아 웃기는 것으로 일관하던 기존의 일본 전통 시형식인 하이까이에 회의하였다.

그는 암자에 은거하면서 두보(杜甫; 712-770)와 소동파(蘇東坡: 1036-1101)의 시에 심취하며 정신적인 구도에 정진하여, 대상을 직시하면서 그에 인간의 심오한 사상과 정서를 압축적으로 담아 5.7.5조의 하이쿠 형식에 표현하였다. 작가에 관련된 사항과 함께 이 하이쿠를 바쇼가 머물던 암자에서 썼다는 사실이 이를 해석하는 맥락으로 작용한다. 하이쿠에서 휴지(休止)를 주어 다양한 연상을 가능케 하는 키레(切れ)는 “오랫된 못이여(古池や)-”로 오래된 연못의 그윽함, 고요함, 유장함을 떠올리게 한다.

계절에 관련된 풍속과 이미지를 떠오르게 하는 계어(季語)는 “개구리(蛙)”로 봄날의 배경 이미지를 형성한다. 봄날에 오래되고 고요하고 그윽하며 유장한 연못에 개구리가 뛰어들자 퐁당 하고 물소리가 나고 이내 정적이 연못 주변을 휩싼다.

이런 정보들을 종합하면, 위 하이쿠는 “바쇼가 봄날 세상과 동떨어져 한적한 생활을 하는 공간인 초암 주변에서 청태가 끼어 그윽함과 유장함, 고요함을 간직한 연못에 개구리가 뛰어들어 물소리를 내 더욱 정적을 더하는 시”로 해석한다. 흔히 하듯, 개구리 울음 소리가 아니라 물에 뛰어드는 소리로 봄을 표현한 것이 독창적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방식의 해석은 몇 가지 문제를 지닌다. 우선 예술은 작가의 의도를 넘어서는 무엇이다. 작가의 의도가 곧 예술이라는 전제는 예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명제다. 예술은 의도를 떠나 상상력을 펼치고, 대상을 형상화하고, 현실을 굴절시키고, 전의식이나 무의식이 범벅이 되어 빚어내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의도가 예술작품에 담기는 것이 일부 사실이지만, 의도에 기울어질수록 작품의 예술성은 사라진다. 만약 의도가 예술이라면 철학자가 시를 쓰고 사회학자가 현실을 묘사한 소설을 써야 되지 않을까?

작가는 동일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자아는 타인과 관계망 속에서 찰나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지 단독으로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동일성의 사유는 일종의 환상이다. 전기의 바쇼와 후기의 바쇼가 차이가 나며, 제자들과 함께 하는 바쇼와 승려와 함께 하는 바쇼, 여인과 함께 하는 바쇼가 차이가 나며, 아침의 바쇼와 저녁의 바쇼조차 다를 수 있다.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는 텍스트

텍스트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텍스트는 그것이 놓인 맥락에 따라, 그를 수용하는 독자에 따라 다양한 의미망을 펼친다. 시인은 사전 속에서 낱말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맥락 속에서 이를 선택한다. 지난 연재에서 “달을 그렸다.”라는 말이 미술시간의 맥락에서는 “지구의 위성을 그림으로 그렸다.”이지만, 산수시험 점수를 묻는 맥락에서는 “0점을 맞았다.”라고 하였다. 낱말이 그런 상황인데, 낱말의 집합체인 텍스트는 맥락 속에서 더욱 다양한 의미를 형성한다.

마지막으로, 이와 같은 감상은 작가의 의도 안에 독자의 자유로운 감상과 해석을 가두어버리는 압제적 읽기 방식이다. 작가가 자유로운 생각과 상상을 펼치는 주체이듯, 독자 또한 작가의 의도를 떠나 자신의 정서와 의지대로 작품을 감상하고 해석하는 주체이다. 이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는 이미 1958년에 ‘작가의 죽음’을 선언하였고, 수용미학자들은 독자들이 주체가 되어 작품을 수용하는 미학체계를 세운 것이다.

수용미학에서 볼 때, 작품은 작가의 사물에 대한 번득이는 감수성, 천재적인 영감, 현실을 통찰하는 의식과 이 모든 것을 언어기호를 빌어 텍스트로 짜내는 기법 등이 종합하여 빚어진 완결체가 아니다. 문학작품을 인쇄한 책이란 흰 종이 위에 찍혀진 검은 기호들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다. 활자 사이사이에 수많은 여백이 있다. 작품을 읽으면서 상상력을 펼치고 사고를 하면서 그 빈틈을 채우면서 연관관계를 찾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문학)작품은 독백적으로 텍스트의 초시간적인 본질을 드러내는 기념물이 아니라 독자와 끊임없이 대화하는 복합체인 것이다.”(H. R. Jauss, Toward an Aesthetic Reception)

미학적 가치 또한 예술작품 내에 객관적으로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독서와 수용의 복합적인 사회적, 역사적 과정을 통해 생산된다. 연주되지 않는 악보는 음악이 아니라 단순한 노트에 지나지 않는다. 관객들은 연주를 듣고서야 감동을 하고 미적 평가를 내린다. 이처럼, 예술작품은 읽기와 감상 과정을 거쳐서 미학적 가치를 지니며 사회적으로 존재한다.

