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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불교사. 끝]98년 개혁을 역행한 또 한 번의 개혁 소동

기자명 법보신문

저열한 종권 다툼이 부른 필연적 업보

종정-총무원장 갈등 원인…양측 공방으로 폭력·유혈 난무
청사는 불타고 사상자 다수 발생…공권력에 의해 겨우 진정

 
1998년 조계종 분규로 화염에 휩싸인 조계종 총무원 청사.

1998년은 김영삼 정권의 경제정책 실패로 말미암아 IMF로부터 구제금융 지원을 받아 주가지수는 300대로 추락하고, 각 기업과 공무원들은 인원 감축 사태를 맞아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불교계 또한 정화개혁회의라는 세력이 등장하여 1994년 범승가종단개혁추진회의가 중심이 되어 사부대중이 참여하여 민주화를 실현하였던 개혁을 역행하는 분규를 겪게 된다.
사태의 발단은 1994년 서의현의 3선을 저지하기 위하여 개최되었던 전국승려대회 결과 개혁회의가 출범하고 새로운 종단의 총무원장으로 취임하여 4년의 임기를 마친 송월주 스님이 3선을 시도한 데서 비롯되었다.

월주 스님은 3선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11월 3일 총무원장 출마를 선언하였다. 월주 스님이 3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1980년 4월에 총무원장에 취임하였지만 그 해 10·27법난 사태를 맞아 강제로 사임을 강요당하였으므로 1회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맞서는 반대 세력은 적법한 절차에 의해서 당선되어 취임하여 6개월 동안 직무를 수행하였으므로 1회에 해당된다는 것이었다.

송월주 총무원장은 재임기간 동안 반대 세력을 끌어안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었고, 그 이면에는 월하 종정과의 갈등도 있었다. 월하 종정은 총무원장에게 집중된 사면, 종단 재산 처분, 본사 주지 임명 등의 권한을 종정과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총무원장과 갈등으로 인하여 종정은 1997년 3월 원로회의에 사표를 제출하였지만 원로회의는 이 사표를 반려하였다. 월주 스님은 종정의 사표 제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종정 스님은 불탄일에도 법어조차 발표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월하 종정은 월주 스님의 3선 반대 운동에 지지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0월 24일 월주 스님의 3선 출마를 반대하는 승려 30여명이 총무원 청사를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하였다. 월하 종정은 부패한 불교계를 정화하기 위하여 11월 11일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라는 교시를 내렸다. 종정의 교시를 받은 유월탄·이정우·이성문 스님 등 월주 총무원장 체제에 비판적인 승려 300여명이 조계사에서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정화개혁회의를 구성하고 총무원 청사를 접수하였다.

이날 승려대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하였다.
‘송월주 스님의 총무원장직을 해임하고 차기 총무원장 선거를 일시 유보한다. 종단의 위기를 수습하고 정화를 추진하기 위하여 행정·입법·사법의 모든 권한을 한시적으로 위임받는 정화개혁회의를 출범시킨다.’
이러한 결의에 따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11월 12일로 예정되었던 총무원장 선거 연기를 발표하였다. 월하 종정은 14일 서초구 양재동 구룡사에서 원로회의를 소집하여 원로의장을 불신임하고 종회의 해산을 결의하였다.

중앙종회는 11월 20일 총무원장의 임기가 만료될 때까지 후임자가 선출되지 못할 경우 총무부장, 기획실장 등의 순으로 총무원장의 권한을 대행한다는 총무원법을 개정하였다. 개정된 법에 따라 당시 총무부장이었던 도법 스님이 총무원장 직무대행을 하게 되었다.
총무원 집행부는 11월 16일자로 정화개혁회의를 상대로 서울 지검에 퇴거 단행 및 업무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월주 스님은 11월 19일자로 총무원장 후보 사퇴 의사를 밝혔다. 월주 스님의 3선 문제로 야기된 이 사태는 원인 행위가 소멸되었으므로 정화개혁회의는 해산하는 것이 사리에 맞는 일이었다.

정화개혁회의 출범 당시 노선을 같이 하였던 지선 스님은 오랫동안 승려로서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월주 스님의 총무원장 후보 사퇴를 계기로 방향을 전환하여 정화개혁회의는 즉각 해산해야 하고 종헌과 종법의 틀 안에서 중립적인 집행부를 구성하여 선거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그는 총무원 측에 합류하여 정화개혁회의의 노선을 부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화개혁회의 상임위원장 월탄 스님은 16일 총무원 부장 인사를 발표하고, 총무원장 선거법 등 종헌 개정을 포함한 새 체제 출범을 선언하였다. 이날 오후 총무원 청사에서 열린 교구 본사 주지 회의는 “종정 교시와 원로회의 결정을 받들어 정화개혁회의가 사태를 수습해주길 기대하며 이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같은 날 강남구 봉은사에서 개최된 중앙 종회에서는 “14일 원로회의 결의는 종헌·종법상 원천 무효며, 혜암 원로회의 의장을 대회장으로 하는 승려대회를 열겠다”는 것을 의결하였다.

