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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불교의 대중예술론

기자명 법보신문

대중과 엘리트는 둘이 아니다

 
일상이 바로 도이듯 대중예술의 일상성과 통속성 속에도 진리는 숨어있다. 사진은 영화 ‘달마야놀자’의 한 장면.

불교 설화는 우리에게 진리를 알려 주는 방편이고, 영화 『달마야 놀자』는 스님과 조폭을 소재로 한 저질 영상물인가. 선시는 깨달음의 경지를 시의 형식으로 압축한 예술작품이고, 김국환의 ‘타타타’는 저자거리에서 유행한 3류 대중가요인가. 대중예술과 문화가 일상이 된 시대이니 보수적인 불자들도 후자를 어느 정도 인정할 것이다. 그럼 질문을 바꾸어, 강원에서 경전 대신 『달마야 놀자』를 교재로 선택하고, 선정할 때 공안 대신 ‘타타타’를 떠올리라 한다면? 아마 진보적인 불자들도 주저하리라.

산업사회가 되어 대중이 생산과 소비의 주체가 되면서, 중세 봉건 사회가 해체되고 신분질서가 무너지면서, 대중이 귀족을 제치고 사회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과 같은 매스미디어가 등장하면서 대중들도 귀족처럼 모차르트의 교향곡과 같은 고급문화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대중이 주체가 되어 매스미디어를 매개로 향유하는 대중예술과 문화가 나타난 것이다.

이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입장이 공존한다. 보수적 입장에 선 이들은 고급 예술작품을 감상하며 사람들은 인격을 도야하고 더 건전한 사회를 추구할 수 있지만 저질 폭력물과 선정적인 영화를 보면 사랑, 섹스, 물욕, 증오와 폭력 등 말초 신경적이고 감각적인 만족만 충족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볼 때 대중예술과 문화는 그간 엘리트층이 추구해 온 예술성을 시장의 논리에 팔아먹고 고상한 전통과 윤리를 무너트리는 타락과 야만이다.

대중은 예술의 주체적 수용자

하지만 진속불이(眞俗不二)론으로 보면, 사람들은 누구나 예술을 제대로 감상하고 그에서 진리를 찾을 수 있는 불성(佛性)을 지녔다. 대중은 무지하고 야만적이고 대중 매체에 쉽게 조작당하는 우중이자 자기 나름의 주체성을 가지고 자기 앞의 세계에 대응하고 문화와 예술 텍스트를 주체적으로 읽는 수용자이기도 하다.

대중은 원자화하고 부품화하며 이질적, 고립적, 비조직적 개체이자 타자와의 강한 유대 속에서 삶을 구현하고 조직을 형성하며 공동체를 추구하는 구성원이다. 대중은 지배이데올로기에 휘둘리는 대상이자 지배층에 맞서서 저항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실천집단이다. 대중은 대중문화에 의해 호명당해 형성된 거짓 주체이자 스스로 텍스트를 읽고 해석해 얻은 의미를 실천하는 참주체이기도 하다.

대중문화가 저질이고 야만이라는 것도 이분법적 편견이다. 중생과 부처, 주체와 대상 사이가 서열도 대립도 없이 평등한 것처럼 대중과 엘리트, 작가와 독자, 나와 타자라는 것도 둘이 아니며 하나도 아니다. 우리 몸에는 대중다움과 엘리트다움이 공존한다. 엘리트라도 속물이 되어 말초적인 향락에 탐닉하여 진리를 외면한다면 그 순간 대중이요, 대중이라도 감각적인 만족을 넘어 진리를 구하고자 한다면 그 순간 엘리트다. 대중도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읽기와 쓰기 능력을 통하여 텍스트를 올바로, 비판적으로 읽고 쓰는 순간 엘리트요, 엘리트도 텍스트의 외피나 허상이 던진 의미에 얽매여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순간 대중이다.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나오지 못한 이들도 주체가 될 때, 『달마야 놀자』에서 영화 속 조폭이 큰스님에게 교화되어 순화한 것처럼, 그 영화를 보며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사로잡혔던 삶을 성찰할 수 있다. ‘타타타’의 가사를 되새기며 경전의 게송 못지않은 감동을 하면서 만물을 그 본성대로 보고 자신도 여여한 삶을 추구할 수 있다. 주름진 얼굴을 가리려 화장을 짙게 하고 막걸리 한 잔에 설움처럼 토해내는 시골주막의 늙은 작부의 ‘동백아가씨’에서 어떤 명작 못지않은 사랑의 진실과 삶의 애환을 읽어낼 수 있다. 5일장을 돌아다니다가 보자기 위에 아무렇게나 늘어놓은 잡동사니 가운데 발견한, 소주 한 병 값이 아쉬운 촌로가 투박한 손으로 깎은 목각인형에서 고급 미술관에 놓인 조각상 이상의 감동으로 몸을 떨 때가 있다. 이런 작품을 대하면서 감동을 하지 못하고 진리를 찾지 못하는 이들은 외려 기존의 교육에서 비롯된 편견과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엘리트들이다.