 이들은 독서와 감상행위라는 독자의 실천행위를 거쳐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술의 연구 대상은 작품 자체가 아니라 작품이 독자와 만나 실현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목욕탕의 거울에 맺힌 물방울은 낙하를 하다가 다른 물방울과 만나 더 큰 물방울이 되어 흘러내린다. 물방울처럼 일정한 세계를 가진 독자가 예술작품과 만나 그 작품이 펼쳐주는 세계와 처음엔 갈등을 일으키지만 결국 합쳐져 새롭고 더욱 심화하고 확대된 세계에 이르는 것이 바로 예술작품의 읽기와 감상이다. 우리는 작품을 대할 때 나름대로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정보를 종합하여 ‘기대의 지평’을 형성한다. 이것은 텍스트의 지평을 만나 갈등을 하고, 곧 두 물방울이 합쳐지듯 ‘지평의 융합’을 이룬다. 여기서 작품의 부분을 이해한 것이 쌓여 전체를 보고 전체를 본 것으로 다시 부분을 보며, 부분을 보고서 쌓인 이해를 통해 새로운 지평을 갖게 되고 이 새로이 열린 지평으로 작품을 다시 이해한다. 바로 이것이 ‘해석학적 순환’인데 이것이 매개의 구실을 한다.

“이해란 확실히, 전통적 견해에 동화되는 것이나 전통이 신성스럽게 여겨왔던 것을 그대로 승인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Hans-Georg Gadamer, Truth and Method) 진정한 이해란, 작품이 놓인 지평과 역사적 의미들과 전제, 전통을 바탕으로 우리 스스로가 형성한 ‘기대의 지평’이 맞섰을 때 이 간극을 인식하고 대화에 참여하여 양 지평을 융합시켜 원래의 입장을 넘어서서 새로운 이해에 이를 때 일어난다. 그러기에 독서란, “기대의 지평에 따른 평가와 편견에 동화되지 않도록 하여 결국 과거의 지평과 현재간의 명백한 구별을 통하여 시적 텍스트를 꾸준히 변모하는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H. R. Jauss, Toward an Aesthetic Reception)

위의 하이쿠에서 “개구리가 물속에 들어갈 때는 미끌미끌한 피부와 원추형의 체형으로 인하여 물결이 일지 않고 소리가 나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봄날에 개구리가 연못으로 뛰어드는 물소리를 전제로 한 해석과 이 해석을 바탕으로 형성한 감상과 세계는 무너져버린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작품 전체를 다시 읽으면 “물소리 퐁당”은 실제 소리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이는 “소리 없는 소리를 마음의 귀로 들은 것이다.” 마음의 소리란 것을 깨우친 순간, 독자의 기대의 지평은 무너진다. 마음의 귀로 들은 것이 과연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독자는 “오래된 연못은 세상 사람들과 동떨어져 한적한 생활을 보내는 초암(草庵)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기에 어김없이 찾아온 봄의 고동을 마음의 귀로 들은 것도 새롭지만, 소리 없는 소리를 듣고 생명의 발동을 포착한 것이다.”라고 해석한다.(오가따 쯔또무/전이경, 『순간 속에 영원을 담는다』)

미학적 가치는 수용 과정서 생산

이것만이 아니다. 독자가 주체가 되어 현상학적으로 무엇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위 하이쿠는 새로운 지평을 펼친다. 예술적 가치를 지향하는 이들은 텍스트 자체에 주목하여 “연못의 정적이고 시각적인 이미지와 개구리 소리라는 역동적이고 청각적인 이미지를 대비시키는 가운데 개구리가 뛰어드는 순간, 찰나적으로 정적인 세계에서 동적인 세계로 전환하였다가 그 소리와 파문이 잦아들면서 다시 정적인 세계로 돌아가게 하는 시”로 해석한다.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은 개구리가 물로 뛰어든 원인을 제공한 이를 시적 화자 자신으로 보아 “뭇생명이 겨울잠을 자고 있던 오래된 연못에 봄을 맞아 산책을 나온 이의 발걸음에 놀라 개구리가 연못으로 뛰어들어 파문을 만들어 작은 세계 안의 뭇생명을 깨우고 그 파문에 시적 화자 자신의 마음에도 파문이 일어 생명의 환희로 들뜬 경지를 형상화한 시”로 해석한다. 존재론적 가치를 지향하는 이들은 “그윽함과 유장함, 고요함을 간직하고 있고 그 자체가 청정심인 연못에 개구리가 뛰어들자 마음속에 물소리가 들리지만, 곧 그 소리가 사라져 더욱 깊은 정적과 적멸의 세계로 몰입하면서 무수한 생명,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경지를 읊은 시”로 해석한다.

이렇게 독자는 텍스트의 부분을 전체적 맥락과 대비하여 해석하고 다시 전체적 맥락에 비추어 부분의 특징들을 이해하는 것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앞에서 읽은 것과 뒤에서 읽은 것, 텍스트의 지평과 자신이 전통적으로 알고 있었고 자신이 놓인 사회적 맥락에 따라 기대되는 지평 간 괴리를 발견한다. 이것을 메우기 위하여 독자는 대화를 시도한다. 대화를 통하여 다른 입장과 견해를 받아들여 자신의 입장과 견해를 종합하여 ‘지평의 융합’을 이룬다. 이 과정에서 텍스트의 의미를 구체화하고 새로이 작품을 이해하며, 결국 낯익은 세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 새로운 미학적 가치를 구성하게 된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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