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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근현대 불교사]59. 1994년 조계종 개혁종단

기자명 법보신문

사부대중이 함께 이룩한 불교계 첫 민주화

 
1994년 4월 13일 승려와 신도들이 종단 비상사태를 타계하기 위해 조계사에서 개최한 범불교도대회. 사진제공=민족사

서의현 총무원장의 독선적 3선 개헌이 발단
수행승·학승 주축, 개헌저지 범종추 결성
잇단 승려대회-범불교대회로 서의현 압박
노부호·박광서·남지심 등 재가지도자 참여
새 비전 제시 못하고 제도 개혁에만 그쳐

1994년 대한불교 조계종은 큰 내홍을 겪게 된다. 사태 발단의 원인은 당시 서의현 총무원장이 장기 집권을 획책하였기 때문이다. 1988년 5월에 개정된 종헌에 따르면 “총무원장의 임기는 4년으로 한다. 단, 중임할 수 있다”라고 되어있었다.

서의현은 중임이란 거듭할 수 있다는 뜻이며, 구체적으로 횟수가 명시되지 않은 점을 들어 3선을 강행하였다. 총무원장은 중앙종회에서 선출하게 되어있었다. 중앙종회 의원 구성은 75명으로 직선으로 선출되는 의원은 24개 교구에서 각 2명씩 48명이고, 간선의원이 27명이었다. 직선 의원들은 대부분 본사 또는 주요 사찰의 주지였고, 본사 주지의 임면권은 총무원장이 가지고 있었다. 간선의원을 선출하는 간선선출위원회 위원장 또한 총무원장이 맡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직선이든 간선이든 총무원장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중앙종회는 3월 30일 불교회관 5층에서 비공개 회의를 진행하여 재적 75명 가운데 58명의 의원이 참석하여 찬성 56표 기권 2표로 서의현을 제27대 총무원장으로 선출하였다. 서의현 총무원장의 또 다른 비리는 상무대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상무대 사건은 국방부가 광주와 김해에 있는 제병합동교육본부 및 병과학교를 전남 장성군으로 이전하는 사업으로 이 과정에서 조계종 총무원장을 통하여 정치권에 로비 자금을 제공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업은 청우건설에서 수주하였는데 대표이사 조기현은 총 공사비 1천 6백억원 가운데 6백 58억원을 선급금으로 받았다. 이 중에 2백 27억원을 개인적인 용도로 유용하였는데, 80억원을 서의현이 주지로 있던 대구 동화사 통일약사여래대불 건립기금으로 시주하였다고 한다. 이 80억원은 동화사 재무담당 스님의 손을 거치지 않고 주지인 서의현에게 직접 건내졌다고 한다. 서의현은 이 돈을 여당과 야당에 대선자금으로 지원하였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그는 불교계가 정치권과 결탁한 비리 집단으로 비치게 한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서의현의 3선을 저지하고, 종단의 비리를 척결하고자 한 세력은 장년층의 수행승과 젊은
학승들이었다. 이들 개혁 세력은 동국대학교 석림동문회, 동국대학교 동림동문회, 선우도량,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전국승가대학학인연합, 중앙승가대학학생회, 동국대학교 석림회 등의 구성원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은 서의현의 3선 기도를 미리 파악하고 3월 23일 안암동 개운사에서 범승가종단개혁추진회(이하 범종추라고 약칭함)를 결성하였다. 범종추는 불교계의 비리를 자체적으로 척결하고 개혁하려는 의지를 천명하였다. 범종추 소속 300여명의 스님들은 3월 26일부터 서의현 총무원장을 퇴진시키기 위해 무기한 단식 농성에 돌입하였다. 불교계의 지식인들도 범종추의 개혁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노부호(서강대)·박광서(서강대)·성태용(건국대) 교수들과 소설가 남지심은 서의현의 3선을 반대하고 불교계의 개혁을 촉구하였다.

서의현의 결정적인 실수는 자신의 비리를 폭력을 사용하여 해결하려 한 것이었다. 그는 3월 29일 새벽 6시 30분 경 폭력배 300여명을 동원하여 각목을 휘두르며 농성 중이던 승려들을 폭행하였다. 그는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의 명의로 종로경찰서에 공문을 보내어 조계사 경내에서 폭력 사태가 발생할 경우 즉각 경찰을 투입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러한 요청에 따라 종로경찰서는 3월 29일 오후에 전경 1천여 명을 조계사 경내로 투입하여 농성 중이던 승려들을 해산시키고 200여 명을 연행하였다. 서의현은 불교계의 문제 해결을 위하여 폭력배를 동원함으로써 사회적인 문제로 비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경찰은 폭력배의 동원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묵인하였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다.

범종추의 개혁 활동에 힘을 실어 준 것은 교계의 원로들로 구성된 원로회의였다. 원로회의는 부의장인 혜암 스님의 주도로 4월 5일 종로구 봉익동 대각사에서 개최되어 서의현 총무원장의 즉각 사퇴와 10일에 전국 승려대회를 개최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승려대회는 모든 승려가 참여하여 자유로운 토론을 통하여 주요 사안을 결정하는 직접 민주제 방식의 초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기구였다. 범종추는 이 사태가 승단에 국한되는 사안이 아니고 불교계 전체의 문제라는 인식을 확산시키기 위하여 4월 6일 범불교도 대회를 개최하였다. 승려와 불교도 2000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봉행된 범불교도 대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하였다.

