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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 명강의]시인 김지하

기자명 법보신문

불교가 동학 인정할 때
인류의 문명 변동 주도

오늘 이야기는 원론적으로 문명의 큰 변동과정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방향성을 나름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제가 목포에서 태어났으니까 광주를 고향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은데요. 먼저 고향에 왔으니까 열 셋에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제 자신의 처지, 그러니까 가족사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예의일 것 같습니다. 제 아버님은 6·25전쟁 이전부터 공산주의자였습니다. 월출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했을 만큼 치열한 공산주의자였으나, 그로 인해 하산 이후 지독한 모욕을 당하면서 몇 차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전쟁 때 총알받이로 나섰다가 살아난 후 고향으로 갈 수 없어 강원도에 정착했고, 제가 고향을 떠나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고향을 떠난 것이 제게는 늘 큰 아픔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4·19 이후로 민족통일운동 등에 조직적으로 가담한 적이 없습니다. 전진적인 사상적 공부를 많이 하기는 했으나 맑스주의자가 된 적도 없고 조직에 들어간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행동은 언제나 앞서서 해왔습니다. 때문에 사회개혁이라든가 사회변역이라든가 하는 것에서 큰 거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차원에서 저는 최근의 촛불을 거대한 문명의 전환사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제휴했던 새 촛불로서의 가톨릭 사제단과 불교의 스님들이 든 촛불은 단일문명이 아니고 인류문명사 전체를 바꾸는 대전환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화엄개벽의 길’에 대해 말씀드릴텐데, 여기서 개벽은 동학을 말합니다. 그리고 화엄은 그야말로 불교 최대의 사상이지요. 이 둘이 어떻게 만나서 구체적 방향이 될 것이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제 개인적으로 아주 감개무량한 일입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하자면 저의 증조부 김영배 씨는 암태도에서의 어떤 사건으로 섬을 탈출해 김제로 왔고, 거기서 동학당 두령 김인배 씨 밑에서 동학당이 되었습니다. 그후 동학재건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셨고 이후로 집안의 사상은 동학이 되었습니다. 제게는 조상이 왜 암태도라고 하는 외진 섬으로 옮겨갔었을까 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의문이었는데, 집요하게 이것을 추적해서 얻은 결론은 불교입니다.

불교 중에서도 하층 승려들의 비밀조직인 당취와 연관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고려말 신돈의 개혁을 추종했던 많은 승려들이 비밀결사를 조직해서 금강산과 지리산에 근거지를 두고 역사에서 드러나지 않는 엄청난 불교스타일의 민중운동을 해왔습니다. 이 당취 계열의 불교도로서 제 조상이 임진왜란 이전에 반정부사건에 연루되어서 암태도로 피신한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따라서 이 나라에서는 살기 힘든 저주받은 가족사가 되는 것입니다.

내 조상은 당취 계열의 불교도

당취는 정치적으로 반정부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호혜, 재분배, 사랑을 포함한 공생조직, 난전, 경조 개혁, 소규모 상점, 5일장 등에 깊이 개입했습니다. 사상적으로는 의상과 원효 이래로 한국사상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화엄사상입니다. 그리고 고려시대에 와서 지눌과 의천에 의해서 정식으로 제기됐던 한국불교사상으로서의 핵심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 화엄선, 화엄사상을 한 개인의 실천에 넣으려고 했던 화엄선 사상이고, 개인적 차원에서의 화엄선 사상 수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화엄개벽의 길에 대한 대답은 이미 나왔습니다.

저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문명의 변동이고, 문명의 변동에서 기초적인 것이 기독교와 불교의 화해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10월 중순경 통영에서 기독교장로회 목사들이 주최한 세미나에 가서 기독교와 불교의 화해문제에 대해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환청은 아니고 이상하게 마음 안에서 저를 부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마음의 소리를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나오다보니까 진주까지 가야할 것 같아서 진주까지 갔고, 더 가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익산까지 갔습니다.

