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수용과 법열의 미학 [하]
38. 수용과 법열의 미학 [하]
  • 법보신문
  • 승인 2008.12.01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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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 멈추는 순간 의식은 부처의 자유에 이른다
 
국보 83호 미륵반가사유상.

법열이란 법을 듣거나 생각하거나 행하였을 때, 진리를 체득하는 그 순간에 누리는 위없는 기쁨을 뜻한다. 108배를 하다가, 기도하다가, 불상을 보다가, 경전을 읽다가, 화두에 몰입하다가, 선정을 하다가 삼매의 경지를 든 자는 안다. 법열의 순간 느끼는 환희심을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음을.

그때도 그랬다. ‘한국 미술 5천년전’으로 기억한다. 아마, 청년기에 미륵반가사유상과 석굴암 본존불을 대하였을 때 느꼈던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이 필자를 불교미학의 길로 빠져들게 한 것 같다. 그때 거기 미륵반가사유상(국보 83호)이 있었다. 반가부좌를 한 채 깊은 사유에 잠겨 있었다. 오른 팔로 턱을 괸 채 오른 쪽 다리를 왼 무릎 위에 걸치고서 앉아 있는 품이 너무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바늘만한 틈조차 보이지 않는다.

머리에 쓴 삼산관(三山冠)은 세모이면서도 둥그런데, 아무런 장식도, 문양도 없이 보는 방향에 따라 각도를 달리 하며 꽃을 피운다. 관은 얼굴과 한 몸을 이루어 내리 누르지 않고 조화를 이루어, 얼핏 보면 머리에 쓴 갓이 아니라 부처님 상호에 피어난 연꽃 같다.

나신인 몸은 아무런 장식이 없이 두 줄 목걸이만 걸쳐, 단순하면서도 흘러내린 선이 아름답다. 작은 어깨를 하고 가슴을 부각시키지 않았는데도 장중하고, 오른 팔은 턱을 괴고 왼 팔은 반가부좌를 한 오른 발목 위에 올려놓았는데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볍고 날렵하다. 왼 다리는 수직으로 내려서 작은 연좌(蓮座) 위에 살포시 얹었고, 오른발은 그 무릎 위에 얹어 반가부좌를 틀었다. 수직으로 뻗은 다리는 폭포처럼 힘이 넘치는데, 수평으로 얹은 다리는 바다처럼 고요하다. 흘러내린 치맛자락은 부드러우면서도 입체적이고, 크고 작은 오메가형의 양식이 직선과 사선의 구도 속에 우아한 곡선의 미를 반복한다.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상호를 보면, 둥근 얼굴은 풍만하고, 눈썹에서 코로 흘러내린 선은 매끈하고 맵시가 있다. 턱을 향해 뻗은 손가락은 날씬하고 미려하다. 둥그런 턱과 두툼한 볼은 원만하여 오뚝 선 콧날과 대조를 이룬다. 반쯤 감은 눈은 무거운 정적 속에서 깊은 사색에 잠기게 하는데, 언뜻 눈을 뜨고 바라보니 미소!

살짝 다문 입가에 살풋 번지는 미소. 지극한, 위없는 깨달음에 이른 자만이 낼 수 있는 미소다. 이 미소로 인하여 파문이 일고 보살상의 세포들이 모두 일시에 깨어나 합창을 한다. 얼굴엔 생기가 흐르고, 팔과 다리엔 피가 돈다. 석굴암의 본존불상이 살짝 들어 올린 새끼손가락으로 인하여 살아 움직이게 되었다면, 미륵 반가상을 피가 흐르고 기운이 생동하는 부처로 승화시킨 것은 바로 저 미소다.

미소가 던진 파문은 방을 채우고 이내 내 몸에도 전해진다. 발끝으로부터 정수리까지 내 몸은 갑자기 전율에 휩싸이고, 그것은 천장을 뻗어나가 온 우주를 떨게 한다. 적멸에 이르는 정적인가 하면 기운차게 생동한다. 여성스럽게 부드럽고 연약해보이면서 남성스럽게 힘차고 엄숙하다. 아름다우면서도 거룩하다. 슬프면서도 기쁘다. 이런 모순적인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미소 때문이다.

청동 속 부처와 내 안 부처의 조우

그리 꽤 긴 시간을 멍하니 있는데 뭔가 얼굴에 흘러내린다. 눈물이다. 아무런 까닭이 없이, 무슨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난다. 미륵보살은 깨달음의 희열을 저 미소로 드러내고, 나는 눈물로 나타내나 보다. 아니, 청동 속에 담긴 부처가 미소로 나투시고, 그에 화답하여 내 안에 잠긴 부처가 눈물로 현현하는 것이리라.

이것과 쌍둥이처럼 유사한 것이 일본 국보 1호인 코류지[光隆寺]의 미륵반가사유상이다. 이 불상의 재질이 한국의 백두대간에서만 나는 적송이고, 통나무를 통째로 목심(木心)에서부터 조각하는 양식이 이 땅의 제작방식이며, 코류지가 603년 한국에서 이주해 온 직물기술자 진하승(秦何勝, 하타노 가와카쓰)이 건립한 절이다.