첫째, 김영삼 대통령의 사과, 둘째, 최형우 내무장관의 해임, 셋째, 서의현 총무원장의 사퇴, 넷째, 전 종도들의 종단 개혁 적극 동참 등이었다. 서암 종정은 전국 승려대회 개최를 하루 앞 둔 시점에서 돌연 원로위원 3명과 중진 승려 30명이 모인 가운데 원로·중진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승려대회의 개최를 금하고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라는 교시를 내렸다. 그러면서 문제의 핵심인 서의현 총무원장의 사퇴 문제는 언급을 회피하였다.

종정의 이러한 교시는 개혁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다. 범종추의 승려가 주축을 이룬 승려대회 봉행위원회 측은 소식지를 발간하고 예정대로 4월 10일 조계사에서 전국 승려대회를 개최하였다. 취지문 가운데 “이 승려대회는 국민 대중과 역사 앞에 바치는 우리 승가의 참회와 자자이며, 깨달음에 돌아가 역사와 사회 중생에 헌신하는 불교 건설을 향한 청정한 승가의 치열한 자기 발원이다”고 밝혔다.

범종추는 승려대회를 통하여 불교계의 현안 문제에 대하여 철저한 자기반성을 하고, 새로운 장을 열어가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이 승려대회에는 종단 개혁을 열망하는 승려와 불자 등 3000여명이 참가한 사상 최대 규모의 승려대회였다. 승려대회는 다음과 같은 5개항의 결의 사항을 채택하였다.

첫째, 서의현 총무원장의 모든 공직을 박탈한다. 둘째, 현 총무원 집행부를 불신임한다. 셋째, 서의현 총무원장이 주도하는 종단개혁위원회의 해산을 결의하는 한편 승적을 박탈하고 불가에서 영원히 추방하는 체탈도첩의 징계를 내린다. 넷째, 종정 서암 스님을 불신임한다. 다섯째, 개혁회의를 출범시킨다. 불교계의 대세가 이렇게 흘러가자 서의현은 4월 13일 총무원장 사퇴의사를 표명하였다. 이 날 오후 5시 조계사에서 승려와 신도 5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범불교도대회가 다시 개최되었다. 이 대회의 개최 목적은 승려대회 당시 공권력을 투입하여 불교계를 유린한 김영삼 정권에 책임을 묻고, 승려대회 결의사항 실천을 다짐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회를 마치고 참가자 1000여명은 조계사에서 세종로 네거리까지 시가행진을 벌이며 경찰의 조계사 진입을 항의하였다.

승려대회의 결의에 따라 출범한 개혁회의는 총무원 집행부가 구성되기까지 3권을 위임받아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구였으며 존립 기간은 6개월이었다. 개혁회의는 정법 종단의 구현, 불교자주화 구현, 종단 운영의 민주화, 청정교단의 구현, 불교의 사회역할 확대 등 10가지 실천 공약을 내걸었다. 개혁회의는 5월 11일에는 월하 스님을 종정으로 추대하고 승려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김영삼 정권이 불교계를 유린한 것을 법난으로 규정하고 법난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불교계에 공권력을 투입한 것을 항의하기 위해 1300여명의 불자들이 검찰 청사로 몰려가 법난책임자 고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법난위원회의 활동으로 6월 16일 최형우 내무부 장관은 총무원장을 방문하여 조계사에 경찰을 투입하고, 스님들을 연행한 것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하였다. 불교계는 정부 측과 불편한 관계를 신속하게 해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던 차에 7월 11일 김영삼 대통령의 초청으로 월하 종정과 탄성 총무원장은 청와대를 방문한다. 두 지도자의 청와대 방문은 개혁회의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전격적으로 단행되어 이후 대정부 투쟁은 퇴색하게 된다.

개혁회의는 종헌과 종법을 개정하여 11월 7일 중앙종회 선거를 실시하여 제11대 종회를 개원시켰다. 그리고 총무원장 간선제를 채택하여 11월 23일 중앙종회는 송월주 스님을 제28대 총무원장으로 선출하였다. 이러한 일을 마무리 지은 범종추는 원래 약속했던 6개월의 시한을 2개월 연장한 12월 8일 후일 역사에 평가를 맡기고 해산하였다.

1994년 불교계 개혁운동은 불교계의 구조적인 모순을 해결하고 향후 불교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개혁의 주체를 승려들로만 한정하지 않고 사부대중의 의견을 폭넓게 수용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개혁회의는 불교계의 민주화에 큰 성과를 거두었지만 한계점 또한 적지 않다. 첫째, 법난사태를 명확하게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종정과 총무원장이 청와대를 방문함으로써 개혁의지를 희석시킨 점이다. 법난사태 해결을 위해 출범 초기 전국 유명 사찰의 산문 폐쇄를 선언하고, 법난사과 현수막을 걸었던 모습은 분명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막을 내렸다. 둘째, 개혁회의는 21세기 불교계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겠다는 각오로 출범하였으나 결국 제도개선에 그치는 선에서 개혁을 마무리 지었다.

셋째, 불교계의 절반을 차지하는 비구니들의 헌신적인 참여에도 불구하고 99명의 개혁의원 가운데 고작 9명을 선임함으로써 시대의 추세를 외면하는 모습을 보였다, 넷째, 서의현 총무원장의 3선으로 인하여 이 사태가 발생하였는데 그를 총무원장으로 선출한 종회의원들을 개혁회의에 포섭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4년 개혁회의는 모든 불교도들이 합심해서 독재체재를 타도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불교계 민주화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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