11월 30일 조계사에서 개최된 승려대회에서는 ‘월하 종정을 불신임하고, 월탄·현호·현근·성문·정우·종광·법일·현소 등 정화개혁회의 관계자들을 중징계한다. 전국의 본말사는 현 총무원 집행부의 지시를 따른다’는 것을 결의하였다.
총무원 측은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한 후 청사 진입을 시도 하는 과정에서 폭력 사태가 발생하였다. 12월 11일 서울 지방법원은 총무원 측이 제소한 퇴거 단행 및 업무방해금지 가처분 신청 판결에서 원고 측 승소 판결을 내렸다.

판결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정화개혁회의가 송월주 총무원장의 3선을 저지하기 위하여 종정의 교시에 따라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총무원 청사를 점거한 사실은 위법이다. 이 문제는 종헌과 종법에 따라서 처리할 수 있는 사안이므로 초종헌적 효력을 가지는 전국승려대회를 통하여 해결해야 할 만큼의 비상사태로 보기 어렵다. 종정이 종단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기는 하나 총무원장을 해임하거나 전국승려대회를 소집하는 등의 권한이 있다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다만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에 전국승려대회를 소집하는 권한이 관례상 인정될 뿐’이라고 판결하였다. 이러한 법원의 결정에 따라 총무원 측은 정화개혁회의 측에 12월 14일까지 총무원 청사를 비워달라고 요청하였다.

정화개혁회의 측은 ‘종교의 자율성과 자체 정화 능력을 무시하는 법원의 판결을 유감으로 생각하며 강력한 이의를 제기한다.’고 하였다.

총무원 측은 조속한 공권력의 집행을 요청하였고, 경찰은 12월 23일 전투경찰 50개 중대, 6000여명을 동원하여 대형 포크레인 2대를 앞세우고, 물대포와 함께 조계종 총무원 청사로 진입하였다. 당시 총무원은 78명의 승려들이 월하 종정의 교시를 봉행한다는 명분으로 지키고 있었다. 전투 경찰은 총무원 청사를 지키던 승려들을 향해 물대포를 쏘고, 대형 포크레인은 총무원 청사 1층을 찍어 박살냈다.

그 틈을 타고 백골단 전투경찰 100여명이 최류탄을 발사하면서 진입하였다. 그 뒤를 일반 전경들이 진압봉과 도끼를 들고 총무원 청사를 무차별적으로 부수기 시작하였다.
총무원 청사가 전투경찰에 의해 부서지고, 같은 승려들이 유혈이 낭자하도록 구타당하며 연행될 때 반정화개혁회의 측의 승려들은 박수를 치고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총무원 측은 청사를 되찾고 12월 29일 총무원장 선거를 실시하여 고산 스님과 지선 스님이 입후보한 가운데 제29대 총무원장으로 고산 스님을 선출하였다.

원로회의는 30일 회의를 열어 고산 총무원장을 인준하였다. 정화개혁회의측은 이에 불복하고 1999년 1월25일 총무원장직 부존재확인 소송과 총무원장 직무집행정지가처분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 소송은 정화개혁회의 측이 승소하였다.

1999년 10월 법원은 제29대 총무원장 선거를 위해 총무원장 선거법을 개정한 제136회 임시중앙종회 소집공고 절차상에 하자가 있다는 이유로 고산 스님에 대해 총무원장 ‘자격없음’을 확인하는 판결을 내리고 총무원장 직무대행자로 도견 스님을 선정하였다.
이후 조계종단은 1999년 11월 정대 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선출하여 안정을 도모하였다. 결국 정화개혁회의는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개혁에 역행하는 혼란을 야기 시켰던 것이다.

해방 이후 불교계는 분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폭력을 동원하고, 스님들이 자해 행위를 하는가 하면 총무원 청사에 공권력이 투입되고, 화염에 휩싸이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소집되는 전국승려대회는 불교계의 상징적인 존재인 종정을 불신임하는 것이 다반사였고, 한시적으로 3권을 위임받는 초법적인 기구가 탄생하였다.

불교계의 이러한 모습은 존경받아야 할 스님들의 위상을 실추시켰고, 불교도들의 가슴을 멍들게 만들었다. 분규의 원인은 스님들이 돈과 권력을 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저변에는 일제 치하에서 대처승들이 늘어나 해방 이후 비구·대처승 갈등을 겪으면서 승려들의 자질 향상을 도모하지 못한 데 있었다.

그 오랜 세월의 질곡을 하루아침에 벗어날 수는 없다. 불교는 생사를 넘어서 바른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스님들은 생사 문제를 해결하려는 간절함에서 출발한 초발심을 돌아보고 엄정한 자기반성을 통하여 거듭 나려는 지난한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불교도들은 이제 더 이상 불교계가 분열되는 것을 원치 않으며 화합하는 모습을 거듭 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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