이런 까닭에 이 불상 또한 고대 한국인이 만든 것이리라. 이 불상에 대해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년 - 1969년)는 “나는 지금까지 철학자로서 인간 존재를 최고로 완성시킨 모습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뛰어난 예술 작품을 접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신들을 조각한 조상도 보았고, 고대 로마시대에 만든 수많은 기독교의 예술품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어느 것에도 아직 초극되지 못하는, 지상의 인간적인 단순한 자취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코류지의 불상에는 진실로 완성된 인간 실존의 최고 이념이 남김없이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시간적인 속박을 초월해서 도달한 인간 존재의 가장 청정하고, 가장 영원한 모습의 표상이다.”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온 야스퍼스도 부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인간을 초극한 가장 청정하고 가장 영원한 표상이 이 불상에 담겨 있음을 느낀 모양이다. 강우방 선생도 저서 『반가사유상』에서 “반가사유상은 구제나 구원의 대상이 아닌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존귀한 존재로서의 인간 모습을 구현했다”고 평하였다.

이처럼 법열의 미학은 예술 작품 속의 부처를 만나 독자 스스로 깨달아 다른 존재로 거듭나는 희열에 떠는 경지다. 서양의 수용미학이 독자가 주체가 되어 예술작품과 내가 지평의 융합을 이룬다면, 법열의 미학은 작품 안에 내재하는 부처를 만나 마음으로 진리의 말씀을 듣고 자기 스스로도 시나브로, 혹은 퍼뜩 부처가 되는 경지다. 수용미학이 기대지평을 해체해야 독서의 열락에 이르는 것처럼, 법열의 미학은 모든 의식과 판단을 중지하는 순간에 의식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 수용미학이 지평의 융합을 이루는 것처럼, 법열의 미학은 독자와 작품, 작품-속-부처와 내-맘-속-부처가 하나로 원융을 이루는 데서 오는 환희심이다.

말이든 아니든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고 지시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도 마음도 아니기에, 진여실체(眞如實體)는 말을 떠난 무엇이다. 이 세상 최고의 장인이 신의 경지에 가깝게 불상을 만든다 하더라도 그것이 부처님의 뜻에 미칠 수는 없다. 『금강경(金剛經)』에서 “형상으로 나를 보면 이것이 바로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럼에도 불상을 만든 뜻은 독자가 불상을 감상하면서 법열에 이를 경우 부처를 만나고 그 부처를 만나는 가운데 부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법열의 미학은 작품과 독자가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불교는 대상과 미적 체험을 모두 부정한다. 대상은 의식이 형성한 허상이고 미적 체험이란 오온(五蘊)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진여 실체에 이르려면 의식작용의 본체[心王]가 객관의 대상[萬有]을 인식하는 정신작용[心所]이 오온(五蘊)에서 벗어나서 적멸(寂滅)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하지만 씨와 열매처럼, 예술작품과 독자는 스스로는 자성(自性)이 없이 공하지만, 씨가 자신을 죽여 열매를 맺고 열매가 자신을 썩혀 씨를 만들듯, 독자가 자신을 버리고 작품과 일체를 이루고 작품이 작가의 의도를 소멸시키고 독자와 실현되는 순간, 작품과 독자는 하나가 되고 독자는 오온을 벗어나 작품 속의 진리를 체득하게 된다. 그러니, 법열의 미학에서는 독자와 작품, 자아와 세계, 미와 추, 텍스트와 맥락, 작품의 지평과 의미, 진과 선과 미가 하나가 된다.

중생이 부처가 되려면 중생 스스로 아만(我慢)에서 벗어나 모든 의혹을 제거하고 삿된 생각을 버려야 한다. 법열의 미학은 나의 경험과 지식과 기억으로 구성된 기대의 지평을 작품을 만나 과감히 해체하고 작품의 지평 속으로 몰입하는 것이다.

법열의 미학은 오온을 벗어나 작품과 일체를 이루는 데서 성취할 수 있는 미적 쾌(快)이기에, 의식이나 미적 판단을 중지한다. 오로지 자신의 마음으로 작품을 직시하고 직관에 의존하여 작품 속 진리와 만나려는, 마치 선정처럼 작품을 감상하고 읽는 데서 오는 희열이다. 그러니 법열의 미학에서는 의식과 판단의 중지가 곧 자유가 된다.

작품과 독자의 ‘진속불이’ 경지

법열의 미학은 작품의 진리와 독자의 마음이 진속불이(眞俗不二)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독자의 마음은 본래 티없이 맑은 하늘과 같아 작품을 기존의 이해와 편견을 가지고 감상하지 않는다. 다만 본래 청정한 하늘에 티끌이 끼어 더러운 것처럼, 무명(無明)에 휩싸여 작품의 진리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이다. 유리창의 먼지만 닦으면 맑은 하늘이 드러나듯, 무명(無明)만 없애면 본래 청정한 독자 마음 속의 숨은 부처가 저절로 드러난다.

이 부처는 작품의 부처를 찾아내고 그 부처로부터 진리의 말씀을 듣는다. 그러니 작품 속 진리와 독자의 마음이 둘이 아니다.
임계치 이상의 물리적 충격을 받은 물질은 배열구조가 바뀌어 화학적인 성질 또한 변한다. 이처럼, 법열의 미학이란 원래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을 지닌 인간이 어떤 계기를 통하여 작품을 감상하다가 이를 전혀 다른 지평에서 인식하고 자신의 정신과 몸 안에 간직된 온갖 경험과 기억과 의식을 찰나적으로 재배열하여 자신의 존재를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하고 이 존재가 새로운 지평에서 작품의 의미를 읽는 순환을 계속 하다가 마침내 작품의 진리와 만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자유롭고 황홀한 상태에 이른 경지다. 법열의 미학은 작품을 전혀 다른 지평으로 읽는 데서 비롯되는 황홀경이자, 내가 예술작품을 통해 부처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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