통속성은 저질과 다르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나 노벨상을 받은 작품을 보면 하나 같이 남이 창조하거나 흉내 내지 못한 독창성을 함유하고 있다. 반면에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와 같은 대중 예술은 일상성과 통속성을 바탕으로 한다. 통속성에 대해 박성봉이 『대중예술의 미학』에서 제시한 범주를 따라 ‘성의 관능성’, ‘폭력의 선정정’, ‘몽상의 환상성’, ‘웃음의 해학성’, ‘눈물의 감상성’ 등 다섯 가지로 나누어 고찰해보자.

‘쭉쭉빵빵한’ 미인과 멋진 꽃미남이 행하는 섹스장면은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성적 욕망을 증대시킨다. 포르노물을 보고 자극 받은 청소년이 실제 그 행위를 흉내 내거나 강간 등의 범죄를 행하였다는 것은 쉽게 접할 수 있는 사건이다.

자동차가 산산조각이 나고 걸쭉한 피가 흐르는 선정적인 폭력 장면은 우리 안에 내재한 폭력을 조장한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백인 남성이 유색인종, 제3세계 민중을 악당으로 삼아 폭력을 행하는 것을 보고 대중들은 미국이 행하는 폭력을 정당화한다. 드라마에서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장면을 보고 모르는 사이에 가부장적 폭력을 용인하게 된다. 심지어 몇몇은 이를 자신의 문화로 수용하여 일상의 장에서 그대로 모방하기도 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마법의 세계, 환상적인 몽상은 현실의 모순을 은폐하며 더 나아가 현실을 조작한다. 현실을 보는 눈을 멀게 하며 우리 삶에서 구체성을 제거한다. 노동자들이 시위를 하다가 길에 쓰러져 피를 흘리건 말건 황홀한 마법의 세계에 빠져있게 하는 것, 국회에서 어떤 악법이 통과되었든 말든 말 그대로 신경을 끄게 하는 것, 자본가들이 어떤 악행을 저지르든 그가 만든 이미지에 취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환상의 중요한 기능이다. 환상은 ‘즐거운 도피’이다.

코미디와 개그 프로그램 등 웃기는 장면은 우리 삶에서 진지함을 앗아가고 현실의 모순을 은폐한다. 우리는 웃고 즐기면서 사이비 행복에 빠진다. 우리는 웃는 가운데 삶에 대한 성찰을 방기한다. 웃으면서 우리의 불행,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제도와 권력에 대한 비판을 누그러뜨리게 된다.

슬픈 장면을 대하면 대중들은 눈물을 흘린다. 감상성은 이성적 판단을 유보시키고 정감에 치우친 대응을 하도록 한다. 감상성은 현실과 치열한 대결을 정서적 반응으로 치환한다.
이처럼 통속성은 곧 저질인가? 이에 대해 불교는 아니라고 답한다. 주지하듯, 밀교는 법화경의 일생성불(一生成佛) 사상을 계승하여 즉신성불(卽身成佛) 사상을 편다. 『대일여래경』을 보면, 중생이 밀교를 방편으로 삼아 수행하면 부처의 대자대비한 힘의 가호를 받아 부처와 하나가 되는 무진 장엄의 경지에 들어가며, 부모로부터 받은 현신(現身)을 가지고 곧 바로 대일여래라도 될 수 있는 것이다. 밀교를 신앙한 신라인들을 보면, 고승대덕뿐만 아니라 노힐부득과 달달박박과 같은 평범한 양인(良人), 욱면과 같은 노비 신분의 중생도 바로 부처가 되었다.

