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당 김지하가 쓰는 화엄개벽의 길]④ 촛불이 바로 그 별이다.
[동학당 김지하가 쓰는 화엄개벽의 길]④ 촛불이 바로 그 별이다.
  • 법보신문
  • 승인 2009.01.19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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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은 경건하고 고즈넉한 ‘모심(侍)’이다
 
김지하 시인은 지난해 5·6월 어린이·청소년·여성들이 시작한 첫 촛불과 7월 천주교사제단과 불교의 스님들이 밝힌 새 촛불 사이의 관계가 주역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삼팔동궁’ 이라고 설명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촛불이 바로 그 별이다.
촛불도 별도 하나의 빛, 무수한 털구멍 속에서 열리는 저 숱한 부처님의 광명의 하나다.
별을 찾는 우리는 이 촛불을 먼저 잘 살펴야 한다.
촛불이 과연 무엇인가?
나는 그동안 수많은 박학다식한 지식인과 고명한 관련 전문가들을 만나 끊임없이 촛불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참으로 기이하게도 그들 중 단 한 사람도 촛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이는 없었다. 촛불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기이하고 또 기이한 일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고 그 해명을 시도하고 또 시도한다. 어쩌면 이점이 더욱더 기인한 일이다.

왜 그럴까?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뭔가 엄청난 인간과 사회변동, 세계변동, 지구변동의 시작이라는 막연한 예감 때문이라는 것이 공통된 대답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함부로 짝퉁을 허락하지도 않고 이용되기를 거부하며 그렇다고 쉽게 꺼져서 사라져버리는 것도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글을 쓰고 있는 무자년의 연말연초에 또다시 ‘촛불산책’이란 형태로 켜지기 시작하는 그러나 그 정체가 과연 흰 촛불인지, 검은 숯불인지 시뻘건 횃불인지 아직은 분간할 수 없는 12월 31일 밤 자정에 보신각 앞에서 또 켜진다는 똑 젊은 촛불들 자신의 말처럼 ‘좀비’같은 것.
물론 외면적으로는 디지털 네트워킹이라는 새로운 소통양식의 한 문명현상이라는 것. 특히 한국 IT문화의 독특한 창의적 집단표현이라는 점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그런 분명한 규정을 훨씬 넘어서 해일처럼 휩쓰는 어떤 불가사의한 대변동의 느낌을 어쩔 수 없다는 것이 다수의 의견이다.

희미하긴 하지만 세 가지 이야기들이 떠돌아다닌다.
첫 번째는 토론, 합의, 문화정치적 표현 등이 꼭 고대 직접민주주의인 화백(和白) 같다는 것. 그래서 아시아적 네오·르네상스의 조짐 같다는 것.
두 번째는 똑 『화엄경』의 ‘인드라망’같다는 것. 세계그물의 네트워크 속에서 수많은 그물코마다 수많은 보살들이 일어나 저마다 서로 다른 독특한 의견을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월인천강(月印千江)’같다는 것.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조금은 두려운 얼굴들을 하고 수군거리는 후천개벽 이야기다.
온난화의 더위와 간빙기(間氷期)의 추위가 엇섞여들고 북극의 해빙(解氷)과 적도의 결빙(結氷) 등을 수군 수군 수군.
그러나 이 세 가지 견해를 비치는 사람의 수(數)의 비례는 전혀 파격적이다.
마지막 세 번째 견해는 인터넷신문 프레시안 기고문들에서 필자 단 한 사람뿐, 모두다 공개된 신문 보도내용들인데도 그저 입을 가리고 수군, 수군할 뿐이다.
두 번째는 젊은 인터넷 도사 몇 사람과 젊은 스님들 사이에 잠깐 잠깐 스쳐간 『화염경』과 ‘집단지성’ 사이의 관계 이야기 몇 토막 정도.
그러나 첫 번째는 굉장히 많다.
이것만이라도 큰 다행이다.
사실이니까.