익산 가까운 곳에는 제 증조부인 김영배 씨가 암태도에서 도망 나와서 동학을 하던 마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곳으로 갔습니다. 아무런 기대도 없이 갔는데 거기서 우연히 당시 두령이었던 김인배의 직계 자손을 만나서 제 증조부의 실질적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광양 전투에서 부상당해 도망가서 숨어있던 곳이 영광 법성포였고, 이곳은 마라난타가 상륙한 지점이지요. 그래서 다시 영광까지 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소설 『뿌리』를 쓴 미국의 흑인작가 알렉스 헤일리는 노예선에 끌려온 선배들의 뿌리를 찾아서 아프리카로 갔고 그곳에서 밀림과 강을 보고 확인한 뒤에 “인간의 진정한 삶은 이 대지에 자기의 뿌리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부터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조상들이 이곳에 살았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비로소 자기의 실존적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그래서 영광의 주화실로 갔습니다. 할아버지가 배신자들에게 피살당한 곳이 주화실에서 광주로 오는 길이었다고 하는데, 당시 할아버지의 피살 이유는 동학재건운동 과정에서 불교를 끌어들인 것이 직접적 이유가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향으로 오는 것이 더더욱 쉽지 않았습니다. 쫓겨난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 이야기가 있어서 오늘 강의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는 조상들의 사상적 아픔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라난타의 역사를 고려했던 것이고, 그렇게 해서 불교와의 결합을 시도하다가 피살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결국 할아버지를 찾아 그 밤에 그 먼길을 달려오게 된 것인데 할아버지가 제게 주려는 메시지는 ‘불교와 동학의 결합에 네 인생을 던져라’하는 것 같습니다. 제게는 간단한 사건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과장되게 폼 잡을 생각도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키 포인트를 먼저 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화엄개벽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화엄개벽이 그야말로 개벽이 되려면 동양체계 전체를 대문명으로 총괄하는 역(易)이 필요합니다. 정역(正易)을 중심으로 한 천부경까지의 사상이 현재의 개벽입니다. 그 이유는 5만년 전 인류 출현으로부터 복잡한 네 단계의 개벽적 역의 변화를 압축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문명변동은 화엄을 구체적으로 이 역 사상에서 화엄사상으로 펼치기 위한 우주의 변혁으로, 또 개벽으로 화엄사상을 읽지 않으면 할 말이 없습니다. 어마어마한 자본이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저 간단한 사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화엄개벽과 오역의 관계를 밝혀야 합니다.

두 번째는 화엄개벽을 추진할 수 있는 주체의 자격으로서 모심이라는 윤리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화엄개벽의 수련을 불교 쪽의 참선은 물론 동학의 수련에서 찾아야 합니다. 동학 수련의 기본은 13자 내지 39자의 주문인데, 이 주문 안에 있는 기본이 화엄사상입니다. 화엄은 전 우주적 스케일을 갖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전라도의 역사와 동학 이야기입니다. 이제 네 가지 키포인트를 제시했으니까 할 말은 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화엄경』이 왜 중요할까요. 유럽의 철학자들은 혼돈사상이나 신좌익이라든가 하는 여러 문화혁명이 유럽을 결정할 줄 알았으나, 이것을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헤겔, 칸트 등 근대 초기의 철학으로 돌아갔는데 제 입장에서 볼 때는 반동입니다. 공산당식 반동이 아니고 혼돈, 개별성, 개체성, 우연성, 돌발성, 창의력, 상상력, 감성, 영성 이런 것들이 존중되는 것이지요. 이런 것들이 불교에서 말하는 원만이고 화엄입니다. 이것은 수용의 다양성을 말하는 것이고, 촛불에서 보는 것처럼 전부 자기식으로 받아들입니다. 자기식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선전선동에 말려들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이 바로 이 원만성입니다.

좌우익 양쪽에 기울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유럽의 전체주의적 통합이론, 뉴턴이나 데카르트의 철학으로 돌아가는 것은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 생태학으로 유명한 독일의 미카엘 데이비스 같은 사람은 영성을 배제하고는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인간의 영적 요구에 대답을 하면서 구원의 길을 찾아야 하고 그 대안이 결국 동아시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격, 비인격의 모두를 우주공동체로 드높이는 모심 없이는 대안이 없다고들 하고 있는데, 이 판에 『화엄경』이 대안이 안될 것 같습니까. 대안은 『화엄경』입니다.

화엄의 다양성 필요한 시대

다음으로 모심을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불교에서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할 때 나무는 귀명(歸命)이지요. 목숨으로 돌아간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서 불교는 구체성이 약합니다. 그래서 구체성을 가진 조선종교 동학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보편진리는 특수 속에서만 가장 빛나는 것입니다. 대웅전 뒤에 삼성각과 칠성각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렇다면 화엄을 현실에서 실현시키는 주체의 자격은 무엇이겠습니까. 귀명 이야기를 했지만 나무아미타불이 결국 빛과 생명 아닙니까. 빛을 발하고 마음이 평화로워야 합니다.

그래서 모심 없이는 안되겠다는 말이고, 이것은 곧 생명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생명은 빛과 목숨 그리고 아미타입니다. 구체적으로 환멸연기입니다. 생명은 혼란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혼란은 무질서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화엄경』이 바로 다양성 아닌가요. 경전을 보니 선재동자도 매일 떠납니다. 그런 적극성이 없이는 이 복잡한 세상을 헤쳐나갈 수가 없습니다. 동학은 바로 이 모심부터 시작을 합니다. 이 큰 불교가 동학의 13자 혹은 39자의 주문 안에 화엄사상이 가득 찼다는 것을 보면서 놀라지는 않더라도 ‘그것 참 대견하네’정도로 인정하는 것은 필요한 것 아닙니까. 이런 민족의식 없이는 『화엄경』운동 못합니다.