『대일경』을 보면, 모든 여래는 방편바라밀에 통달하여 모든 실체의 본성이 공임을 말면서도 방편을 통하여, 말로 하면 진여실체가 아니지만 의어(義語)를 방편으로 삼아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듯, 무로 유, 무위로써 유위를 드러낸다. 여래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세상에 직접 나타나시어 불법을 구체적으로 깨닫게 하고 환희심을 발하게 함은 물론 삶의 즐거움, 오욕의 향락, 장수의 행복을 누리게 한다. 이처럼 일상의 즐거움과 깨달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욕망 또한 악이 아니다. 문명이 성적 욕망의 억압을 전제로 세워졌다는 프로이트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정치적 억압이 느슨해진 조선조 후기에 에로티시즘으로 넘치는 사설시조가 쏟아져 나온 것에서 보듯, 성적 욕망의 해방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해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욕망은 신기루이지만, 이는 또 인간의 모든 실천과 창조력의 원동력이다. 욕애와 무유애, 곧 육체적 욕망과 명예, 권력, 소유 등은 버려야 할 욕망들이다. 하지만 자신의 개체를 존속시키려는 욕망인 유애, 타인과 관계하여 공존하려는 욕망, 소유에서 존재, 일상에서 영원을 지향하는 욕망은 버려야 할 욕망들이 아니다. 욕망이 없다면, 인류가 그리 극찬을 마다하지 않는 걸작의 예술품도, 인류를 악에서 선, 억압에서 자유와 해방으로 이끈 이타적 실천도 없다.

대중문화 속의 선정적인 폭력은 우리 안에 내재한 폭력을 대리만족을 통해 체험하고 발산하게 하여 오히려 폭력을 줄일 수 있다. 대중문화에서 행하는 폭력은 명백한 선이 명약관화한 악에게 행하는 것이기에 대중들은 이를 보고 무엇을 위해 무엇에 대항해 싸우는가를 명확하게 인지해냄으로써 보편적인 권력의지를 대리적으로 만족시킨다.

대중 속에 존재하는 부처

환상은 즐거운 일탈이다. 환상은 억압된 욕망을 표출한다. 창조적 환상은 현실을 전복한다. 환상은 우리가 당연시하는 질서 밖의 세계를 향하여 열려 있다. 『콩쥐팥쥐』나 『성냥팔이소녀』는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을 돌아보게 한다. 『홍길동전』처럼, 환상은 법과 질서를 어긴 영웅들의 이야기를 꾸미고 현실에 대립적인 이상세계를 설정하기도 한다.

탈춤의 해학이 양반과 봉건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하듯, 웃음은 진지하고 엄숙한 것을 비틀어 기존의 권위를 깬다. 우리가 ‘참 우습다’라고 말할 때, 이것은 삶의 부조리함에 대한 부조리한 복수일 수 있으며,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는 자기 희화화일 수도 있다.
감상성이 일어나는 것은 순수한 사랑을 하려는 이들의 이별, 선한 자의 고통, 정의로운 자의 죽음 등 세계의 부조리가 야기되는 순간이다. 비극적 현실을 보고 흘리는 눈물은 사랑, 미 선, 정의를 지향하려는 대중 안의 영혼이 반응하는 것이자 선한 자를 비극으로 몰고 가는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저항과 분노의 대응이다.

누가 대중예술을 저질이라 하는가. 일상이 바로 도(道)이듯, 대중예술의 일상성과 통속성 속에 진리가 숨어 있다. 대중이 곧 부처이듯, 우리가 편견만 걷어내면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아니 그를 시청하는 내 안에서 언제든 부처를 만날 수 있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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