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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청심]맑은 가난

기자명 법보신문

거금도 금천선원장 일선 스님

섬에도 첫 눈이 내리고 있다. 마치 철없는 나비떼들이 허공 가득 군무를 펼치고 있는 듯 펄펄 날아오르고 있다. 어느덧 나뭇가지에는 살포시 내려앉아 눈꽃을 피우고 몽돌밭에는 목화솜을 깔아 놓은 듯 은빛 파도와 만나서 동색을 이루어 세상은 온통 바다가 되었다. 섬들은 가부좌를 틀고 선정에 들어 일체 생멸인연이 사라진 법성의 바다에 하얀 연꽃으로 피어오른다.


마침 오늘은 구들방이 완공되어 처음 군불을 때는 날이라서 축제라도 벌어진 것 같다. 저녁연기는 매서운 바람을 가르고 힘차게 굴뚝으로 솟구쳐 올라 하늘 끝에 닿았고 아궁이에는 일체 번뇌의 티끌을 태우고 있다. 그러나 티끌은 몸을 바꾸지 않고 바로 광명으로 화하여서 이글거리는 불덩어리들이 오색 사리인양 지혜를 나투고 있다.


냉랭했던 돌 속에 어느덧 피가 흐르니 방에는 온기가 퍼지고 군고구마 향기가 가득하다. 달은 구름을 헤치고 언뜻언뜻 고개를 내밀어 창을 넘어와서 속삭이고 사각거리는 대숲바람의 고절한 법음에 점점 겨울밤이 깊어가고 있다. 참으로 맑은 가난이라서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없으나 이렇게 여여하게 나투고 있으니 특별한 신통을 바라지 않는다.


향엄선사는 깨닫고 나서 오도송을 짓기를 ‘거년 가난은 가난이 아니어서 송곳 꽂을 땅이 없더니 금년 가난은 참 가난이라 송곳마저 없다’고 노래했다.


뼈를 깎는 정진으로 설사 청명한 겨울 하늘에 외로이 뜬 달처럼 고고한 경지를 자랑하고 오매일여의 경계에서 노닐고 있다고 해도 다시 한 번 죽어서 티끌경계로 나와 자유자재 할 수 없다면 평지에서 죽은 사람이니 목석과 같아서 추운 겨울에 냉기가 흐르는 사람일 것이다. 세상에 지금 대란이 닥쳐왔으니 여기에서 목숨을 던져버리고 갱진일보하여 다시 한 번 태어나서 이웃들과 아픔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
낮에는 작업복 차림으로 한창 일을 하고 있는데 외환위기 때 찾아와서 잠시 난을 피했던 처사님이 오랜만에 다시 찾아왔다.

 

아마도 실직을 한 것 같아 보여 사정을 들어보니 옛날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너무 안일하게 살아온 것 같아서 크게 고함을 질렀더니 자존심이 상했는지 도망을 치고 달아난다. 범부는 그 놈의 잘난 자존심 때문에 자신을 망친다. 지금 대란이 닥쳐왔는데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옛 버릇을 고치기만 하면 의젓한 부처여서 어떤 고난이라도 고난이 아니어서 투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지금 대량실업의 공포가 다시 휘몰아치고 있다. 자존심이라는 아상이 남아 있는 사람은 아직 가난한 사람이 아니어서 참으로 힘든 겨울이 될 것이지만 닥쳐온 가난을 참으로 자기 것으로 수용하고 마지막 남아있는 자존심마저 던져버리고 온 몸으로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발심의 계기도 될 수 있고 또 다른 일을 찾아서 삶의 새로운 일막이장이 될 것이다. 참으로 마음 길이 끊어져서 궁하고 궁하여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곳에 걸림 없는 지혜광명이 찬란하기 때문이다.

깊은 밤 산짐승의 울음소리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고 있다.

 

거금도 금천선원장 일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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