미국 자본주의의 기초는 막스베버가 다졌으며 이후 개신교가 자본주의의 배경이 되어 자본주의를 확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가 새 시대에 생명과 평화의 사상을 만들려면 시장패턴을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 이뤄지고 있는 매일 매일의 물물교환 그리고 물건을 교환하는데서 생기는 이윤의 분배과정, 호혜, 재분배가 하나는 사회주의로, 하나는 자본주의로, 하나는 종교의 자선사업으로 찢어져 있는데 이 세 갈래 길이 통합돼 있었던 것이 고대시장입니다. 그게 신시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부활시키지 못하면 현대인들의 경제문제에 대답을 못합니다. 생명평화 역시 가장 기초적인 것이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되고, 그것이 모심입니다.

불교는 문화운동의 형태로 『화엄경』이 가진 그 엄청난 다양성을 호혜, 교환, 재분배의 혼돈한 기능을 가진 시장에서 보고 새로운 시장에 대한 영감을 줘야 합니다. 불자다운 도덕이 시장에서부터 나오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심의 주문 안에 어떻게 화엄이 들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모심이 갖는 참선의 형태가 동학의 주문구조에 들어 있는데, 동학개벽사상은 세 가지 주문수련에 모두 집약됩니다. 첫째는 강령주(降靈呪)에서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입니다. 최제우는 이 지기를 극에 도달한, 텅 비어 신령하면서도 가득한, 간섭하지 않는 것이 없고 명료하지 않은 것이 없는, 모든 것이 고르고 모든 것이 틀린, 형상이 있는 듯 하지만 형상을 잡을 수 없고, 들리는 듯 하지만 볼 수가 없는, 혼돈한 근원의 한 거대한 우주 기운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화엄사상의 대천제라고 봅니다.

둘째 본주(本呪)는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 영세불망만사지(永世不忘萬事知)’인데, 이것은 한울님을 모시고 창조적 조화와 진화에 일치해서 살며 이것을 자신의 평생동안 잊지 않으면 모든 것을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시(侍), 즉 모심이라는 것은 안으로는 신령이 있고 밖으로는 복잡하고 다양한 기운에 변화가 있으며 물질의 변화를 말합니다.

한 세상에 모든 사람이 따로 옮기되 옮길 수 없음을 각각 자기 나름 나름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이때 따로 따로 옮기되 옮길 수 없음이 불이(不二)인데, 이것은 송나라 주자가 당시에 압도해 오는 화엄불교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화엄을 불이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성리학 해제를 15권이나 읽고 난 결론이기도 합니다. 이거 불교에서 처리해야할 사항 아닌가요.

불교가 화엄문화운동 펼쳐야

불이는 화엄의 번역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시천주. 즉 동학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한울님이죠. 그런데 가장 중요한 한울, 천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시천주라고 해 놓고는 주에 대한 설명만 있고 천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이것이 불교와 관계가 없을까요. 『화엄경』 전체에 비로자나불의 말 한마디 없으니, 비로자나불이라고 이야기하진 않겠습니다. 그러나 비로자나불과 비슷한 근원이면서 텅 빈 것. 이게 한울님에 대한 한국민족의 근원적 인식체계라고 볼 수는 없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만사지는 모든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수가 많다는 것인데, 왜 수라는 말을 썼을까요. 수(數)를 보통은 경우가 많다고 해석하지만, 모든 경우를 이해한다고 합니다. 동아시아에는 수의 범주에 수억 천만 개가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수, 이것이 바로 『화엄경』의 수입니다. 왜 이것을 모릅니까. 그것은 스님들의 오만이고, 동학도의 무식이고, 김지하의 월권적 상상력일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맞는지는 여러분이 생각하십시오. 

광주=심정섭 기자


김지하 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반체제 저항시인으로,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생명사상가로 활동하고 있는 시인이자 사상가이다. 1970년 『사상계』 5월호에 권력 상층부의 부정과 부패상을 판소리 가락으로 담아낸 담시 ‘오적’을 발표하면서 박정희 군사 독재 시대의 ‘뜨거운 상징’으로 떠올랐다. 1984년 사면 복권된 후 민중사상에 독자적 해석을 더해 ‘생명사상’이라 이름하고 생명운동에 뛰어들었다.


김지하 시인이 지난 11월 29일 광주불교환경연대에서 ‘화엄개벽의 길’을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요약 게재한 것이다. 김지하 시인은 다음호부터 ‘화엄개벽의 길’을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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