그렇다면 다시 묻자.
촛불이 무엇인가?
작년 내내 촛불 파동이었다.
촛불인척 하는 횃불도 있었고 횃불인척 하는 숯불도 있었다.
횃불은 ‘불현당’, ‘불켠당’, ‘명화적(明火賊)’‘활빈당(活貧黨)’ 즉, ‘정의의 홍길동’들이 가난한 집에게 재물을 나눠주기 위해 부잣집을 덮칠 때 한밤중 지글지글 공중에 타오르던 시뻘건 혁명의 불이고, 숯불은 고기를 구워 먹기 위해 화로 안에서 피워 올리는 잔치의 시커먼 불이다.
촛불은 그럼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경건하고 고즈넉한 ‘모심(侍)’이다.
한없이 가라앉으면서 그지없이 타오르는 것, ‘흰 그늘’이다.
어둠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초월적 중력의 표현이다. 고통으로부터 태어나는 기도다. 죽음으로부터 부활에 이르는 통과의례요, 하늘의 도(天道)는 내리고 동시에 땅의 도(地道)는 오르는 것이며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해방하는 것(上求菩提 下化衆生)이다.

촛불은 부처님 광명 찾는
보리심 자체요, 임금자리
복귀하는 후천개벽 자체

촛불은 중생의 삶의 한 복판에서 부처님의 눈부신 광명을 찾는 보리심 그 자체이고 밑바닥 꼬래비의 지옥과 같은 소외(疏外)로부터 서서히 해방되어 본디의 임금자리에 복귀하는 후천개벽, 즉 ‘기위친정(己位親政)’그 자체다.
후천개벽의 역학(易學)인 김일부(金一夫)의 정역(正易)은 달을 중심으로 한 우주대변동을 후천개벽이라 보고 365일의 윤달이 없어지는 정역(正曆) 360일의 세계가 나타날 때 바로 그 촛불이 켜진다고 했다. 올해 7월 22일 전후에 동북아시아에 일식(日蝕)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윤달현상을 말하는 ‘윤초’로서 이 또한 ‘정역’과정의 일종이라 한다.
이제껏 사람취급 못 받던 이십 미만의 청소년과 어린이, 그리고 수 천년 내내 지지리 구박만 받아오던 여성들이 직접 민주주의에 의한 정치전면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태가 일어나고(十一一言) 이때에는 이제껏 이세상의 내면적 질서, 즉 종교, 사상, 문화와 교육을 담당하던 멘토들이 한 발작 뒤로 물러나 세상에서의 자기의 지배권력을 텅 비우고 다만 대의제(代議制)적인 도움과 보호를 제공하는(十五一言) 소극적 입장을 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십일일언’을 ‘기위친정’이라 하고, ‘십오일언’을 ‘무위존공(戊位尊空)’이라 부른다.
친정(親政)이란 민중이 직접 정치의 주역이 된다는 뜻이고 존공(尊空)이란 자리를 비우고 간접·보완적 위치로 물러난다는 뜻이다.
바로 이같은 양면이 함께 일어나는 사태를 두고 정역은 ‘삼팔동궁(三八同宮)’이라, ‘간태합덕(艮兌合德)’이라고도 일컫고 있다.
셋(三)이 건강과 생명, 생활, 생태, 생존을 직접 감당하는 ‘평위산(平胃散)’같은 약(藥)이라면 여덟(八)은 명상, 사상, 철학, 과학, 마음을 고르게 살찌우는 간접적인 ‘양심탕(養心湯)’같은 것이겠다. 바로 이 셋과 여덟이 함께 대 개벽에 협력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니 불교 쪽에서 본다면 간단히 말해서 부처를 따르는 보살의 가르침과 중생의 구체적인 삶의 상호관계와 같은 것이다.

작년 5월 6월의 첫 촛불(어린이, 청소년, 여성 및 쓸쓸한 대중)과 7월의 새 촛불(천주교사제단과 불교 승가회 스님들) 사이의 관계는 전형적인 ‘삼팔동궁(三八同宮)’이라 하겠다.
이때 특징적인 것은 ‘싸이버 생태학’‘영적생명(靈的生命)’의 문명복합이 하나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후천 디지털 네트워킹과 선천종교(先天宗敎)의 영적 사목의 확장과정과 함께 생명문제인 먹을거리, 물, 건강, 생태, 생계, 생존문제가 바로 현대문명의 핵심 정치 아젠다가 되고 사회적 논의의 초점이 된다.
그리하여 영적생명운동의 특징적 표현인 비폭력, 평화, 유머, 풍자, 노래, 춤, 자발성, 비조직, 개체성과 자유, 그리고 자연스러운 융합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른바 ‘풍류(風流)’다.

간단히 묻자.
이런 특징들은 불교적 행동양식, 특히 이른바 화엄세계와 전혀 무관한 것인가?
고려 때의 그 ‘팔관회’와 무관한 것인가?
작년에 있었던 시청 앞 광장의 범불교도대회와 비교한다면 어떨 것인가?
여기에서부터 ‘화엄개벽’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나가야 한다.
‘화엄개벽’은 강증산의 이른바 ‘만국활계(万國活計)’즉 ‘만국을 살릴 계책’이다. 그런데 강증산은 그 계책이 곧 ‘남조선’이라 했고 또 그것은 남쪽 조선임이 틀림없지만 한발 더 나아가 ‘남은 조선사람’,‘나머지 조선사람’이라고 했다. ‘나머지’는 곧 ‘꼬래비’이니 바로 ‘기위(己位)’다. 다름 아닌 ‘촛불’이다. ‘소외(疏外)’ 문제이니 ‘중생’이고 ‘네페쉬하야’인 것이다.

어떠한가?
이때 주의해야 한다.
이때에 우주와 지구와 사회와 세계문명은 그저 고요한가?
2004년 인도네시아 대 해일로 26만 명이 한꺼번에 죽었다. 대 해일의 원인은 대륙판과 해양판의 충돌이었고 또 그 충돌의 근본 원인은 지구 자전축의 이동, 북극이동에 있었다.
서구 지구과학이 지금도 내부 논쟁중인 내용인데 이것은 정역에 뚜렷이 제기된 이른바 ‘기위친정’ 현상이다. 이어서 북극을 구성하는 지구에너지 수렴 축인 ‘지리극(地理極-geographic pole)’과 지구와 외계 우주와의 에너지 확산 연결고리인 ‘자기극(磁氣極-magnetic pole)’사이의 상호이탈과 재형성, 그로 인한 대 빙산의 본격 해빙과 동토대 밑 메탄층의 대규모 폭발, 그와 정반대로 적도의 결빙과 눈, 뜨거운 물과 차거운 물이 복잡화하는 남반구 해수면의 대대적인 초과상승, 전 대륙의 곡창인 저지대의 대규모 침수와 함께 예상을 훨씬 초과하는 세계인구의 기하급수적 증가, 온난화와 간빙기(間氷期)의 교차생성, 극도의 더위와 추위의 겹쳐들기, 생명계의 괴변 속출, 죽지 않는 생명체의 출현과 재진화(reevolution), 각종 괴질(怪疾) 발생과 생식력, 생산력 감퇴, 정신파탄, 자살자 대량증가, 불임(不姙)과 불감증(不感症), 극도의 피로감(疲勞感) 만연, 해일, 화산, 지진, 산불, 토네이도, 침강, 융기 등이 접종(接種)하고 있다.
전 인류의 보편적 문화현상은 퇴폐일변도다. 추(醜), 질병, 절망, 괴기, 살륙, 난륜, 공포, 정신파탄이 압도함에도 그 극복이나 승화의 조짐인 ‘심오’와 ‘숭고’의 예감은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
이른바 문명충돌이라 부르는 이스라엘과 이슬람의 전쟁, 테러, 살륙이 빈발한다.
이 어둠의 한복판에서 미국의 금융위기가 마치 ‘쓰나미’처럼 폭발한 것이다.
1930년대 공황과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문명의 변동과 대 이동을 내포하고 있고 그 이념이나 사상적 성격 자체가 복잡하고 판이하다. 문명이 대서양 중심에서 동아시아·태평양 또는 아시아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은 누구나 안다. 이에 관련한 경제전문기구들의 예측과 판단은 이제 상식 차원이다.

시청 앞 범불교도 대회
여기서부터 화엄개벽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나가야

한국·미국·일본·중국 중심의 경제 통합의 조짐과 그 중심이동의 흐름이 여실하고, 여기에 러시아와 인도 등이 또한 동반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바짝 주의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이 국내적으로도 개혁, 균형, 조화의 확고한 중도(中道)를 명실공히 지향하고 있는 점, 미국 국가정보위는 공식견해로서 다음과 같은 단정을 내리고 있는 점 따위 말이다.
‘현대세계의 특징적 흐름은 세계권력과 자본의 중심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명백히 이동한다는 점과 그럼에도 전세계는 각기 자기자신의 위상을 유지하는 다극체제(多極體制)로 발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중심성이 결합된 보편적 해체(the integrated network)현상’이다.
이것이 무엇인가?
상당수의 경제학자들 내부로부터 새로이 예상되는 ‘아시아, 동아시아, 태평양 신문명의 새로운 경제질서’는 대체로 미국이나 유럽방식의 프로테스탄티슴 유일(唯一)토대의 ‘신자유주의 시장 일변도’가 전혀 아닌 ‘호혜(互惠), 교환(交換), 획기적재분배(劃期的再分配)’라는 아시아 고대시장의 탁월한 현대화 방향이다. 이른바 ‘착한 경제’에의 일반적 갈증이 폭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또 무엇인가?
이것이 쉽게 말해서 광범위한 ‘부처님과 중생의 관계’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 아니던가?
또한 이것들은 세계와 지구, 우주, 생명, 그리고 문명의 변동이 단순한 개혁이나 혁명이나 개량차원이 아닌 그야말로 ‘후천개벽’이어야 함을 뜻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참으로 이것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자. 다름 아닌 바로 『화엄경』이다. 달이 천 개의 강물에 각각 모두 다 다른 모습으로 비침(月印千江)이요, 작은 먼지 한 톨 안에도 우주가 살아 있음(一微塵中含十方)이라는 화엄세계의 구조와 경제원리 그것이다. 수수억천만 털구멍마다 각각이 서로 다른 부처님들의 광명이 헤일수 없이 무수한 다극(多極)을 이루되 그 온 화엄세계의 주불(主佛) ‘비로자나’의 거대한 중심성에 반드시 연결되는 것. 그리고 먼지투성이 장바닥에 함께 참여하되 제 이익만 밝히는 탐욕에는 결코 물들지 않는 불교 나름의 탁월한 이중성의 경제원리.
왜 이리 대중적, 일반적, 세속적으로까지 부처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인가?
이미 유럽에서 불교신자가 카톨릭보다 더 다수를 점하고 있고 미국에선 천만을 훨씬 넘어섰다. 인류문명사 본연의 귀향, 그 대규모 환귀본처(還歸本處)는 이미 당연지사가 된 것이다. 다만 그것이 지금 모골이 송연하게 진행되고 있는 후천개벽과 깊이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제 남겨진 문제다. 이른바 곧 ‘화엄개벽’이다.
그 첫 신호인 촛불을 잘 살펴야 하는 바로 그 까닭이다. 19세기 내내 이미 화엄개벽의 조짐으로 가득찼었던 그 남조선으로 우리의 선재를 이끌어 갈 바로 그 별! 그 별이 다름 아닌 촛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촛불은 바로 화엄개벽의 실천적 주 동력인 ‘모심’이기 때문이다.

김지하 시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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